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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스콧 니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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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회/문화산업'에 해당되는 글 7건
방송사 공개오디션 프로그램 러시 이유로 든 기사내용이 오히려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을 띄우기 위한 일종의 스포일러성 기사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기사는 대부분 이런 식이기도 하지만....아무튼 짧게나마 관련 단상을 남기다.

[관련기사]


공개오디션 프로그램이 뜨는 이유는 문화상품 생산과 문화노동의 특수성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문화상품은 문화상품을 생산하는 문화노동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비물질적이고 비정형적이다. 그리고 문화상품의 소비는 경험재 성격을 갖고,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측면이 있다. 이러한 특수성 속에서 문화상품을 생산하는 문화노동의 비결정성은 일반적인 상품생산의 노동과정에서 노동의 비결정성보다 높다.

자본주의적 상품생산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상품생산의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가 개입되게 된다. 그러나 문화상품을 생산하는 문화노동의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는 문화상품 특성과 문화노동의 비결정성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일반적인 상품생산 과정의 노동통제와 같은 방식의 적용에 제한이 따른다.

기본적으로 상품생산의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를 위해서는 생산수단에 기반해 이루어지지만 문화상품 생산에 대한 문화노동에 대한 통제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때로는 노래와 같이 특별한 생산수단 없이 문화상품 생산이 가능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문화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자 그 자체는 문화상품이 된다.  

따라서 문화상품 생산에 대한 통제는 생산수단에 기반한 통제가 불가능할 때는 유통에 대한 장악을 통해 문화상품 생산의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를 실현하게 된다. 아니면 노예계약과 같이 기획사가 문화노동자라는 사람 자체를 전적으로 통제하는 구조다.

방송사 공개오디션 프로그램의 등장은 방송사가 문화상품의 한 유형인 방송물의 송출장비, 즉 유통수단에 대한 독과점적 소유에 기반해 유통망을 장악하고 이를 이용해 문화노동을 통제하는 과정으로 전환되고 있는 전환의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기술발전과 제도변화 등에 대응해 이것저것 통제유형을 변화시키며 문화노동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다 유통에 대한 통제를 통해 역으로 문화노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또 다른 경계의 지점이 있다는 생각이다. 오디션 프로그램 과정에 시청자를 참여하게 하고., 시청자에 의해 오디션 참가자들을 선출하게 하는 거치게 함으로써, 시청자라는 기존의 문화상품 소비자를 문화상품 생산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문화상품 생산이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측면보다 시청자들의 개인적 취향, 이들의 선택에 의한 오디션 참여자들의 탈락과정 속에서 문화상품이 완성된다는 점이다.

이런 과정은 문화상품 생산에 참여하는 문화노동을 사회적 노동으로 인식하기 보다 서바이벌 게임으로 인식한다는 거다. 즉, 문화상품은 사회적으로 이루어진 공동의 노동의 결과라는 인식보다 서로 경쟁을 통해 살아남는 과정을 사회적으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푸코식으로 보면 사회적으로 개인들은 권력을 행사하는 한편 종속되는 것이다. 그것도 경쟁의 논리 속에서...

이러한 개별적 선택 과정에 대한 참여는 승자독식 사회 논리를 무의식적으로 확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문화상품을 생산하는 문화노동자는 개별화되고, 나아가 문화노동자뿐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은 개별화되고 고립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오디오 프로그램과 같은 문화상상품 또는 엔터테인먼트 상품을 통해 지금은 즐기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 과정에서 고립과 만인에 대한 투쟁 사회를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열망이라는 이름으로... 최근 증가하고 있는 문화노동자의 죽음은 이러한 사회적 현상, 특히 사람들과의 관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방송사들,불공정 거래 심하다…독립제작사 프로 시청률 미달땐 제작비 감액 등 국민일보 연예 2006.03.06 (월) 오후 10:42
'방송사로부터 프로그램 시청률 목표를 요구받고,이에 미치지 못하면 제작비가 감액되거나 PD 혹은 작가 교체를 요구받는다' '방송사가 독립제작사의 프로그램 아이디어나 기획안을 도용한다'. 독립제작사들이 방송사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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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요즘 뜨는 노래

며칠전 이효리와 비가 새 앨범을 발표했다. 이효리는 '치티치티 뱅뱅'으로, 비는 '널 붙잡을 노래'로 요란법석을 떨며 컴백했다. 방송가에서는 1위를 달리고 있다는데 얼마나 갈지 모르겠다. 어차피 기획상품이라 또 다른 기획상품이 나오면 곧 사라질거다. 새로운 상품을 팔기 위해 또 다른 유행을 만들고 기존 상품을 죽이는 게 이 동네 생리다. 이 판에서 비와 이효리는 퍼포먼스로 승부를 하고 있어 노래가 얼마나 오랫동안 남을지는 모르겠다.

