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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스콧 니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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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적이'에 해당되는 글 38건
  1. 2014/06/03 [자료리뷰] 협동조합의 사회-경제적 이론
  2. 2014/05/29 [자료리뷰] 최저임금 결정 기준
  3. 2010/05/05 새마을운동의 재해석이라는 시도 - '자료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5)
  4. 2010/04/02 생각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5. 2010/02/19 [풍경] 전철안에 남아 있는 대화 - 재미도 없고 외롭다... (4)
  6. 2010/02/01 내 삶의 언어와 경험과 웃음을 가져다 주던 滋養... (2)
  7. 2009/11/08 미디어법 헌재 결정과 문화산업 노동시장 재편에 대한 단상
  8. 2009/11/05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작가와의 만남을 듣다.
  9. 2009/09/21 현장 르뽀 또는 다큐에 대한 단상 - <한겨레21> 기획연재 '노동OTL'을 읽고...
  10. 2009/08/10 우리 안의 내부 식민지와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11. 2009/07/04 도시사회의 지배양식 - 마르크스의 상품 비판
  12. 2009/07/03 인생은 인간이 놓치고 있는 기회이다-칼 폴라니-
  13. 2009/05/16 집시의 기도 - 충정로 사랑방에서 한 동안 기거했던 어느 노숙인의 시
  14. 2008/10/29 처음처럼...
  15. 2008/10/25 [사랑공부] 사랑도 공부가 필요하다...
  16. 2008/10/15 비정규노동자들의 삶의 불안과 빈곤, 노동의 권리를 노예의 권리와 동등한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17. 2008/10/07 스펙타클의 사회
  18. 2008/07/10 [연구노트-Learning to Labor] 학교와 계급 재생산
  19. 2008/06/24 자본주의의 아비투스 - 완벽한 소외는 소외의 의식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1)
  20. 2007/11/01 하나의 '단어'를 '개념'으로 상승시키는 과정과 '비정규 노동'
  21. 2007/10/17 흔히들 말한다. 네(내) 멋대로 살아라~
  22. 2007/09/07 비정규노동에 대한 우리들의 상황논리와 사회적 태도 -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
  23. 2007/08/15 후쿠야마의 문화적 특성과 신뢰 수준
  24. 2007/08/14 [빵과 장미] 구조조정의 그림자와 "씨발 놈의 회사"
  25. 2007/08/08 취향은 아비투스가 다른 아비투스와의 관계를 확인하는 중매쟁이다(Bourdieu, 1984:243)
  26. 2007/08/05 [빵과 장미] 개인사업을 하겠다는 헌승이의 꿈과 박씨 아저씨의 파견
  27. 2007/05/26 도시사회, 그 시공간의 시점
  28. 2007/05/08 나를 값지게 하는 10가지 충고
  29. 2007/04/04 「빈집의 약속」- 문태준
  30. 2007/04/02 언젠가부터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31. 2007/02/12 무엇을 쓸 것인가를 악착같이 잡고 늘어져라...
  32. 2007/02/09 [빵과 장미] 하청 용역노동자들과 함께 나누는 정규직 노동조합 활동
  33. 2007/02/09 줄을 벗어났으니 광막한 공간이 나를 품어줄 것이다
  34. 2007/01/18 모든 시간의 언어는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잠정적인 과오다.
  35. 2007/01/12 비정규 노동자의 삶에 관한 책들- 내용에 대한 접근 방법과 글의 구성을 중심으로
  36. 2006/12/10 현대 도시 속의 삶...
  37. 2006/10/24 가을비 - 도종환
  38. 2006/10/24 도시의 삶과 노동 - 워킹투데이
[리뷰자료]
전형수(1993), 협동조합의 사회-경제적 이론, 한국협동조합연구 Vol.11.

