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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스콧 니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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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회/사회철학연구'에 해당되는 글 10건

I.
최근 신문을 보다 드는 생각들. 요즘은 내게 외재하는 모든 사물은 언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게 아마 구조주의자들이 사회를 바라보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개인에게 있어 사물 그 자체는 언어와 같이 형태와 상징을 갖고 보이지 않는 사회적 관계 구조 속에서 의미가 소통된다. 결국 사물은 상징가치를 갖는다. 그리고 사물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내게 외재하는 동시에 나를 통해 사회적 관계 구조를 재생산하고 있다.  

상징가치는 내가 부여한다고 의미를 갖고 소통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관계 구조 속에서 상징가치의 의미가 소통되는 구조가 형성되야 한다. 사회적 관계 구조는 권력의 상호작용이 구조화된 사회적 결과물이다. 이러한 권력 구조는 권력이 일방적으로 행사되는 관계 속에서 구성될 수도 있고 권력을 공유하는 형태 속에서에 구성될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상징가치는 권력 구조가 확장된 사회적 관계 구조 속에서 형성되고 의미가 소통된다는 점이 아닌가 싶다.

II. 

따라서 다양한 토템신앙이 존재하듯 동일한 사물이라도 그것이 어떠한 사회적 관계 구조 속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사물이 갖는 상징가치는 다를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는 사물의 상징가치를 대체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상품은 사물로 존재하지만 동시에 화폐를 통해 상징가치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상품은 화폐를 통해 사용가치뿐 아니라 상징가치를 동시에 갖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화폐의 교환가치를 중시하지만 화폐가 갖는 상징가치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상품의 사용가치가 화폐를 통해 상징가치를 갖는 동시에 역으로 상품이 화폐를 통해 사용가치와 상징가치로 분리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상징가치는 상품 형태로 생산될 수 있으며, 사용가치가 없더라도 상징가치 자체만의 상품으로도 유통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된다. 이는 화폐 그 자체가 하나의 전형적인 예에 해당한다. 즉, 화폐는 종이나 쇠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갖는 상징가치만으로 충분히 유통될 수 있는 것이다.  

III.
화폐와 마찬가지로 상징가치가 부여된다면 모든 사물은 상품이 되어 유통될 수 있다. 그리고 사회적 생산은 사용가치 없는 상징가치 상품의 생산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화폐만 먹고 살 수 없듯이 사용가치 없는 상징가치 상품만으로는 살 수 없다.

이 과정에서 또 다른 형태의 착취관계가 생산된다. 착취관계는 일방에 의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즉, 분리된 사용가치와 상징가치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사용가치 없는 상징가치만을 갖는 상품은 사용가치를 갖는 상품과 교환되는 과정을 겪는다. 역으로 상징가치를 제대로 부여받지 못하고 사용가치만을 갖는 상품은 상징가치의 취득을 필요로 한다.

이 과정에서 문화의 경제화, 경제의 문화하라는 문화경제학의 탄생신화가 성립한다. 하지만 이러한 상징가치는 사회적 관계 구조 속에서 재구성되고 변한다. 문화자본의 상대성에 의해 차별이 없어지는 듯 하지만 오히려 차별구조는 지속적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겪는 것이다.

결국 자본은 상징가치를 상품화하여 사용가치를 갖는 상품을 취득하는 한편, 상징가치 상품과 사용가치 상품 간의 차이에서 오는 잉여를 향유하는 과정을 밟는다. 이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 몸의 사회학 또는 명품의 사회학(명품 몸 만들기, 큰키 만들기, 외모스펙 만들기...)이기도 하고, 베블렌의 경제학(상품의 위광재 효과)이기도 하다. 

그걸 외모지상주의니 허위의식이니 물신화된 사회니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몸이 상품이 될 수 있고 그게 오히려 지금의 현실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하고, 돈이 없으면 키라도 크거나 몸짱이 되거나 외모라도 가꾸어야 한다. 같은 상품을 만들더라도 뽀다구나는 디자인으로 뽑아야 하고, 명품임을 강조해야 하고, 상품 선전은 성공한 스타들이 나와야 하는 구조다. 