[관련기사]
- -효리, 화려한 퍼포먼스 ‘양날의 검’ 되나 서울신문 연예 2010.04.16

이에 반해 16일 발표한 윤도현의 '김제동송-오쿄쿄쿄'는 제대로 뜰 것 같은 노래다. 비나 이효리 처럼 발표전부터 대대적인 광고를 하고, 음원유출이니 뭐니 하는 가십거리의 광고성 기사를 만들고, 섹시한 몸매를 과시하며 화려한 퍼포먼스를 하지 않아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뜰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친구들끼리 노래방 가면 한 번 쯤은 꼭 부르게 되는 단골 곡이 되지 않을까 싶다. 김제동 이름대신 내 친구들의 이름을 넣어서...그렇게 조용히 떠서 오래 남을 것 같다. 왜일까? 세 곡의 제작과정과 가사 내용을 들어보면 같은 음악상품이지만 결이 다름을 느끼게 된다.

[관련노래]
- 김제동송~오쿄쿄쿄~~
- 비(Rain) - 널 붙잡을 노래(Love Song) ...
- [HQ] Full MV Lee Hyori - Chitty Chitty Bang ...


II. 같지만 다름

특히 '김제동송-오쿄쿄쿄'송은 다른 곡들과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는 생각이다. 거칠게나마 단상으로 남겨본다. 시간이 지난 후 지금의 글을 읽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이 노래가 몇 년 후에도 사랑받고 있는 노래가 되어있을지 그 결과를 확인해보는 재미...

첫째, 김제동송은 노래를 기획하는 과정 자체가 상품 기획과정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건 윤도현이 김제동에게 우정의 선물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나온 곡이다(이 과정 자체를 상품기획 과정으로 볼 수 있지만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즉, 팔기위한 상품이 아니라 주기위한 선물의 가치를 위해 만든 곡이다. 그리고 그 노래에 대한 현장 반응이 좋아 앨범, 즉 음악상품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팔기위해 만들어진 상품과는 다른 가치와 용도를 가지고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즉, 이 노래의 쓰임새가 비나 이효리의 노래와는 다르다.

둘째, 가사 내용이 재미있다. 그냥 단순히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나름 삶의 애환(?)이있다. 예컨대 정권이 바뀌면서 방송계에서 퇴출당한 김제동, 그래도 밝고 따뜻한 모습으로 열심히 사는 모습의 김제동을 친구들이 서로 토닥여주는 내용이다. 하지만 윤도현도 남 걱정할 형편은 아니다. 현실의 힘들고 고단한 삶을 보여주고, 서로 힘이 되어주는 가사 정도로 생각하면 될 거다.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레이먼드 윌리암스(Raymond Willams)가 말한 일종의 '시대적 감정구조'를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는 힘이 있다. 헤어진 사랑의 슬픔을 쥐어짜내 상품으로 만든 가사와는 다른 진가를 발휘하는 거다.

셋째, 곡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한 노동이 무상 노동이다. 일종의 네트워크 속에서의 품앗이 노동이라는 표현이 좋을 것 같다. 윤도현이 작사/작곡하고 MC몽이 편곡해서 김제동 토크쇼에 선물한 것이다. 비물질적이고 무상의 노동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게 무상은 아니다. 서로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유명세를 빌려주고 이 속에서 윤도현, MC몽, 김제동이라는 자기 이름, 즉 자기 유명세를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서로 무상노동을 주고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 문화노동자는 자기 상품성을 높이는 것이다. 이 동네의 돈 버는 방식은 이런 관계를 유지하고 그 속의 자원을 공유하는 것이 돈 버는 방식이다. 그리고 노래가 뜨면 윤도현, MC몽, 김제동은 같이 돈 버는 거다.  