[리뷰포인트 및 요약]
- 본 논문은 혐동조합이 시장경제의 육성에 적합한 수단임을 논증하는 논문으로, 협동조합의 행위권을 효과적으로 촉진할 수 있는 이론-개념적 방안 제시에 역점을 둠.
- 사회주의 국가에서 생산재의 소유권은 국가 혹은 사회 내지 공공단체에 귀속되어 개인의 사유권은 인정되지 않음. 그러나 협동조합 생산재의 분배와 이용에 관한 행위권은 협동조합 회원인 개인에 주여짐. 따라서 협동조합의 행위권은 회원공동에 의한 '사회적'인 것이지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주장.

- 협동조합에 대한 견해는 적극적 지지론, 비판적 지지론, 부정론으로 구분할 수 있음. 본 논문은 협동조합을 자유시장 경제 측면에서 지지하는 비판적 지지론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 예컨대 협동조합에 대한 부정론은,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산할 수밖에 없는 일시적 기업으로 평가함에 비해, 본 논문은 협동조합이 자유시장 경제 내에서(현실은 불완정경쟁시장임을 주지) 경쟁력을 가질 수 있고, 유효경쟁을 창출할 수 있고 시장대항력을 가질 수 있다는 입장임.
- 이와 같은 비판적 지지론 입장은 기존의 비판적 지지론과 결을 달리함. 기존의 비판적 지지론은 혐동조합과 같은 사회적 경제조직이 새로운 제3의 경제질서 형성 가능성을 지지하나, 본 논문은 협동조합의 제3의 경제질서를 형성한다는 생각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비판함. 오히려 협동조합을 통해 시장경제체제가 보완 및 발전되어 왔다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음.

- 국가는 작은 국가를 지향하나 시장실패의 경우, 전체 경제적 관계의 유지 개선을 위한 경제 구조 및 경제질서를 계획적으로 구성할 필요성이 있을 때 개입할 수 있다는 입장임.

[주요 본문 내용]
- 협동조합의 개념은 유동적이며 목적지향적 개념이기에 구성형태와 조직의 특성에 비중을 두고 있음.
- 협동조합이 촉진위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회원의 참여를 전제함. 회원은 기업으로서 협동조합을 위해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제공해야 하며, 다른 한편 이 기업이 생산한 재화 및 용역을 이용해야 함. 이와 같이 주인이면서 고객인 동질성에서부터 회원에게 요구되는 협동조합적인 참여는 촉진위임의 성과를 경정하는 핵심요소임.
- 협동조합의 3원칙(Schulze Delitzsch), 자조, 자기관리, 자기책임
- 협동조합의 절대원칙: 자조, 연대, 민주주의, 경제, 자유, 평등(무차별), 애타주의, 사회적 발전 촉진
- 협동조합은 조합원이 경영기구의 주인르로서 역할과 동시에 영업 파트너로서의 역할이 주저짐. 이를 동질성 원칙이라 함...

[관련 용어]
- 국가촉진협동조합: 정부가 이니셔티브를 쥐고 협동조합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형태
- 관제형 발전도구: 국가에 의해 촉진 통제되는 형태 협동조합.



[리뷰자료]
김유선(2014), 최저임금 결정기준, KLSI 이슈페이퍼(2014-14),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리뷰포인트]
- 임금불평등과 저임금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정책수단으로 최저임금에 대한 검토 필요.
- 현재 정부와 노동계가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는 최저임금 결정 기준은 상이함. 이 차이에 따라 정부는 현재의 최저임금이 적정하다고 주장
- 2014년 최저임금: 시간급 5,210원 / 일급: 41,680원(8시간) / 월급: 1,088,890원(209시간)
(시간급 참고: 2013년 최저임금: 4,860원 / 2012년 최저임금: 4,580원)
- 본 페이퍼는 정부의 최저임금 기준의 불합리함을 지적하고, 합리적 기준 제시.


