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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스콧 니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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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타클 사회와 비물질 노동, 분석은 옳지만 그 대안은 다시 생각해보고 싶다


송용한


I. 들어가며

언젠가 '자유의 재구성과 도시의 탈정치적 지배'에 대해 생각해본 일이 있다. 기 드보르는 그러한 나의 생각에 대해 '스펙타클 사회'를 통해 답을 주고 있었다. 이후 상화주의 운동을 전개했지만 결과적으로 스펙타클 사회는 더욱 강화되었고 기 드로르는 절망하고 죽었다.

왜 그랬을까? 나의 결론은 전복적 사고와 상황의 주체적 개입 또는 전유가 개별적 주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펙타클 사회 그 자체는 개별의 총합이 아닌 총체로서의 사회 그 자체이다. 이는 물론 기 드로르의 분석에서 이미 행해졌고, 실천도 이러한 총체성 지향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실천행위의 주체 문제가 아닌가 싶다1).

그렇다면 스펙터클 사회와 비물질 노동의 증가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안적 사유와 전유의 방식들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II. 스펙타클 사회와 비물질 노동

기 드보르는 '스펙타클은 이미지들의 집합이 아니라,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이다' 로 보고 있다. 즉 이미지가 의미가 되고 사람들 사이에 현존하는 양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 자체가 이데올로기가 되고 총자본의 형태로 재생산되는 메커니즘을 구성한다. 이것이 지식사회, 정보사회, 문화사회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후 스펙타클 사회에서 기능하는 노동은 물질의 생산이 아니라 그 의미를 생산하게 되는 노동, 즉 비물질 노동이 주를 이룬다2). 예컨대 통화할 수 있는 핸드폰을 만드는 게 중요한게 아니라 그것이 섹시한 슬림형이냐 아니면 명품 '프라다'냐를 만드는 게 중요한 거다. 살 수 있는 아파트가 아니라 삶의 품격이 높아지는 명품 '래미안'이나 '자이', '캐슬', '꿈에그린'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사는 서울이 아니라 '세계 디자인 수도'로의 서울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이러한 이미지와 의미를 만들어내는 비물질 노동.

물론 여기에는 물질과 비물질 노동 모두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스펙타클 사회에서 생산은 가상의 현실화이고 이미지의 변화와 재생산이다. 그리고 자본이 이윤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이러한 스펙타클적 재생산물이 소비될 때 가능하다. 따라서 생산물의 제품주기는 짧아지고 디자인이 변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생산물의 이미지들은 광고를 통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그 속에서 노동은 불안정하게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를 창출하는 비물질 노동은 안정될 필요가 없다. 어떻게 보면 특권화(전문직화)될 필요도 없고 정규직화 될 필요도 없다.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생산물은 평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노동의 질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평가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미 평가된 것을 자본이 골라서 취하면 된다. 이러한 예는 인터넷에서 소위 뜨고, 이후 자연스럽게 자본에 편입되어 방송을 타기도 하고 성공 케이스로 접어드는 경로를 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3).


III. 대안적 사유와 전유의 길

이러한 사회가 가져오는 결과는 칼폴라니의 표현을 빌리면 '경제가 사회로부터 분리'되고 '시장의 작용이 사회를 지배'하는 사회이다.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사회'이기도 하고 마르크스적으로 보면 모든 것이 '물상화'되고 인간이 소외되는 사회이다. 쉽게 말해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고 안되는 게 뭐~있니? 하는 식이다.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사회에서는 개인의 욕망과 자유는 확장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대안적 사유와 전유의 견해가 대안의 주체를 무엇으로 볼 것이냐? 대안의 내용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 등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고 있다.

먼저 대안의 주체로 개별적 주체를 가정하고 이를 사회적 주체로 환원하려는 운동. 이것이 상황주의 운동, 이후 자율주의 운동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자율주의에서 말하는 '다중지성'의 의미가 이러한 주체를 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다중지성이 하이에크의 '자생적 질서'와 다른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물론 이 지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차이를 모르겠다4).