넷째, 수익의 분배구조가 기존 상품과 다르다. 곡을 만든 의도가 상품이 아닌 선물을 위한 것이고, 무상노동의 협업구조 속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니 곡의 주인을 누구라고 하기 힘들다. 비록 윤도현이 만들었지만 김제동에게 선물로 줬는데...그 곡을 윤도현이 앨범으로 만들어 수익을 챙긴다는 게 보기에 좋은 구조는 아니다. 뭐 윤도현이 마음먹고 챙긴다면 챙길 수 있는 구조긴 하다. 하지만 윤도현은 앨범을 발표하고, 그 수익금을 김제동의 꿈인 대안학교의 설립을 위해 김재동에게 기부하기로 했다. 일종의 수익을 공유하고, 대안학교를 통해 그 수익을 사회적으로 분배하게 되는 구조다.
 
다섯째, 상품형태와 상품 유통과정이 기존 앨범형태의 음악상품과 다르다. 사실 기획된 음악 상품은 상품을 만들기 위해 막대한 돈이 투입된다. 기획에서부터 음악상품을 만드는 과정에 투입되는 노동, 그리고 광고에 드는 비용은 한두 푼이 아니다. 하지만 기획된 음악 상품의 성공여부는 뚜껑을 따기 전에는 아무도 확신하지 못한다. 실패하면 거기에 투자된 돈을 회수할 길이 없다. 까닥하면 망하는 거다. 그래서 보통은 음악 앨범에 여러 곡을 수록해 판다. 여러 곡 중 하나라도 성공하면 다른 곡에 들어간 비용도 가 보상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투자된 비용을 뽑기 위해 조금이라도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절대 한 곡만 팔지는 않는다(물론 최근에는 디지털화되면서 이러한 번들형으로 앨범을 제작하더라도 판매는 한 곡씩 이루어지는 형태다. 그래도 앨범은 번들형으로, 즉 한번 곡을 반표할 한 곡만 발표하지 않고 여러곡을 발표한다. 이번에 컴백한 이효리나 비도 이런 식으로 앨범을 발표했다).

하지만 김제동송은 디지털 싱글(Digital Single)앨범으로 발표되었다. 특이한 유형의 음악상품형태다. 이는 김제동송이 선물을 할 목적으로 작사.작곡되었고, 만들어지는 과정에 돈도 별로 들지 않았기 때문이 가능한 것이다. 기존 CD형태의 앨범이라면 앨범제작에 따르는 제반 관련 비용이 들겠지만 디지털로 만들면 녹음비만 있으면 된다. 쉽게 생각하면 특별히 투자된 것도 없고 매몰된 비용도 없고, 꼭 돈을 벌려고 만든 것도 아니다. 이게 바로 '디지털 싱글'이라는 형태로 발표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러나 꼭 이와 같은 조건이 아니더라도 디지털 기술 발달에 따라 향후 이런 식의 디지털 싱글 앨범 형태는 확대될 것이다.


III. 다름에 대한 평가

문화상품은 그 상품 자체를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것을 비평하는 과정에서 먹고사는사람들이 있다. 문화상품의 생산자와 이에 대한 평가는 일종의 공생관계 속에 있다. 향후 이와 관련해 언론의 기사와 평가자들의 평가의 변화도 볼 필요가 있다.


[관련기사]
- 윤도현 ‘김제동송-오쿄쿄쿄’ 디지털싱글 공개 ‘재치만점!’ 뉴스엔 연예 2010.04.16
- 윤도현이 만든 `김제동송` 디지털 싱글로 발표 매일경제 연예 2010.04.16
- 윤도현, 김제동을 위한 찬가 '오쿄쿄쿄' 디지털 싱글로 재탄생 한국경제 연예 2010.04.16
- 윤도현, '김제동송' 선물 우정 과시..수익금은 대안학교에 아시아경제 연예 2010.04.16
- 윤도현, 김제동에 자작곡 ‘오쿄쿄쿄’ 선물…MC몽 ‘편곡’ TV리포트 연예 2010.04.16
- 작은 눈+못생긴 얼굴… ‘김제동 ’, 디지털 싱글 발표 티브이데일리 연예 2010.04.16
- "라면부스러기 같은 얼굴…" 배꼽 쥐는 김제동 한국일보 연예 2010.04.16
- 김제동에게 선물한 윤도현 노래 ‘오쿄쿄쿄 오마이뉴스 블로그 | 2010.04.16



[김제동송 가사]

김제동 송-오쿄쿄쿄 (윤도현 작사/ 곡, MC몽 편곡)

그 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게
너무 신기해 너무 신기해
소주 한 잔만 마셔도 행복해 하는 너를 보면
너무 불쌍해 너무 불쌍해