                                     정부                                      노동계

1) 평균기준:                  중위임금                            평균값
2) 비교대상:      1인이상 사업체 전체 근로자              5인 이상 사업체 상용직 임금
3) 임금액기준:                월환산임금                       시간당 평균임금과 최저임금
4) 정액기준:                   정액급여                           통상임금(정액급여 + 고정적 특별급여)


[논문요약]
임금불평등이 심화되고 저임금계층이 양산되면서 최저임금에 대한 관심이 높아
지고 있다. 2012년 말 대통령 선거 때 박근혜 후보는 ‘경제성장률+물가상승률+소
득분배조정분’을 기준으로 최저임금을 인상하겠다고 공약했고, 문재인 후보는 ‘최
저임금을 평균임금의 50%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고 공약했다.
이들 공약을 종합하면, ① 중장기적인 최저임금 수준 목표치는 평균임금의 50%
로 하되 단계적 인상을 추진하고, ② 평균임금의 50%를 달성할 때까지는 매년
‘경제성장률+물가상승률+소득분배조정분’을 하한선으로 하여 최저임금을 인상하는
방향에서 합의 도출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처럼 최저임금 결정기준에 합의한다 해도 문제가 말끔히 해소되는 것
은 아니다. 어떤 자료를, 어떤 기준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최저임금 수준에 대한
평가와 대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노동부의 사업체노동력조사 결과 중 ‘5인 이상
사업체 상용직의 시간당 정액급여(또는 통상임금) 평균값의 50%’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명박 정부 때 ‘경제성장률+물가상승률’은 연평균 6.5%인데, 5인 이상 사업체
상용직 노동자들의 임금인상률은 3.2%로 매년 3.3%p 덜 올랐고, 조정 노동소득분
배율은 2008년 90.1%에서 2013년 84.6%로 5.5%p 떨어졌다. 이명박 정부 때 악
화된 분배구조만 개선하려 해도 앞으로 5년 동안 노동자들의 임금인상률은 매년
‘경제성장률+물가상승률+3.3%’ 이상이 되어야 한다.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적용되
는 최저임금 인상률이 이보다 높게 책정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본문 주요 내용]
노동계는 사업체노동력조사에서 5인 이상 사업체 상용직의 시간당 정액급여(또는
통상임금) 평균값을 사용하고, 정부 일각에서는 고용형태별근로실태조사에서 1인 이
상 사업체 전체 근로자의 월정액급여 평균값 또는 중위값을 선호한다.
<표1>사업체노동력조사에서 2013년 5인 이상 사업체 상용직의 시간당 정액급여는
1만 5,567원이고 통상임금은 1만 8,807원이다. 2013년 최저임금 4,860원은 정액급여
의 31.2%, 통상임금의 25.8%다. 따라서 평균임금의 50% 목표를 달성하려면 상당 기
간에 걸쳐 대폭적인 최저임금 인상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에 비해 <표2>고용형태별근로실태조사에서 2013년 1인 이상 사업체 전체 근로자
의 월정액급여 평균값은 217만원이고 중위값은 174만원이다. 2013년 월환산 최저임
금 101만 5,740원은 정액급여 평균값의 46.8%, 중위값의 58.5%다. 따라서 이미 평
균임금의 50% 목표에 근접해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는 현행 최저임금이 지나치게
낮게 책정되고 있다는 일반의 인식과도 배치된다(p.11~12).

새마을운동의 재해석이라는 시도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  '새마을운동 아카이브의 체계적 구축과 기초연구', 어느새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 결과물을 가지고 일주일동안 메트로 미술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새마을운동 사진전', 그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서 있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많은 생각이 든다.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고 있는 나로서는 긴장감으로 다가온다. 내 스스로에게, 과연 나는 재해석하고 있었나, 그리고 그 재해석이라는 것이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반문이다. 아직은 재해석보다는 재해석을 위한 자료를 모으는 단계다. 물론 자료를 모으는 과정 그 자체는 이미 재해석의 한 과정일 수 있다. 하지만 오늘 전시회를 보며 나누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기존 새마을운동에 대한 해석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는 '연구가 재해석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로 평가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자료가 재해석되기 위해서는 분석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열망이 아닌 분석 속의 자료...그렇지 않을 경우 자료는 재해석되기보다는 기존 분석에 의해 기존 해석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남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료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아마도 전시회를 다녀간 사람들의 뒷모습이 오늘 내게 남긴 말인지도 모른다.  


