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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스콧 니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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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적이/연구노트'에 해당되는 글 15건
[리뷰자료]
전형수(1993), 협동조합의 사회-경제적 이론, 한국협동조합연구 Vol.11.

[리뷰포인트 및 요약]
- 본 논문은 혐동조합이 시장경제의 육성에 적합한 수단임을 논증하는 논문으로, 협동조합의 행위권을 효과적으로 촉진할 수 있는 이론-개념적 방안 제시에 역점을 둠.
- 사회주의 국가에서 생산재의 소유권은 국가 혹은 사회 내지 공공단체에 귀속되어 개인의 사유권은 인정되지 않음. 그러나 협동조합 생산재의 분배와 이용에 관한 행위권은 협동조합 회원인 개인에 주여짐. 따라서 협동조합의 행위권은 회원공동에 의한 '사회적'인 것이지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주장.

- 협동조합에 대한 견해는 적극적 지지론, 비판적 지지론, 부정론으로 구분할 수 있음. 본 논문은 협동조합을 자유시장 경제 측면에서 지지하는 비판적 지지론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 예컨대 협동조합에 대한 부정론은,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산할 수밖에 없는 일시적 기업으로 평가함에 비해, 본 논문은 협동조합이 자유시장 경제 내에서(현실은 불완정경쟁시장임을 주지) 경쟁력을 가질 수 있고, 유효경쟁을 창출할 수 있고 시장대항력을 가질 수 있다는 입장임.
- 이와 같은 비판적 지지론 입장은 기존의 비판적 지지론과 결을 달리함. 기존의 비판적 지지론은 혐동조합과 같은 사회적 경제조직이 새로운 제3의 경제질서 형성 가능성을 지지하나, 본 논문은 협동조합의 제3의 경제질서를 형성한다는 생각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비판함. 오히려 협동조합을 통해 시장경제체제가 보완 및 발전되어 왔다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음.

- 국가는 작은 국가를 지향하나 시장실패의 경우, 전체 경제적 관계의 유지 개선을 위한 경제 구조 및 경제질서를 계획적으로 구성할 필요성이 있을 때 개입할 수 있다는 입장임.

[주요 본문 내용]
- 협동조합의 개념은 유동적이며 목적지향적 개념이기에 구성형태와 조직의 특성에 비중을 두고 있음.
- 협동조합이 촉진위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회원의 참여를 전제함. 회원은 기업으로서 협동조합을 위해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제공해야 하며, 다른 한편 이 기업이 생산한 재화 및 용역을 이용해야 함. 이와 같이 주인이면서 고객인 동질성에서부터 회원에게 요구되는 협동조합적인 참여는 촉진위임의 성과를 경정하는 핵심요소임.
- 협동조합의 3원칙(Schulze Delitzsch), 자조, 자기관리, 자기책임
- 협동조합의 절대원칙: 자조, 연대, 민주주의, 경제, 자유, 평등(무차별), 애타주의, 사회적 발전 촉진
- 협동조합은 조합원이 경영기구의 주인르로서 역할과 동시에 영업 파트너로서의 역할이 주저짐. 이를 동질성 원칙이라 함...

[관련 용어]
- 국가촉진협동조합: 정부가 이니셔티브를 쥐고 협동조합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형태
- 관제형 발전도구: 국가에 의해 촉진 통제되는 형태 협동조합.



[리뷰자료]
김유선(2014), 최저임금 결정기준, KLSI 이슈페이퍼(2014-14),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리뷰포인트]
- 임금불평등과 저임금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정책수단으로 최저임금에 대한 검토 필요.
- 현재 정부와 노동계가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는 최저임금 결정 기준은 상이함. 이 차이에 따라 정부는 현재의 최저임금이 적정하다고 주장
- 2014년 최저임금: 시간급 5,210원 / 일급: 41,680원(8시간) / 월급: 1,088,890원(209시간)
(시간급 참고: 2013년 최저임금: 4,860원 / 2012년 최저임금: 4,580원)
- 본 페이퍼는 정부의 최저임금 기준의 불합리함을 지적하고, 합리적 기준 제시.