[관련기사]
김혜수-유해진 커플, '외모지상주의 논란'도 불러 - 경향신문(2010.01.07)
MBC '후플러스', 루저 발언 논란 그 후  - 연합뉴스(2009.01.06)
외모,또 다른 골품제-20∼30대 4명의 난상토론  - 쿠키뉴스(2009.12.31)
'착한 외모'는 스펙?… 이력서 사진부터 떼야 - 쿠키뉴스(2009.12.31)

백화점, 불황 속 명품 매출 비중↑ - 연합뉴스(2010.01.06)
[부동산 특집]검증된 '명품 브랜드' 최고의 재테크  - 동아일보(2010.01.05)

IV.
자본주의 경제체제 속에서 벌어지는 이런 현실이 또 다른 형태의 경제체제로 바뀐다고 해결될 문제인가? 모든 사물의 상징가치가 화폐로 대체되는 현실에서 단순히 화폐가 폐지된다고, 또는 경제체제를 바뀐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근본적으로는 화폐가 갖는 상징가치 속의 권력문제가 아닌가 싶다. 그래도 상징가치와 사용가치의 분리 문제는 존재한다. 하지만 전자가 해결되면 후자의 상징가치와 사용가치의 분리 문제는 오히려 역능적일 수 있다. 결국 화폐로 쓰지 않더라도 화폐를 대체할 언어가 있어야 하고, 쓰여진 언어의 의미 소통에 필요한 새로운 언어구조를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안정을 욕망한다. 그러나 그 안정에 대한 욕망은 오히려 불안을 생산한다.
특히, 개별적 존재들이 추구하는 안정에 대한 욕망. 그것은 끝없이 개인을 중심으로 장벽을 쌓고 서로 쌓은 장벽을 넘어야 하는 구조를 만든다. 결국 그 속에서 서로 고립된 개인으로 남을뿐, 거기에 안정이란 없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안정을 추구하며 불안과 고립을 생산하고 있다.

흔히들 말하는 안정된 삶에 대한 추구... 오히려 그게 불안한 삶을 만드는 과정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하루하루를 참고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나이들어 자식들이 잘 사는 걸 보는 거....그렇게 다음 세대로 이전되고 재생산 된다. 더 슬픈 건 그런 걸 알면서도 살아가야 한다는 거다.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성을 되도록 따로 분리해서 간직하려고 노력하지. 자기 삶의 충만함을 가능하면 혼자서 확보하려고 하지. 그러나 이런 노력들은 삶의 충만함을 얻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파괴로 이어져. 왜냐하면 자기실현 대신 완전한 고독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지. 우습게도 요새는 어디서나 사람들이 진정한 안정감이란 고립된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사회적인 연대감에서 온다는 사실을 점점 잊고 있어...[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중]


위로
...양분된 두 당사자 가운데 한 사람만이 위협을 자신의 인격성과 관련된 문제로 인식한다. 그 이유는 상처받은 주체만이 대항 행위를 통해 자신의 전 인격체의 불가침성을 위해 투쟁하기 때문이다...엑셀 호네트, [인정투쟁] p.57.
....

인정운동의 '투쟁'의 계기에는 부정적.가변적 기능뿐만 아니라 긍정적, 즉 의식형성적 기능도 부여될 것이다. 투쟁은 ...'보편화'가 증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대각선 축에서,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의 사회적 인정관계로 이행하기 위한 실천적 가능 조건들을 규정할 것이다(p.64).

위로
임계상황(critical situation)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규율과 요구에 종속되는 다른 상황을 맞고,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외관과 행위를 본질적으로 바꾸는 과정에 직면한다. 이것이 바로 재사회화라는 개념이다.

한국사회는 이미 IMF이후 이러한 과정을 겪고 있다. 특히 비정규노동자들의 임계상황에 다다른 삶의 조건은 이 사회 자체로부터 삶의 대응 양식 변화를 강요당하며 재사회화 과정을 거치고 있다. 독신, 신용불량, 저출산, 노숙, 자살... 이러한 과정은 인성의 변화마저 수반하게 될 것이다.