그리고 그 둘 간의 모호함 속에서 오는 혼란. 사람들은 판단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에 부르주아지에게 소중한 관용과 상대성의 영역에 들어가게 된다(라울 바네겜, 2006). 결국은 '자생적 질서'의 적응 속에 흡수되어 경쟁 사회를 가중시키고 스펙타클 사회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라울 바네겜의 말처럼 권력은 폭발할 위기가 발생하자마자 안전판을 조작하고 내부 압력을 줄이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권력이 변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자신의 어려움들을 해결하면서 적응할 뿐이다. (라울 바네겜, 2006:81)

다음 대안의 주체로 사회 자체 가정하는 사고. 이것의 전형이 마르크스주의적 사유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문제는 기존의 사회주의적 프로그램은 해방이라는 이름 속에서 개인의 욕망과 자유를 제한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아닌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오역이고 한계이기도 하다. 그 한계 속에서 사회를 동물농장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IV. 국가의 기능과 역할, 그리고 제도

기본적으로 나는 사회 주체 문제에 있어 개별보다 사회 그 자체를 주체로 봐야한다는 입장이다. 뒤르켐이 그랬고 마르크스가 그랬듯이 말이다. 물론 개별적 주체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는 개별의 총합 이상의 것으로서 존재하는 현실이다. 그리고 사회와 개별적 주체의 중간형태로 존재하는 주체가 국가이기도 하다5).

종국적으로는 사회 자체의 변화를 생각해야하지만, 현실 사회 속에서는 국가의 기능과 역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의 역할과 기능을 부정하는 사회운동은 필연적으로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6). 국가는 그 개별적 운동을 폭력으로 진압하거나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사회의 미시적 수준까지 바꾸는 촉매 역할을 하는 것이 국가이기도 하다. 국가에 의한 수동혁명적 측면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미시적 수준에서 국가를 바꾸는 힘이 형성될 때 가능한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는 국가 자체의 역할과 기능을 부정하고 국가기구의 무의미성을 취하는 입장과는 다르다.  

항상 대안적 사유와 스펙타클 사회 속에서 전유를 위한 사고에는 국가의 기능과 역할을 고려하고 국가를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 단계 내려간다면 그것은 제도정치건 운동정치건 정치적 과정을 거쳐 제도화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운동이 이를 강제하지 않고, 현실을 떠난 대안의 공백 상태에서 자본이 위기에 몰리면 자본이 오히려 새로운 대안을 강제하고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보적인 방향이라 하더라도 총자본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필요하다면 국가로 하여금 이러한 역할을 하도록 추동할 수밖에 없다7). 그렇지 않으면 자본주의체제 자체가 붕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최근의 세계 금융위기에 따른 각국 정상들의 회동, 그리고 신자본주의에 대한 논의가 이러한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V. 결론

비약이 따르겠지만, 우선 이쯤에서 직관적으로 정리해야겠다. 
결론은 스펙터클 사회에서 비물질 노동의 증가와 함께 사회적 압력은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이상 사람들이 견딜 수 없는 사회가 될 쯤, 즉 폭발하기 전에 자본과 국가는 압력을 줄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회 제도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칠 것이다. 이미 그러한 사회적 압력의 증가와 이에 따른 결과의 징후들은 나타나고 있다.

높은 집값과 이에 따른 부동산 담보대출 증가. 물가상승 대비 낮은 임금증가와 이에 따른 생활고, 그리고 신용대출 증가. 노동시장의 비정규직화와 재생산된 노동력의 88만원 세대화. 비정규직의 낮은 결혼율과 높은 이혼율, 그리고 사회적 저출산과 고령사회, 자살률의 증가...  

이러한 징후들에 대한 사회적 변화에 대한 논의의 글들은 최근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8). 중요한 것은 이 변화 속에서 우리들 삶의 일상생활은 변화되고 재구성되는 가운데 노사관계의 패러다임도 기존의 정규직 중심에서 그 방향을 바꾸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내 바램인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지표의 정황에 의하면 이러한 변화는 짧게는 2013년 전후, 아니면 길어야 2017년 전후에 가시화될 것이다. 보통 한국 사회의 변화를 10년 주기로 생각하면 2017년 전후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대안은 칼폴라니의 지적처럼 시장의 작용으로부터 사회를 지키려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즉 시장의 영역에 내던져졌던 일정부분의 영역들이 다시 사회의 영역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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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칼폴라니의 '이중적 운동', 즉 '경제를 사회로부터 분리시켜가는 운동'과 '시장의 작용으로부터 사회를 지키려는 반작용 운동'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사회를 개별적인 주체의 합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사회는 개별적 주체의 합 이상의 것이다. 대안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칼포라니처럼 국가(제도)의 역할을 생각했어야 옳았다.
- 칼폴라니의 '이중적 운동'에 관려한 글:
이병천(2004), '칼 폴라니의 제도경제학과 시장사회 비판 : 60주년에 다시 읽는 『대전환』', 사회경제평론 제23호, 2004. 10