                                     정부                                      노동계

1) 평균기준:                  중위임금                            평균값
2) 비교대상:      1인이상 사업체 전체 근로자              5인 이상 사업체 상용직 임금
3) 임금액기준:                월환산임금                       시간당 평균임금과 최저임금
4) 정액기준:                   정액급여                           통상임금(정액급여 + 고정적 특별급여)


[논문요약]
임금불평등이 심화되고 저임금계층이 양산되면서 최저임금에 대한 관심이 높아
지고 있다. 2012년 말 대통령 선거 때 박근혜 후보는 ‘경제성장률+물가상승률+소
득분배조정분’을 기준으로 최저임금을 인상하겠다고 공약했고, 문재인 후보는 ‘최
저임금을 평균임금의 50%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고 공약했다.
이들 공약을 종합하면, ① 중장기적인 최저임금 수준 목표치는 평균임금의 50%
로 하되 단계적 인상을 추진하고, ② 평균임금의 50%를 달성할 때까지는 매년
‘경제성장률+물가상승률+소득분배조정분’을 하한선으로 하여 최저임금을 인상하는
방향에서 합의 도출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처럼 최저임금 결정기준에 합의한다 해도 문제가 말끔히 해소되는 것
은 아니다. 어떤 자료를, 어떤 기준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최저임금 수준에 대한
평가와 대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노동부의 사업체노동력조사 결과 중 ‘5인 이상
사업체 상용직의 시간당 정액급여(또는 통상임금) 평균값의 50%’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명박 정부 때 ‘경제성장률+물가상승률’은 연평균 6.5%인데, 5인 이상 사업체
상용직 노동자들의 임금인상률은 3.2%로 매년 3.3%p 덜 올랐고, 조정 노동소득분
배율은 2008년 90.1%에서 2013년 84.6%로 5.5%p 떨어졌다. 이명박 정부 때 악
화된 분배구조만 개선하려 해도 앞으로 5년 동안 노동자들의 임금인상률은 매년
‘경제성장률+물가상승률+3.3%’ 이상이 되어야 한다.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적용되
는 최저임금 인상률이 이보다 높게 책정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본문 주요 내용]
노동계는 사업체노동력조사에서 5인 이상 사업체 상용직의 시간당 정액급여(또는
통상임금) 평균값을 사용하고, 정부 일각에서는 고용형태별근로실태조사에서 1인 이
상 사업체 전체 근로자의 월정액급여 평균값 또는 중위값을 선호한다.
<표1>사업체노동력조사에서 2013년 5인 이상 사업체 상용직의 시간당 정액급여는
1만 5,567원이고 통상임금은 1만 8,807원이다. 2013년 최저임금 4,860원은 정액급여
의 31.2%, 통상임금의 25.8%다. 따라서 평균임금의 50% 목표를 달성하려면 상당 기
간에 걸쳐 대폭적인 최저임금 인상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에 비해 <표2>고용형태별근로실태조사에서 2013년 1인 이상 사업체 전체 근로자
의 월정액급여 평균값은 217만원이고 중위값은 174만원이다. 2013년 월환산 최저임
금 101만 5,740원은 정액급여 평균값의 46.8%, 중위값의 58.5%다. 따라서 이미 평
균임금의 50% 목표에 근접해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는 현행 최저임금이 지나치게
낮게 책정되고 있다는 일반의 인식과도 배치된다(p.11~12).

새마을운동의 재해석이라는 시도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  '새마을운동 아카이브의 체계적 구축과 기초연구', 어느새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 결과물을 가지고 일주일동안 메트로 미술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새마을운동 사진전', 그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서 있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많은 생각이 든다.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고 있는 나로서는 긴장감으로 다가온다. 내 스스로에게, 과연 나는 재해석하고 있었나, 그리고 그 재해석이라는 것이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반문이다. 아직은 재해석보다는 재해석을 위한 자료를 모으는 단계다. 물론 자료를 모으는 과정 그 자체는 이미 재해석의 한 과정일 수 있다. 하지만 오늘 전시회를 보며 나누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기존 새마을운동에 대한 해석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는 '연구가 재해석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로 평가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자료가 재해석되기 위해서는 분석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열망이 아닌 분석 속의 자료...그렇지 않을 경우 자료는 재해석되기보다는 기존 분석에 의해 기존 해석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남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료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아마도 전시회를 다녀간 사람들의 뒷모습이 오늘 내게 남긴 말인지도 모른다.  