재사회화 과정에서 살아남기위한 모방의 대상은 누구인가? 기든스는 수용소에서 수용자들이 보초들의 행위를 흉내내고 심지어 그들의 제복을 모방하기 위해 넝마가 된 옷조각을 사용하기도 함을 지적하고 있다(기든스, 1994: 101).

이러한 사례가 의미하는 것은 사회운동, 특히 노동운동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모방의 단계로 접어들고 스스로 보초가 되어 이 사회 구조를 재생산하는 주체로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자본가를 욕하면서 자본가를 꿈꾸고, 정규직을 욕하면서 정규직을 꿈꾸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삶에 대한 애착, 그래서 우리는 서럽지만 서로 미워할 수 없다.  

* 앤서니 기든스(1994), 사회학 개론, 을유문화사.

 
역사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실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실재하는 현상이 있고 역으로 그것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한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에 따라 그 현상이 동일할지라도 그 이면의 실재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개념과 언어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I. 들어가며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분명 봉건제나 신분제 사회보다, 또한 레닌주의적 사회들보다 자유로운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보이지 않는 창살없는 감옥과 같은 답답함과 부자유스러움들. 진정으로 자유롭다고는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사회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나의 자유를 제약하는 자들과의 관계를 떠난 완전한 자유를 상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 속에서 자유의 제약이 오히려 지배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며 지배를 보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따라서 자유에 대해 생각할 때 자유란 1) 타자가 나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다는 측면과, 2) 사회 속에서의 자유는 일정한 조건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II. 자연에 대립하는 자유 - 자연적 자유 및 사회적 자유

1. [실천이성비판]의 칸트(Kant)에게서 자유의 개념- 초월적 자유와 도덕법칙

칸트는 실천이성 비판에서 '자연법칙'에 종속되는 것은 '부자유'이라라고 한다. 즉 자연법칙은 필연적인 것이며 인과관계에 의해 결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법칙 하에서 모든 것은 인과성에 의해 결정된 것이고 자유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칸트는 결정된 것을 자유와 대립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칸트는 도덕법칙은 자연법칙에 종속되지 않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자연법칙에 종속하지 않는 도적법칙의 존재로부터 '자유'를 설정하고 있다. 칸트에 따를 때 자유란 경험 세계 속에서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칸트에게 있어 자유는 자연세계의 필연성에 속하지 않는 진정하게 주체적인 것(자기원인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연법칙에서 전적으로 독립된 것을 '자유'라고 할 수 있다.

0. 도덕법칙과 양심의 가책
결국 칸트에게 있어 자유는 자연적 인과성, 즉 필연성으로부터 이탈한 '초월적 자유'를 말하고 이러한 초월적 자유로 인해 도덕적 법칙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을  추론할 수 있는 도덕법칙이 실재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러한 물음에 대해 칸트는 양심의 가책이 도덕법칙의 현존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즉 도덕법칙도 시간 속에서 형성된 자연법칙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 법칙은 각 사회의 역사성이 그 사회의 도덕적 질서의 특수성을 규정하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잇다.

2. 스피노자의 자유개념 - 자연법칙(필연성)의 인식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자연법칙에의 예속을 '부자유'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는 자유를 칸드와 같이 자연법칙을 벗어난 초월적 자유를 상정하지 않고, 자연법칙에 대한 인식을 통해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본다.