[관련기사]
       뉴스 썸네일[팝업] ‘근대화의 빛과 그림자’ 사진 속의 새마을운동
         중앙일보 생활/문화 2010.05.05 (수) 오전 0:28

[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새마을운동연구팀이 특별한 기획전을 마련했다. '새마을운동 사진전'이다. 8일까지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지하 1층 메트로 미술관에서 연다. 이를 주목하는 이유는 주최 측의 성향과 전시 내용...


뉴스 썸네일"박정희 체제는 엄청난 연구의 보고"
주간한국 생활/문화 2010.01.19 (화) 오후 4:03

정리하려고 한다.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에서 2008년부터 박정희 연구센터를 설립하고 '새마을운동 아카이브의 체계적 구축과 기초연구'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연구가 끝나면 책으로 펴낼 생각이다. 여건이...
  •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A. 그람시
  • 용기를 내어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그대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폴 발레리
  • 생각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스콧 니어링
  • 모르는 것보다는 사실과 다르게 알고 있는 것이 더 문제다. --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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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다시 전철을 타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의 외로움 속에 슬쩍 끼어들 수 있어서 좋다.

    오늘은 마주 앉은 아주머니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대기 시작한다.
    길이었으면 나는 그녀들을 추월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귀찮다...

    그녀들을 감싸고 있는 전철안의 적막함.
    뭔가 내게 익숙하지 않은 풍경들이다.

    사람들은 모두다 자기 손바닥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뭔가 했다. 손바닥에 놓여 있는 TV...
    보는 사람들은 재미있겠지만 그 모습들은 내게 너무 따분하다.
    두리번 거림도 없고 표정들도 없다. 뭐하자는 건지...

    어쩌면 그 속에서 사람들은 외로움을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습들이 외로워 보인다. 그리고 시끌벅적함마저도 외롭게 만든다.  

    혼자 서 있는 모습들 속에서 같은 프로그램들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무섭게도 느껴진다.
    우리는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을 거다. 더 이상 대화는 재미가 없다. 그래도 늘 재밌고 같은 생각을 하며 지낼거다. 그래서 대화는 더 필요 없어질거다. 그래도 남는 대화가 있다면 '거침없이 하이킥' 이나 '추노' 같은 방송 프로그램이다.

    재미도 없고 외롭다...

            


    벗어나고 싶지만 내가 안고 가야하는 내 삶의 조건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내가 살아온 시간 만큼 내게 어울리는
    내 삶의 언어와 경험과 웃음을 가져다 주던 滋養이라는 생각이 든다.  
    2009년 10월 29일자로 헌재의 미디어법 결정이 내려졌다. 폭력적으로 통과된 미디어법 개정 결과가 헌재 결정을 통해 반쪽의 합리화를 얻어내는 과정이라는 생각이다. 아무튼 미디어법 관련 공방의 2막이 내려졌다. 관련 자료들을 남기다.

    [관련자료]
    http://news.naver.com/main/hotissue/sectionList.nhn?mid=hot&sid1=100&cid=254880


    미디어법 개념은 엄밀한 개념은 아니고 방송법, 신문법, IPTV법, 언론중재법, 정보통신망법, 디지털 전환법, 저작권법 등 7개 법안을 통칭해 쓰는 용어다.  관련 법안의 개정은 헌재 결정과 함께 향후 미디어 시장 재편을 급격하게 진행하게 할 것이다. 크게 본다면 저작권법과 함께 문화산업 전반 재편이 나타날 수도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자본의 미디어 진출 규제가 풀리며 자본의 이윤확대를 위해 문화의 상품화 과정이 가속화되는 지점은 아닌가 싶다. 구태여 좋게 해석하면 시장이 확대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산업적 측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바람직한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여론시장의 집중화와 독점 또는 자본 옹호적인 측면이 강화될 것이다. 미디어법 개정에 대한 찬반 의견에서 가장 대립적인 입장이기도 하다.