[관련기사]
       뉴스 썸네일[팝업] ‘근대화의 빛과 그림자’ 사진 속의 새마을운동
         중앙일보 생활/문화 2010.05.05 (수) 오전 0:28

[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새마을운동연구팀이 특별한 기획전을 마련했다. '새마을운동 사진전'이다. 8일까지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지하 1층 메트로 미술관에서 연다. 이를 주목하는 이유는 주최 측의 성향과 전시 내용...


뉴스 썸네일"박정희 체제는 엄청난 연구의 보고"
주간한국 생활/문화 2010.01.19 (화) 오후 4:03

정리하려고 한다.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에서 2008년부터 박정희 연구센터를 설립하고 '새마을운동 아카이브의 체계적 구축과 기초연구'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연구가 끝나면 책으로 펴낼 생각이다. 여건이...
2009년 10월 29일자로 헌재의 미디어법 결정이 내려졌다. 폭력적으로 통과된 미디어법 개정 결과가 헌재 결정을 통해 반쪽의 합리화를 얻어내는 과정이라는 생각이다. 아무튼 미디어법 관련 공방의 2막이 내려졌다. 관련 자료들을 남기다.

[관련자료]
http://news.naver.com/main/hotissue/sectionList.nhn?mid=hot&sid1=100&cid=254880


미디어법 개념은 엄밀한 개념은 아니고 방송법, 신문법, IPTV법, 언론중재법, 정보통신망법, 디지털 전환법, 저작권법 등 7개 법안을 통칭해 쓰는 용어다.  관련 법안의 개정은 헌재 결정과 함께 향후 미디어 시장 재편을 급격하게 진행하게 할 것이다. 크게 본다면 저작권법과 함께 문화산업 전반 재편이 나타날 수도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자본의 미디어 진출 규제가 풀리며 자본의 이윤확대를 위해 문화의 상품화 과정이 가속화되는 지점은 아닌가 싶다. 구태여 좋게 해석하면 시장이 확대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산업적 측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바람직한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여론시장의 집중화와 독점 또는 자본 옹호적인 측면이 강화될 것이다. 미디어법 개정에 대한 찬반 의견에서 가장 대립적인 입장이기도 하다.

여론의 다양화냐 여론의 독점화냐 하는 문제. 대자본 진입은 이미 발생할 수 있는 힘의 문제가 기울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여론시장을 다양화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집중화시킬 수 있고 여론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단순한 시장 참여 다양화에 대한 논리에서는 힘에 따라 시장이 독점화되는 측면을 은폐하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국가에서 규제를 풀어준다는 것은 이러한 시장 병폐를 제어하는 국가 또는 사회적 규제가 철회된다는 의미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지 못하며 소비하던 문화재들, 그것들은 상품화 과정을 거치며 우리 일상 속에서 향유하던 것들이 하나하나 우리로부터 자립하는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 좋은 말로 자립이지 역으로 우리로부터 떠난다는, 즉 소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말하는 엣지있는 모습들로 다가오겠지만 그것은 돈을 주고 소비해야만 내 것이 되는, 더이상 공공재처럼 소비될 수 없는 타자화된 상품이 될 것이다. 세상은 화려해지겠지만 더 초라해지는 현실 속을 부정하고 그 속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해서 더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할 거다. 하지만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벌이는 죽음의 게임과 그 결과물들은 결국 스타시스템이라는 사회로 만들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문화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의 노동과정도 재구성될 것이다. 물론 노자간 힘의관계에 의해 재구성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조건에서 조직된 노동의 힘은 수동적으로조차도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심지어 어떤 조건에 놓여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조직되지 않은 노동은 또 다른 형태로 사회적으로 배제된 영역 속에서 확대되는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과 같은 조건 속에서든 조직된 노동도 마찬가지다. 이 배제 속에서 살아 남는 방법, 그것은 남조다 열심히 해서 스타로 성공하면 된다는 생각 속에 자리잡는다. 철없는 생각이라고 폄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철없는 생각들과 이러한 생각들을 먹고 사는 사기적 행각들이 만날 때 환상은 현실이 된다. 그리고 나는 매일 그러한 모습들을 신문에서 읽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한겨레21>에서 기획연재로 '노동OTL'을 싣고 있다. 아마도 기획연재가 끝난 다음에 단행본  형태로 책을 내지 않을까 싶다. 책의 형식과 내용은 영국의 폴리 토인비가 쓴 [거세된 희망]나 미국의 바바라  에렌라이히가 쓴 [빈곤의 경제]와 같은 형식이 아닐까 싶다.