결국 스피노자는 어떤 원인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자유롭지 못한 상태이며, 그처럼 결정되어 있는 것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자유의 환상'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자신의 정서를 그처럼 지배하는 자연법칙을 인식하지 못하고 정서를 통제하지 못하는 가운데 나오는 무지인 것이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이러한 정서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에 이르는 길은 이성에 따르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자연법칙에 대한 인식을 통해 그 법칙의 지배로부터 일정하게 벗어나 그 법칙을 이용할 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자연적 법칙, 즉 필연성을 인식함으로써 자연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0. 필연성 인식이라는 자유의 한계
그러나 필연성을 인식했다고 해서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필연성을 인식하는 것과 그것을 대상화하여 그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즉 필연성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필연성에 대한 읺식에 따른 자유라는 개념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유구되는 자유 또는 일상 생활 속에서 느껴지는 자유의 필요와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즉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유의의 필요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0. 자연적 자유와 사회적 자유
스피노자는 자연법에 따를 때 그 누구도 타자의 성향에 따라 살 수 없다. 각자는 자기 고유의 자유의 수호자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뒤 자유를 "자신의 고유한 성향에 따라 사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자유는 내적 자연이 요청하는 바에 따라 사는 '자연적 자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적 자유는 자의를 포괄하는 것으로 타자의 자유를 파괴할 수 있다.

이를 반영해 스피노자는 민주주의에서 이러한 자연적 자유가 사회적 자유로 이행한다고 설정한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민주주의를 "자신의 권력하에 놓인 모든 것에 대한 집합적 주권적 권리를 갖는 하나의 전체로 인간들이 결합하는 것"(정치학.신학논설; 266)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기초와 목적은 "인간들 욕구와 부조리한 지배로부터 구출해서 가능한 한 이성의 한계 속에 머무르게 함으러써, 협력과 평화 속에 살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즉 시피노자는 "[진정한] 자유는 자신의 완전한 동의에 따라 이성의 지휘에 따라서만 사는 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때 이성은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라고만 할 수 없다. 이때 이성은 다만 사회성의 가능성에 대한 반성능력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스피노자의 자유 개념은 자의의 규제를 통해 서로의 자유를 보호하는 '사회적 자유'로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3. 헤겔(Hegel)의 자유 개념 - 즉자대자적 의지와 정신
헤겔도 기본적으로 스피노자나 칸트처럼 자연적 자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헤겔은 필연성에 대한 인식으로서의 개념을 자유와 동일시한다. 즉 필연성에 대한 인식을 통해 필연성의 지배를 벗어난 후 필연성에 대해 반작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유를 그 근보적 규정성으로 하는 의지는 어떤 '자연적 의지'가 아니라 주객합일적 의식에 의해 매개된 '즉자대자적 의지'라는 것이다. 즉 스피노자의 이성적 의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헤겔에게 있어 자연적 의지는 동물적 의지와 같으며 이는 자유라 할 수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반성없는 의지는 자의적인 것이며 자유일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헤겔적 개념에 따를 때 진정한 자유는 "스스로의 목적을 주관성에 따른 규정으로부터 객관적인 규정으로 옮겨 놓는 가운데 바로 이 객관성 속에서 자신을 고수하려는 의지의 활동"을 진정한 자유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는 자연을 억압하는 자유이고 이러한 자유의 진정한 형태가 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는 개인적 주체성과 사회성을 통일시키고 있는 진정한 자유의 주체로 설정되는 것이다.

0. 억압적 자유의 한계
이러한 헤겔의 자유는 결국 국가의 법과 도덕이 진정한 자유라는 입장으로 입법과정의 계급적.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무시한 억압적 입장을 고수하는 자유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상 칸트, 스피노자, 헤겔의 자유는 자연적 자유를 부정하고 초월적 자유 또는 이성적 자유를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적 자유를 말하기 위해 자연적 자유를 부정하고 자의를 규제하지만 그것이 한편으로 자유의 억압이라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4. 사르트르(Sartre)의 자유 개념-'자연적 자유의 공존'으로서 사회적 자유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자유개념을 기본적으로 즉자존재와 대자존재의 구별에 입각한다.

1) 즉자존재
즉자존재란 그 자체로 있는 것으로 수동성도 능동성도 아니다. 그것은 "있는 바" 그대로의 것으로 내면이 부재하는 사물적 존재이다.