    여론의 다양화냐 여론의 독점화냐 하는 문제. 대자본 진입은 이미 발생할 수 있는 힘의 문제가 기울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여론시장을 다양화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집중화시킬 수 있고 여론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단순한 시장 참여 다양화에 대한 논리에서는 힘에 따라 시장이 독점화되는 측면을 은폐하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국가에서 규제를 풀어준다는 것은 이러한 시장 병폐를 제어하는 국가 또는 사회적 규제가 철회된다는 의미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지 못하며 소비하던 문화재들, 그것들은 상품화 과정을 거치며 우리 일상 속에서 향유하던 것들이 하나하나 우리로부터 자립하는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 좋은 말로 자립이지 역으로 우리로부터 떠난다는, 즉 소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말하는 엣지있는 모습들로 다가오겠지만 그것은 돈을 주고 소비해야만 내 것이 되는, 더이상 공공재처럼 소비될 수 없는 타자화된 상품이 될 것이다. 세상은 화려해지겠지만 더 초라해지는 현실 속을 부정하고 그 속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해서 더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할 거다. 하지만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벌이는 죽음의 게임과 그 결과물들은 결국 스타시스템이라는 사회로 만들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문화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의 노동과정도 재구성될 것이다. 물론 노자간 힘의관계에 의해 재구성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조건에서 조직된 노동의 힘은 수동적으로조차도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심지어 어떤 조건에 놓여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조직되지 않은 노동은 또 다른 형태로 사회적으로 배제된 영역 속에서 확대되는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과 같은 조건 속에서든 조직된 노동도 마찬가지다. 이 배제 속에서 살아 남는 방법, 그것은 남조다 열심히 해서 스타로 성공하면 된다는 생각 속에 자리잡는다. 철없는 생각이라고 폄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철없는 생각들과 이러한 생각들을 먹고 사는 사기적 행각들이 만날 때 환상은 현실이 된다. 그리고 나는 매일 그러한 모습들을 신문에서 읽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연히 신경숙 작가와의 만남 <엄마를 부탁해>를 듣다.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양귀자의 <모순>이 생각났다. 왜일까?

    나와 관계맺고 있는 삶의 모순들, 어렴풋하게나마 내가 배운 것은 그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고 되는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또 다른 관점에서 남을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것. 그것은 노력할 수는 있겠지만 그 노력이 오히려 서로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이해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는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지났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것들은 내 삶의 또 다른 모습으로 다시 다가온다. 그때서야 아...그게 이거구나 하는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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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21>에서 기획연재로 '노동OTL'을 싣고 있다. 아마도 기획연재가 끝난 다음에 단행본  형태로 책을 내지 않을까 싶다. 책의 형식과 내용은 영국의 폴리 토인비가 쓴 [거세된 희망]나 미국의 바바라  에렌라이히가 쓴 [빈곤의 경제]와 같은 형식이 아닐까 싶다.