현장 르뽀건 현장 다큐건 어떤 형식으로든 현재 상태를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쓰여질 수 없는 또는 흔적을 남길 수 없는 사람들의 상태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은 내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 비록 지금은 현재 상태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이 지난 후 지금의 자료가 남아 또 다른 분석이 이루어지고 그 속에서 또 다른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일종의 사료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사회의 보이지 않는 구조에 대한 탐색 자료랄까? 아무튼 지금의 기록은 또 다른 그림을 위한 스케치 작업이기에 내겐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또 하나, 그 기록이 누구에 의해 무엇이 남겨지고 있느냐 하는 점도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감정이나 편집의 개입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사실의 기록을 중시하는 르뽀나 다큐 형식의 기록이 중요하다. <한겨레 21>의 기획연재도 그런 의미에서 자료로 남겨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했던 것들을 왜곡하며 남기지는 않고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요즘은 현장 자료들을 남기며 드는 몇 가지 생각이 있다. 하나는 이런 르뽀 형식의 자료들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점이다. 아마도 <한겨레21>은 '노동OTL'을 통해 이 사회 속에 있는 노동실태를 고발하고 노동의 문제, 나아가 사회의 문제를 함께 고민해보자는 취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과연 얼마나 분노하고 사회에 대해 고민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 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기획연재에 실렸듯이 어떻게 해서라도 장시간 여행할 수 있는 고속버스 티켓을 구하려 노력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르뽀를 읽는 많은 수의 독자들은 우리 뒤안길에 놓여 있던 모습들을 보고 공감하기도 하고 이 사회에 대해 분노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다수는 이 현실을 보고 어떻게 해서라도 이런 현실과 만나지 말아야지 하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게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이 아닌가 싶다. 그 속에서 현실은 오히려 타자화된다. 모두가 분노하고 이 사회에 대해 고민하리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들의 착각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요즘은 미디어를 통해 이렇게 르뽀로 남겨지는 것. 그것은 어쩌면 사회 고발로 볼 수도 있지만 이를 통해 사람들을 타자화하고 현실을 재생산하는 미디어의 이중역할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좀 아이러니 하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실을 이렇게라도 남기는 작업이 무의미하고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르뽀의 다음 단계, 즉 현실이 말해주는 징후와 그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보이지 않는 이 사회의 구조들을 끄집어 내야 하는 작업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 않으면 길 가다 보기 싫은 현실을 보게 된 거고 피해야 하는, 일종의 남의 일로 남게 되는 거다. 물론 그게 르뽀나 다큐의 한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구조들을 끄집어 내고 보여준다고 르뽀나 다큐가 하는 역할과 큰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쉽게 말하면, "자본주의 사회 그런 거 누구나 다 알어~ 그래서 어쩔건데?"하는 반문과 만나는 거다. 그거에 답할 수 없으면 어줍잖게 떠들지 말고 그냥 세상을 살아야하는 거다. 누구나 한번쯤 '알어~ 하지만...'하며 날개를 꺽는 경험 속에서 살아가는 게 이 사회의 미덕이 아닌가 싶다. 마치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라는 영화가 주는 삶에 대한 답답함이랄까? (양익준 감독의 영화가 흥행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게 아닌가 싶다. 더럽고 답답한 사회지만 그걸 가슴에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이 현실의 씁쓸함 때문...)  