2) 비물질적 노동. 그것은 상품의 정보적.문화적 내용을 생산하는 노동의로 정의된다. 비물질적 노동의 개념은 노동의 두 가지 상이한 측면을 지시한다. 한편에서 상품의 '정보적 내용'과 관련하여 그것은 산업적 부분과 제3부문의 대기업들에서의 노동자들의 노동 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는 변화들을 직접적으로 지시한다. 거기에서 직접적 노동 속에 포함된 숙련 기술은 점차로 사이버네틱스와 컴퓨터 통제(그리고 수평적 및 수직적 커뮤니케이션)를 포함하는 숙련기술이다. 다른 한편에서, 상품의 '문화적 내용'을 생산하는 활동과 관련하여 비물질적 노동은 보통 '노동'이라고 인식되지 않는 일련의 활동들, 달리 말해, 문화적/예술적 표준들, 유행들, 취미들, 소비 규범들 그리고 더욱 전략적으로는 공공 여론 등을 정의하고 고정시키는 것에 수반되는 종류의 활동들을 포함한다.
* 마우리찌오 랏짜라또(Maurizio Lazzarato), '비물질 노동', [이딸리아 자율주의 정치철학], 이원형 편역, 갈무리, 1997, pp.311-312.


3)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 수단 속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족을 달자면 자본의 축적 또는 발달과정에 따라 노동은 불안의 과정을 거치며 안정의 단계로 접어들고 다시 탈숙련 과정을 거쳐 네트워크 속에서 갇히게 된다. 따라서 개발도상국이나 선진국이나 모두 불안정한 노동은 존재한다. 즉 비정규직 노동은 자본의 축적 단계에 따라 존재형태를 달리하며 항상 재생산되는 것이다. 카스텔의 네트워크 사회란 한편으로는 이러한 사회적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네트워크 사회에서 하위주체들의 결합을 주장하는 카스텔의 대안은 대안이 아니다. 노드에 접근할 수 없고 소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네트워크 자체가 이미 자본이다. 그 속에서 개별 주체의 결합이란 스펙타클 사회를 강화하는 것일 뿐이다.

4) 다중 및 자생적 질서에 관한 참고 글
0. 다중, 대중, 민중과 관려한 글:
- [경향신문] 권력 오류 바로잡는 다중의 힘
0. 자생적 질서에 관한 글:
- 정기문, 하이에크의 자생적 질서에 대해

5) 사회와 국가간의 관계, 또는 국가에 대한 논의는 다양하다. 국가와 사회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고, 분리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국가를 자본의 도구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고 자본과 노동 등 개별 사회 주체로부터 독립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모두 일면 설명력을 갖고 있는 논의들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국가와 사회의 관계, 그리고 국가 그 자체의 성격은 역사적 국면과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여기서 국가론에 대해 정리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현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총자본으로서 국가의 역할과 때로는 개별 자본을 규제하기도 하는 '상대적 자율성'을 인정하는 입장이다.

6) 이러한 국가의 부정. 그러한 근거 중의 하나는 국가의 지배권력화, 그 속에서의 억압적이고 위계적 지배기능으로의 전환을 들고 있다. 미헬스는 국가뿐 아니라 모든 조직은 이러한 권력지배 도구로의 전환 지적하고 있다.  

7) 칼폴라니의 '이중적 운동'에서 경제(시장)와 사회는 별종의 긴장 관계가 아니다. 둘은 항상 동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사회가 없으면 시장이 존재할 수 없기에 사회가 해체되는 것을 막기위해 일정 시점에서는 시장은 사회를 재구성하도록 하고, 이를 국가에게 수행하게 한다. 최근 국제 금융위기에 대한 각국 정상회의 회동과 국가의 움직임이 이러한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8) 이러한 논의의 글들 일부
- 고령사회 진입, 10년 안에 부동산 시장 무너진다
- 버블 붕괴 막기 위한 정부 총력전, 효과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