2) 대자존재 = 인간  / 자유=인간의 존재=인간존재의 무
대자존재란 즉자존재와는 반대로 그것이 "있지 않은 바"의 것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따라서 대자존재란 결코 포착되지 않는 존재이며 어떤 '본질'로서 파악될 수 없는 존재이다. 여기서 인간이 자유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를 대면하여 바라보고 자기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자유란 결코 포착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무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는 필연성으로서의 자유로 일종의 자연적 자유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또한 Hegel에게서와는 달리 필연과 자유의 결합을 의미한다. 즉 자유가 인간 자체의 자연으로서, 필연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에게 있어 자유=자연=필연이라는 도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러한 사르트르의 자유 개념에 따를 때, 인간의 자유로 인해 우리는 결코 타자를 포착할 수 없다. 즉 타자는 '자기'로 있지 않고 언제나 자기 자신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결국 타자의 내면은 언제나 도망치고고 그리하여 포착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주인-노예의 변증법적 딜레마를 이룬다.

3) 자연적 자유의 두 가지 측면
주인-노예의 변증법적 딜레마에서 자연적 자유는 (1) 행위적 자유와 (2) 내면적(초월적) 자유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여기서 행위적 자유는 주인이 장악할 수 있는 자유인 반면 내면적 자유는 그 누구도 장악할 수 없는 자유이다. 여기서 행위적 자유의 억압은 고통을 초래하므로 내면적 자유의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도출되는 것이 행위적 자유의 사회적 인정의 필요성이며, 여기서 행위적 자유의 사회적 보호에 따라 자연적 자유는 사회적 자유로 이행하는 것이다.

5. Levi-Strauss의 자유개념 - 이론적 자유의 부정과 관습대로 살아 갈 자유
Levi-Strauss는 자유에 대한 모든 합리주의적 정의에 반대한다. 즉 자유에 대한 정의가 이론적으로 한정되면 한정된 자유가 자연적 상태에서 생동하는 자유 그 자체를 억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자유에 대한 하나의 규정성을 자유 자체인 것처럼 부과하여 자유의 다른 측면들을 억압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자유의 한계에 대한 대안으로 Levi-Strauss는 영국인의 지혜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실질적 자유란 오랜 관습의 자유와 기호의 자유, 한마디로 말해 관습대로 살아갈 자유"라는 것이다.

0. 지혜와 관습의 무관성과 관습의 억압성
그러나 문제는 '관습대로 살아갈 자유'와 영국인의 지혜가 별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즉 영국인의 지혜는 타자의 타자성을 존중하고 역사적 조건의 성숙을 기다리는 것인 반면, "관습대로 살아가는 자유"는 그 관습이 타자에 대해 억압적인 경우 결코 타자를 보호하고 존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Levi-Strauss의 '관습대로 살아갈 자유'가 의미하는 것은 목가주의적 시각이자 우민주의적 시각으로 억압.유린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집단적 수준에서 자유를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6. 하이에크의 자유개념 - 관습 속에 축적된 수많은 지성
하이에크는 관습 속에 축적된 지성, 즉 집합적 지성 속에 자생적 질서가 형성되어 있다고 본다. 이러한 하이에크의 자생적 질서는 계획적 이성보다 우월한 것으로 집단적 관습의 자유를 말하는 Levi-Strauss와 같은 우를 범하고 있다.

이러한 집합적 지성은 관습속에 내포된 지배관계를 보지 않으며, 또 자본주의 성립과정에서 국가적.법적 개입의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집합적 지성은 다만 자생적 질서라는 지배관계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7. 중간 개념 정리

1) 내면적 자유: 개인의 고유한 내면이 '자유'의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은 (1) 그 내면과 대립되는 '외부의 구속'이 부과될 때, (2) 그리고 그 개인이 외부의 구속에 종속됨에 따라 그의 외적 행위가 내면과 분리될 때이다. 이는 인간의 내면은 언제나 고유한 것이나 이 고유성이 언제나 '자유'의 형태를 취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개인적 고유성은 언제나 존재하지만, 그가 두려움과 절망에 의해 외부에의 종속을 완전히 받아들인다면 그의 내면적 자유는  부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자연적 자유: 자연적 자유에서 문제는 (1) 육체적 필요에 따른 행위가 자유인가 부자유인가 하는 문제, (2) 자연적 자유와 '자의' 사이의 겹치는 문제가 있다.