아무튼, 자유롭기 위해서는 르뽀에서 보여주는 현실들, 그 속의 보이지 않는 구조들을 끄집어 내는 작업을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구조를 넘나들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하는 작업이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아니면 최소한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와 같이 이 사회 구조를 비웃어주는 수작이라도 부려야 할거다.


빈곤의 보도, 보도의 빈곤 한겨레21 사회 | 2009.10.02 (금)

기획연재 - 노동 OTL
/바람처럼 왔다 이슬처럼 떠나는 섬/노동 디스토피아, 그래도 희망을 꿈꾼다
/실낱같은 희망, 함께 이어가요/절망과 빈곤으로 ‘완조립’돼가는 삶들
/15만원 남았다, 희망은 남지 않았다/나는 아침이 두려운 ‘9번 기계’였다
/안산은 거대한 ‘인간시장’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06
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4년 8월

I.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언제부터인가 책을 사회과학 서적위주로 읽게 되었다. 사회과학 서적은 내게 이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줘서 재미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되지도 않는 짧은 지적유희 속에서 이 사회를 가슴으로 이해하기보다 그냥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말이 사회과학이지 때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미각을 잃게 한다. 내 스스로가 그런 삶의 미각을 잃고 건조하게 세상을 보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읽은 책에 의해 나는 마취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파농의 표현을 빌린다면 나는 또 다른 형태의 ‘검은 얼굴, 하얀 가면’을 쓰고 있는 거다.

그래서 요즘은 일부러 사회과학 책이 아닌 다른 책들을 읽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때론 영화도 보고... 하지만 요즘은 물리적 시간에 대한 결핍, 그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 사로잡혀 있다. 어떤 이들은 책 읽는 것이 취미라고 얘기 하지만 내겐 그 책읽기가 일종의 직업이 되고 말았다. 취미가 직업이 될 때 고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 속에서 나는 오히려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조만간 직업을 바꿔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요즘은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소설책이나 다른 책들을 읽으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책 읽기에 대한 압박과 초조함은 항상 내게서 소설책들을 놓게 만든다.

그 갈등... 읽던 소설책을 내려놓고 파농의 책을 들었다. 전에 읽다가 말고 남겨 놓은 페이지들에 대한 미련이랄까? 그 미련과 함께 짧게라도 읽은 책에 대한 느낌과 기억들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 그렇게 집어든 책을 보면, 밑줄을 그으며 읽었던 책인데도 그 흔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없었다. 점점 내 기억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거다. 언제부터인가  ‘내 머리 속의 지우개’가 작동하는 거를 알게 된 거다. 예전에는 이런 나의 변화를 두려워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누구에게나 살아가며 그 시간들이 찾아온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 내 기억들을, 그리고 내 생각들을 남기고 정리하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좀 슬픈 일이긴 하지만 다른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는 생각도 든다. 남들은 이런 나를 측은하게 볼지도 모를 일이다.

II. 지배와 피지배의 재생산과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은 식민지에서 지배와 피지배자 간의 관계가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유지되고, 그 속에서 원주민들은 어떤 심리적 변화를 겪고 저항을 꾸려나가는가에 대한 글이다. 일종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지배의 재생산과 저항, 그리고 그 속에서의 사회적 병리현상에 대한 보고랄까? 글을 다 읽고 드는 생각은 파농이 살던 시대의 그 식민지의 모습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삶의 모습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 프랑스와 알제리의 식민관계를 우리 사회의 현실로 돌려보면 구태여 은유적으로 볼 일도 아니다. 일종의 우리 안의 내부 식민지라는 도식이 가능하다. 그리고 파농이 지적한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이 당시의 식민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사회에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주민이 원주민의 땅을 점유하고 지배한다는 현상의 이면, 그 식민지 이면에 대한 성찰, 그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지배문화와 사회적 관계들. 슬픈 일이지만 때로는 그 속에서 피지배자들 간에 죽고 죽이는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유지되고 재생산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며 지배의 재생산 과정은 지배문화에 물들고 이를 통해 먹고 사는 지식인들을 배출하기도 하고, 식민지 지배자(이주민)들을 몰아내고 그 지배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민족주의적 정당과 지도자, 정부, 노동조합 등을 구조적으로 배출하게 된다. 식민지로부터 해방되더라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청산되기보다 보이지 않는 식민잔재로 남아 재생산되는 것이다.  