라면 부스러기 같은 못생긴 얼굴
아직도 고래를 잡지 못한 중년 아저씨

오쿄쿄쿄 쿄쿄쿄 니 웃음 소리에
소박한 사람들은 행복을 찾는다네
뜨거운 너의 가슴 몰라준다 하여도
속상해 하지마라 이승엽이 있잖아

그런데 그럼 난 뭐야
마이크 하나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는게
너무 놀라워 너무 놀라워
아무리 운동을 해도 변하지 않는 너의 몸이
너무 처량해 너무 처량해

유재석 강호동 보단 웃기지 않아
아무리 좋은 옷을 입어도 넌 자세 안나와

오쿄쿄쿄 쿄쿄쿄 니 웃음 소리에
소박한 사람들은 행복을 찾는다네
뜨거운 너의 가슴 몰라준다 하여도
속상해 하지마라 이승엽이 있잖아
속상해 하지마라 가족들이 있잖아
속상해 하지마라 윤도현이 있잖아
난 너의 영원한 형
여기 내가 있잖아
그런데 난 니 걱정할 때 아니야

문화산업을 다루며 문화를 잘 모른다는 선배의 지적에 요즘은 적극적으로 문화상품의 흔적들을 따라다니려는 노력. 이번에는 앤디워홀전(2009.12.12 ~ 2010.04.04)이 끝나기 전에 가서 본다는 게 결국 보지 못했다. 끝나기 이틀전에 미술관을 들렀지만 끝나기 전이라 그런지 미술관 입구부터 긴 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얼핏 과학박람회에 동원되어 전시부스 하나 들어가려고 긴 줄을 서서 기다리던 중학교 때 생각이 났다. 내가 뭐하는 짓인지...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할 판이다. 구태여 그 긴 줄을 서서 기다려 볼만큼 내게 중요한 전시회인가 싶기도 하다. 사실 앤디워홀 그림이나 앤디워홀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다. 내 관심은 오히려 앤디워홀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작품을 보러 오는 사람들의 생각과 전시회에 모이는 방식들을 유추해보는 거다. 긴줄은 그 유추를 확인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렇게 길게 늘어선 줄이 내게는 전시회에 걸린 엔디워홀의 작품들보다 더 큰 의미를 주지 않나 싶다. 일종의 '돈 내고 줄 서서 봐야 하는 동원된 전시회'에 대한 확인이랄까... 5분쯤 기다리다 바로 돌아섰다.  

그렇게 긴 줄로 서서 문화상품을 보고자 하는 수요가 아직 존재하는 한 몇 년 후에 앤디워홀전은 다시 열릴거다(사실 앤디워홀전은 이미 2007년에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기도 했었다). 그리고 꼭 한국이 아니더라도 계속해서 어디선가 앤디워홀전은 열릴거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앤디워홀전은 문화상품이 자본에 의한 기획상품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산업, 그리고 문화상품은 상품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문화상품은 소비를 위한 매체일 뿐이라는 점이다.

전시회 소개글에는 앤디워홀의 평이 극과 극의 속에 있는 것과 같이 소개를 하고 있다. "시대를 앞서 간 위대한 미술가 vs 대중의 기호에 재빠르게 영합한 상업미술가"라는 서로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이 평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동일한 평가라는 생각이다. 즉, 대중의 기호에 재빠르게 영합한 상업미술가가 시대를 앞서가는 위대한 미술가인 것이다. 여기서 대중의 기호는 기획된 상징 소비 추구의 욕망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일종의 소비사회...그래서 앤디워홀은 다시 돌아올거다. 그리고 앤디워홀과 같은 유형의 스타 미술가를 동원한 또 다른 앤디워홀류의 전시회가 곧 기획될 거다. 


축제 정보 썸네일
앤디 워홀의 위대한 세계

기간: 2009.12.12 ~ 2010.04.04
장소: 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관련정보: 행사정보, 참여정보, 가는방법
주최: 서울시립미술관, 동아일보 등

소개: 앤디 워홀은 상업 디자이너로 출발하여 60년대 팝아트로 미술계 정상에 올라 미술, 영화, 저널 등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누구보다... 더보기


요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서울에 있는 미술관이나 아트센터 등의 지도를 그리고 있다.
언제, 어디에, 누가, 왜 설립했으며 현재 소유(기업)자는 누구인지, 주로 무엇을 전시하고 있는지, 건축양식은 어떤지 등... 시간이 허락되면 가끔 찾아가 들러보기도 하지만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작업이다. 그냥 시간날 때 조금씩 그리는 재미!  