    현장 르뽀건 현장 다큐건 어떤 형식으로든 현재 상태를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쓰여질 수 없는 또는 흔적을 남길 수 없는 사람들의 상태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은 내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 비록 지금은 현재 상태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이 지난 후 지금의 자료가 남아 또 다른 분석이 이루어지고 그 속에서 또 다른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일종의 사료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사회의 보이지 않는 구조에 대한 탐색 자료랄까? 아무튼 지금의 기록은 또 다른 그림을 위한 스케치 작업이기에 내겐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또 하나, 그 기록이 누구에 의해 무엇이 남겨지고 있느냐 하는 점도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감정이나 편집의 개입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사실의 기록을 중시하는 르뽀나 다큐 형식의 기록이 중요하다. <한겨레 21>의 기획연재도 그런 의미에서 자료로 남겨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했던 것들을 왜곡하며 남기지는 않고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요즘은 현장 자료들을 남기며 드는 몇 가지 생각이 있다. 하나는 이런 르뽀 형식의 자료들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점이다. 아마도 <한겨레21>은 '노동OTL'을 통해 이 사회 속에 있는 노동실태를 고발하고 노동의 문제, 나아가 사회의 문제를 함께 고민해보자는 취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과연 얼마나 분노하고 사회에 대해 고민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 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기획연재에 실렸듯이 어떻게 해서라도 장시간 여행할 수 있는 고속버스 티켓을 구하려 노력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르뽀를 읽는 많은 수의 독자들은 우리 뒤안길에 놓여 있던 모습들을 보고 공감하기도 하고 이 사회에 대해 분노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다수는 이 현실을 보고 어떻게 해서라도 이런 현실과 만나지 말아야지 하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게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이 아닌가 싶다. 그 속에서 현실은 오히려 타자화된다. 모두가 분노하고 이 사회에 대해 고민하리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들의 착각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요즘은 미디어를 통해 이렇게 르뽀로 남겨지는 것. 그것은 어쩌면 사회 고발로 볼 수도 있지만 이를 통해 사람들을 타자화하고 현실을 재생산하는 미디어의 이중역할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좀 아이러니 하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실을 이렇게라도 남기는 작업이 무의미하고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르뽀의 다음 단계, 즉 현실이 말해주는 징후와 그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보이지 않는 이 사회의 구조들을 끄집어 내야 하는 작업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 않으면 길 가다 보기 싫은 현실을 보게 된 거고 피해야 하는, 일종의 남의 일로 남게 되는 거다. 물론 그게 르뽀나 다큐의 한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구조들을 끄집어 내고 보여준다고 르뽀나 다큐가 하는 역할과 큰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쉽게 말하면, "자본주의 사회 그런 거 누구나 다 알어~ 그래서 어쩔건데?"하는 반문과 만나는 거다. 그거에 답할 수 없으면 어줍잖게 떠들지 말고 그냥 세상을 살아야하는 거다. 누구나 한번쯤 '알어~ 하지만...'하며 날개를 꺽는 경험 속에서 살아가는 게 이 사회의 미덕이 아닌가 싶다. 마치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라는 영화가 주는 삶에 대한 답답함이랄까? (양익준 감독의 영화가 흥행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게 아닌가 싶다. 더럽고 답답한 사회지만 그걸 가슴에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이 현실의 씁쓸함 때문...)  

    아무튼, 자유롭기 위해서는 르뽀에서 보여주는 현실들, 그 속의 보이지 않는 구조들을 끄집어 내는 작업을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구조를 넘나들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하는 작업이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아니면 최소한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와 같이 이 사회 구조를 비웃어주는 수작이라도 부려야 할거다.


    빈곤의 보도, 보도의 빈곤 한겨레21 사회 | 2009.10.02 (금)

    기획연재 - 노동 OTL
    /바람처럼 왔다 이슬처럼 떠나는 섬/노동 디스토피아, 그래도 희망을 꿈꾼다
    /실낱같은 희망, 함께 이어가요/절망과 빈곤으로 ‘완조립’돼가는 삶들
    /15만원 남았다, 희망은 남지 않았다/나는 아침이 두려운 ‘9번 기계’였다
    /안산은 거대한 ‘인간시장’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06
    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4년 8월

    I.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언제부터인가 책을 사회과학 서적위주로 읽게 되었다. 사회과학 서적은 내게 이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줘서 재미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되지도 않는 짧은 지적유희 속에서 이 사회를 가슴으로 이해하기보다 그냥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말이 사회과학이지 때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미각을 잃게 한다. 내 스스로가 그런 삶의 미각을 잃고 건조하게 세상을 보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읽은 책에 의해 나는 마취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파농의 표현을 빌린다면 나는 또 다른 형태의 ‘검은 얼굴, 하얀 가면’을 쓰고 있는 거다.