III. 우리 안의 내부 식민지와 ‘존재의 탈식민지’
한 사회에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우리 사회 속에는 정규-비정규라는 우리 안의 식민지를 보게 된다. ‘노동자는 하나다’라고 얘기하지만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식민지 지배자(이주민)들을 몰아내고 그 지배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민족주의적 정당과 그 지도자들, 정부, 노동조합 등과 하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나로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파농은 그 시대를 비판하며 해방의 정치와 교육을 얘기하고 자각을 얘기했지만 그 대안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를 아무도 하지 않을 때, 그 얘기를 처음 했기에 힘을 지닌다면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식의 대단한, 하지만 너무도 먼 얘기가 싫다.

파농이 얘기했듯이 피지배자들은 구태여 그들의 삶을 얘기하거나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삶 그 자체가 이미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금의 우리에게 이 책이 던지는 의미는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 속에서 일종의 ‘존재의 탈식민지’에 대한 고민쯤으로 정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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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사회의 지배양식 - 마르크스의 상품 비판


1. 낯섦
마르크스의 [자본론] 제1권, 제1장, 제1절, '상품의 두 요소: 사용가치와 가치' 분석 첫 페이지의 글을 보고 당혹스러웠다.

상품은 우선 우리의 외부에 있는 하나의 대상이며, 그 속성들에 의해 인간의 온갖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물건이다. 이 욕망의 성질이 어떠한가, 예컨대 욕망이 위로부터 나오는가 또는 환상으로부터 생기는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물건이 인간의 욕망을 어떻게 만족시키는가, 즉 생활수단(소비재)으로서 직접성을 만족시키는가 아니면 생산수단으로서 간접적으로 만족시키는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마르크스, 자본론: 43).

왜 마르크스는 욕망의 문제부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에 대해 소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왜 제대로 된 문제제기를 하고 있지 않는지 모르겠다. 이미 이 부분은 정리가 되었는데 내가 무지해서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도 그동안 이 부분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던 것 같다. 그런 게 너무 낯설기만 하다. 아니면 내 무지 속에서 자본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음 문장을 읽는 순간, 단순한 나의 무지가 아닌 마르크스의 오류에 대한 나의 무관심이었다는 생각이 밀려든다.

한 물건의 유용성은 그 물건으로 하여금 사용가치(use-value)가 되게 한다. 그러나 이 유용성은 공중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상품의 물리적 속성에 의해 주어지고 있으며 상품체(physical body of the commidity)와 별도로 존재할 수 없다(p.45)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물리적 속성에 의해 주어진 상품의 사용가치에 대한 분석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상품분석과 자본론 전반은 물리적 상품을 전제로 한 자본분석이다. 즉, 자본의 한 측면만을 분석한 것으로 욕망의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무형의 상품 분석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을 보완한 생각들이 그나마 브르디외의 '상징자본'과 '문화자본', 장 보드리야르의 '기호'와 '소비사회'에 대한 분석이 아닌가 싶다. 장 보드리야르의 글은 접해보지 않았지만, 그의 책에 나오는 목차들을 보면 동일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의 글을 만나봐야겠다.  

그리고 욕망의 본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 프로이드나 라깡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러한 욕망은 물리적 속성을 가진 상품과 연결된다. 지금까지는 이에 대한 분석도 미흡하다. 이런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문화 쪽으로 이론적 분석과 운동의 축이 이동되고 있다. 하지만 물질적 상품 팽창과 연결지키지 않을 경우, 심하게 말하면 현실에 발딪지 않고 허공에서 욕망놀이하며 놀고 있는 꼴이 될 수 있다.