그림을 그리다보니 의외로 재미있는 경향들이 보인다. 대부분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해 비교적 최근에야 설립되었다는 점, 주요 그룹들은 기본적으로 미술관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 미술관 명이 설립자의 호나 이름 등과 관련이 깊다는 점, 위치가 서울 알짜배기 땅에 위치한 경우가 많다는 점...등. 이러한 경향들이 서로 맺는 관계도를 그려보고 그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처음에는 문화와 문화산업의 자율성에 대한 주장을 지지했다. 하지만 요즘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산업의 확장과 문화의 상품화 과정 속에서, 과연 문화의 자율성을 얘기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든다. 이는 문화산업의 확산 초기 프랑크프르트 학파가 비판한 시각이기도 하다. 이러한 프랑크프르트학파에 대한 비판과 연구 과정에서 나온 것이 문화의 자율성 논의이기도 하다. 나는 발전되는 논의 속에서 생각하기보다 오히려 초기 논의로 거꾸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 문화산업에 대한 프랑크프르트학파의 비판적 시각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야 물론 결과때문이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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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넓은 의미로 보면 정신을 포함한 일상의 삶 자체라고 할 수도 있다. 조금 범위를 좁히면 넓은 의미의 문화가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된 대상들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문화를 상품화하는 과정을 문화노동이라 할 수 있고, 이러한 일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문화노동자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문화노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즉 문화상품을 생산하는 문화노동을 생산적 노동으로 볼 것인가 비생산적 노동으로 볼 것인가? 어떤 문화노동인가에 따라 잉여가치의 생산과 분배, 그리고 노동 사회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노동은 구상과 실행의 분화 속에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경계에 서 있다. 여기서 생산적 노동은 잉여가치의 형성에 기여하지만, 비생산적 노동은 노동은 잉여가치의 분배에 참여하게 된다(물론 비생산적 노동에서 잉여가치의 분배에 참여하는 문화노동자는 잉여가치 분배 과정 그 자체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임금 노동자 형태로 존재한다.)

잉여가치 창조에 참여하는 전자의 예가 산업의 문화화, 예컨대 산업디자인이나 산업 생산물에 문화적 요소가 가미하는 노동과정이 될 것이다. 후자의 예가 문화의 산업화, 예컨대 예술작품의 상품화, 공연의 상품화, 축제의 상품화 등이라 할 수 있다(축제는 어떻게 보면 잉여가치를 구성원들이 향유하며 집단적으로 분배하던 과정이기도 하다)

잉여가치의 생산이 멈춘 상태, 또는 더이상 잉여가치 형성이 일어나지 않는 산업부문이나 국가의 문화노동은 비생산적 노동에 종사하게 된다. 이들은 잉여가치의 형성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생산적 노동에 의해 창출된 잉여가치가 필요하다. 이는 문화상품을 통해 산업 간 또는 국가 간 잉여가치의 이전과정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문화노동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잉여가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세계체제론적 틀에서 보면 선진 산업사회에서 문화산업이 활성되는 것은 세계체제의 틀 속에서 저개발국가나 개발도상국을 통해 창출된 잉여가치가 선진국으로 이전되어 분배되는 과정이라는 가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저개발국가나 개발도상국가는 일정한 단계에 도달하면, 즉 선진국과 같이 독점자본의 형태에 도달하면 자체 문화상품을 개발한다. 여기서 선진국의 문화산업은 잉여가치 이전 기반이 없으면 붕괴된다. 즉, 선진국의 경우 일정한 기간동안만 세계체제의 틀 속에서 문화산업의 활성화를 통해 문화상품을 팔고 잉여가치의 분배에 참여할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선진국이라 해도 잉여가치 창출, 즉 제조업을 등한시하고 문화산업만을 활성화시킬 경우 필연적으로 사회적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향후 영국과 미국이 이러한 예가 될 수 있다. 한국의 경우에도 한류와 디자인 도시 서울 , 관광 한국 등을 부르짖지만 제조업 기반의 산업생산이 쇠퇴하고 경쟁력을 잃을 경우 문화산업의 쇠퇴는 급격하게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문화산업의 축은 자본의 이동과 같이 중국과 인도로 갈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문화산업의 활성화는 선진 자본주의 쇠퇴의 초기 단계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문화노동이 생산적 노동이라는 가정을 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나 '권력이동', '부의 미래',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이나 '소유의 종말' 등을 보면 지식노동과 문화노동은 부의 원천이다. 그리고 세상이 이렇게 변하는구나 하는 문화충격을 받을 수다. 하지만 관점에 따라 이러한 논의는 사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