    그래서 요즘은 일부러 사회과학 책이 아닌 다른 책들을 읽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때론 영화도 보고... 하지만 요즘은 물리적 시간에 대한 결핍, 그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 사로잡혀 있다. 어떤 이들은 책 읽는 것이 취미라고 얘기 하지만 내겐 그 책읽기가 일종의 직업이 되고 말았다. 취미가 직업이 될 때 고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 속에서 나는 오히려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조만간 직업을 바꿔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요즘은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소설책이나 다른 책들을 읽으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책 읽기에 대한 압박과 초조함은 항상 내게서 소설책들을 놓게 만든다.

    그 갈등... 읽던 소설책을 내려놓고 파농의 책을 들었다. 전에 읽다가 말고 남겨 놓은 페이지들에 대한 미련이랄까? 그 미련과 함께 짧게라도 읽은 책에 대한 느낌과 기억들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 그렇게 집어든 책을 보면, 밑줄을 그으며 읽었던 책인데도 그 흔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없었다. 점점 내 기억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거다. 언제부터인가  ‘내 머리 속의 지우개’가 작동하는 거를 알게 된 거다. 예전에는 이런 나의 변화를 두려워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누구에게나 살아가며 그 시간들이 찾아온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 내 기억들을, 그리고 내 생각들을 남기고 정리하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좀 슬픈 일이긴 하지만 다른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는 생각도 든다. 남들은 이런 나를 측은하게 볼지도 모를 일이다.

    II. 지배와 피지배의 재생산과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은 식민지에서 지배와 피지배자 간의 관계가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유지되고, 그 속에서 원주민들은 어떤 심리적 변화를 겪고 저항을 꾸려나가는가에 대한 글이다. 일종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지배의 재생산과 저항, 그리고 그 속에서의 사회적 병리현상에 대한 보고랄까? 글을 다 읽고 드는 생각은 파농이 살던 시대의 그 식민지의 모습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삶의 모습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 프랑스와 알제리의 식민관계를 우리 사회의 현실로 돌려보면 구태여 은유적으로 볼 일도 아니다. 일종의 우리 안의 내부 식민지라는 도식이 가능하다. 그리고 파농이 지적한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이 당시의 식민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사회에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주민이 원주민의 땅을 점유하고 지배한다는 현상의 이면, 그 식민지 이면에 대한 성찰, 그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지배문화와 사회적 관계들. 슬픈 일이지만 때로는 그 속에서 피지배자들 간에 죽고 죽이는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유지되고 재생산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며 지배의 재생산 과정은 지배문화에 물들고 이를 통해 먹고 사는 지식인들을 배출하기도 하고, 식민지 지배자(이주민)들을 몰아내고 그 지배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민족주의적 정당과 지도자, 정부, 노동조합 등을 구조적으로 배출하게 된다. 식민지로부터 해방되더라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청산되기보다 보이지 않는 식민잔재로 남아 재생산되는 것이다.  

    III. 우리 안의 내부 식민지와 ‘존재의 탈식민지’
    한 사회에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우리 사회 속에는 정규-비정규라는 우리 안의 식민지를 보게 된다. ‘노동자는 하나다’라고 얘기하지만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식민지 지배자(이주민)들을 몰아내고 그 지배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민족주의적 정당과 그 지도자들, 정부, 노동조합 등과 하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나로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파농은 그 시대를 비판하며 해방의 정치와 교육을 얘기하고 자각을 얘기했지만 그 대안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를 아무도 하지 않을 때, 그 얘기를 처음 했기에 힘을 지닌다면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식의 대단한, 하지만 너무도 먼 얘기가 싫다.

    파농이 얘기했듯이 피지배자들은 구태여 그들의 삶을 얘기하거나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삶 그 자체가 이미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금의 우리에게 이 책이 던지는 의미는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 속에서 일종의 ‘존재의 탈식민지’에 대한 고민쯤으로 정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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