결국 자본은 욕망을 동력으로 하여 상징을 유무형의 상품으로 전환시키는 사회적 관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앞으로 관련 생각들을 구체적으로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예) 방송프로그램, CF 등을 통해 웰빙이라는 개념을 상품 이미지로 만드는 사람들, 그리고 웰빙상품(식품, 주거 등...) 그 자체를 만드는 사람들은 다르다. 그리고 소비자도 서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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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안)>

2. 욕망의 본질과 화폐로의 전환
1) 욕망의 본질
- 자기재생산과 종의 재생산에 대한 욕망

2) 욕망의 타자성(관계성)
- 큰타자를 향한 욕망과 타자성

3) 욕망의 화폐적 전환
- 큰타자의 화폐적 전환
- 경제적 가치는 주관적 가치가 객관화된 것이다(짐멜, 돈이철학).

4) 욕망의 상징화와 차별성
- 욕망의 상징화와 화폐를 통한 교환
- 차별을 통한 욕망의 차별화와 가치화


3. 욕망의 부재와 마르크스주의 전망의 한계
1) 욕망이 부재하는 마르크스주의

2) 욕망의 부재로 인해 욕망을 호출할 수 없는 무능력

3) 욕망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와 전망 부재 속의 마르크스주의
- 화폐를 통한 상징과 욕망의 충족


4. 물질적 생산이 없는 도시의 지배양식
1) 욕망의 문화상품화
- 문화 소비사회

2) 물질적 상품 생산의 시공간적 차별과 착취
- 물질적 생산이 부재한 도시의 생산방식과 지배양식
- 물질적 상품과 문화상품의 시공간적 분리와 착취

3) 문화운동의 허구성
- 물질적 상품 생산관계와 문화상품의 관계를 도외시하는 허구성


5. 가치의 정치적 결정
1) 노동시간 미분화의 오류
- 추상적 노동에 대한 명목적 시간 미분화 계산의 오류

2) 배제를 통한 지배이데올로기
-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와 정치

3) 정치적 가치 결정과 소수자의 배제
- 사회적 맥락에 따른 (교환)가치의 차이
- 가치의 정치적 결정 예: 비정규직



<읽을 자료>장 보드리야르(1994), 생산의 거울, 백의.

001. <노동의개념>
002. 노동력의 사용가치에 대한 비판
003. 노동의구체성 : 질적인 것과 양적인 것의 변증법
004. 인간의 일반적인 이중양상
005. 노동의 윤리학 - 놀이의 미학
006. 맑스와 가치의 상형문자
007. 인식론 - 맑스주의의 개념들 곁에서 정치경제학 비판은 끝났다
008. <맑스주의의 인류학과 자연의 지배>
009. 계몽주의의 도덕철학
010. 리쿠르구스롸 거세
011. 유태, 그리스도 절충교적 반자연
012. 인식론 2- 맑수주의적 비판의 구조적 한계
013. <역사적 유물론과 원시사회>
014. 구조적 인과성과 원시인
015. 잉여와 반생산
016. 주술과 노동
017. 인식론 - 유몰론과 자기 민족 중심주의
018. <고대, 봉건양식에 대하여>
019. 노예
020. 장색
021. 인식론 - 맑스주의와 몰 이해
022. <맑스주의와 정치경제학 체계>
023. 역사의 유클리트 기하학?
024. 정치경제학의 세번째 단계
025. 모순과 전복 : 정치의 이동
026. 정치적 혁명과 '문화적' 혁명
027. 이데올로기와 모나모델로서의 경제
028. 맑스주의 이론과 노동운동 : 역사의 일시정지
029. 유토피아의 급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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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를 거부하는 한 우리는 모두 살게된다. 하지만 삶이 우리를 초대하면서 보여주었던 그러한 본질적인 경건함으로 삶에 다가서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삶에 완전히 바치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을 미루고 있다 ------ 인생은 인간이 놓치고 있는 기회이다


-칼 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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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바라보는 시각. 도시 자체는 하나의 사회적 관계이며 그 자체가 스펙터클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즉 도시는 스펙터클적 인간을 재생산하는 수단이기도하다. 이것은 도시가 항상 자본에 의해 건설되고 재구성된다는 측면과 연결시켜보면, 스펙터클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의 또 다른 용어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파편화되고 개별화된 이미지로 살아가는 일상생활. 개별화된 노동으로 나누어지는 비정규직화도 도시적 특성의 하나일 수 있다.

그렇다고 벗어나거나 파괴할 수 없다. 그것은 또 다른 도피이고 러다이트일 뿐이다. 그래서 상황주의자들은 그것을 어떻게 재영토화할 것인가? 즉 전용할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연결되고, '사물의 재영토화'로 개념화 된다... -송용한 단상-]


4.
스펙타클은 이미지들의 집합이 아니라,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이다.

5.
스펙타클은 시각 세계의 남용이나, 이미지들의 대량유포 기술의 산물이라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적인 것이 되고 물질적으로 번역된 세계관이다. 그것은 대상화된 세계관이다.

6.
스펙타클이란, 총체적으로 파악하자면, 현존하는 생산양식의 결과이자 또한 그 기획이다. 그것은 현실세계의 부록, 덧붙여진 장식물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사회의 비현실성의 심장이다. 스펙타클은 어떤 특정한 형태를 취하든지간에, 즉 그것이 정보든 선전이든 혹은 광고든 직접적인 오락이든 소비든지를 불문하고,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삶의 현존하는 모델이다. 스펙타클은 생산과 그 당연한 결과인 소비에서 이미 이루어진 선택에 대한, 편재하는 긍정이다. 스펙타클의 형식과 내용은 모두 기존 체제의 조건과 목표를 총체적으로 정당화한다. 스펙타클은 또한 이러한 정당화의 영원한 현존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현대적 생산의 외부에서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을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7.
분리는 그 자체가 세계의 통일성의 일부이자, 현실과 이미지로 분열되어 있는 전지구적인 사회적 실천의 일부이다. 자율적인 스펙타클이 대면하는 그 사회적 실천은 또한 스펙타클을 포함하고 있는 현실적 총체성이다. 그러나 이 총체성 내부의 분열은 스펙타클이 그것의 목표로 나타날 지경까지 사회적 실천을 불구화시킨다. 스펙타클의 언어는 지배적인 생산조직의 기호들로 구성되는데, 이 기호들은 동시에 이 생산조직의 최종목표이기도 하다.

8.
우리는 스펙타클을 실제의 사회활동과 추상적으로 대비시킬 수 없다. 그러한 분리 자체가 분리되어진 것이다. 현실을 전도시키는 스펙타클은 사실 생산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은 스펙타클의 관조에 의해 물질적으로 침범당하는 동시에 스펙타클의 질서를 흡수하여 이 질서에 긍정적인 응집성을 부여한다. 객관적 현실은 양 측면 모두에 현전해 있다. 이런 식으로 고정된 모든 관념은 바로 대립물로의 전화를 근거로 갖는다. 다시 말해, 현실은 스펙타클 내부에서 솟아나고, 그리하여 스펙타클은 현실적이 된다. 이러한 상호소외가 현존하는 사회의 본질이자 지주이다(pp.11-13)



* 기 드보르(1996), 스펙타클의 사회, 이경숙 옮김, 한영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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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계급이 지금 취하고 있는 사회적 형태 속에서 복합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의도와는 무관하게 작용하여 결국 노동자들이 그런 변혁에 나서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바로 노동자 계급의 문화, 특히 노동자 자녀들이 반학교 문화가 담고 있는 이러한 합리성과 미래의 요소들이다. 노동자들이 내면화하는 외관상의 문화적 가치절상(cultural ascension)이아먈로 자신들이 지금 처해 있는 궁핍한 현실을 야기한다는 것이다(폴 윌리스, 2004: 262).

* Paul Willis, 1977, Learnining to Labor, Aldesshot: Grover, 김찬호.김영훈 역, '학교와 계급 재생산', 이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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