(1)과 관련해서는 부자유 1(타자의 구속-부모, 상사, 형제...), 부자유 2(자신의 물리적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선택들=소외된 노동), 부자유 3(육체적 필요의 해소=육체적 구소), 부자유 4(사회적 금지들=도덕이 불편하게 느껴질 때) 등이 있다.

(2)와 관련해서는 '자의'는 한글의 의미로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생각'을 뜻할 수 있다. 그러나 불어적 의미의 '자의'(arbitraire)는 자기 멋대로 판단하고 행동하여 타자에게 피해를 주는 상황을 전제하고, 독단적 권력행사와 관계된다. 즉 자의는 사회적 관계를 전제하는 것이고, 자유를 빙자한 제멋대로의 행위가 타자에게 피해를 미치는 상황을 지칭한다.

어떻든 자연적 자유는 타자를 염두해 두지 않고 행해지는 것이고 사회의 규제를 받지 않는 것이므로, 타자의 삶을 침해하는 '자의'의 성격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자유의 '자의'적 측면에 대해 Levinas는 "자유의 본질이란 한 마디로 동일자의 제국이다"라고 한다. 즉 자기를 타자에게 부과하는 것이 자유라는 것이다.

3) 사회적 자유:
우리는 현존하는 사회적 자유의 형태들을 (1) 법적 자유, (2) 상호적 자유(시민적.합의적.연합적 자유)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여기서 (1) 법적 자유는 i)기본적으로 국가권력의 자기제한적 자유로 언론, 사상, 집회 등의 이른바 negative한 자유와 ii) 사적 소유의 자유와 같이 지배계급의 활동 근거를 위한 자유들을 상정할 수 있다.

어쨋거나 중요한 것은 '사회적 자유'가 정치체제와 연관된다는 것이다. 즉 특정한 정치체제는 특정한 사회적 자유들만 보장한다는 것이다.

4) 자연적 자유와 사회적 자유의 관계
자연적 자유는 자의의 규제와 자유의 상호보장을 위해 사회적 자유로 이행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유가 어디까지나 개인적 수준에서 위치하는 개인적 향유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자유의 확립과정에는 특정 계급 또는 집단의 이해관계가 관철된다는 점이다.

III. 사회적 자유의 부르지아적 형태들
1. 권력의 접합구조와 부르주아 사회에서 사회적 자유의 의미
부르주아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 (1) 국가권력, (2) 자본의 권력, (3) 지배계급의 권력, (4) 아버지들의 권력의 접합구조를 성찰해야 한다. 여기서 사회적 자유는 (1) 자본의 활동에 대한 국가의 절대주의적 제한을 제거하는 것, (2) 그리고 자본의 활동을 국가적으로 보장받는 것, (3) 또한 자본의 활동에 따른 지배계급의 수혜를 보호받는 것, (4)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의 한 토대로서 아버지들의 권력을 보호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네 가지 권력의 접합구조에 따라 부르주아 사회에서 사회적 자유의 형태들은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1) 부정적(negative) 자유들-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보편적 자유(언론의 자유 등)
2) 부르주아 계급의 자기 근거를 이루는 자유들 - 소유의 자유(사적 소유의 자유의 조건과 자유의 물질적 조건의 파괴), 정치적 규정, 경제적 자유 등
3) 사랑의 자유들과 유년의 자유들의 제한 - 아버지의 권력과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 수호
4) 집합적 행동의 자유들에 대한 제한

이러한 부르주아적 자유는 국민군, 의회, 학교를 통해 존재하고 작동한다. 즉 국민군은 부르주아적 자유의 물질적 토대를 이루며, 이회는 이의 조직작, 학교는 부르주아적 자유를 위한 교육을 담당하는 것이다.

V. 자유의 재구성
자유가 지배 또는 타자의 구속에 대립하는 것이라고 할 때, 진정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자신이 진짜로 원한느 방식대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타자들의 존재, 노동의 필요에 의해 기본적으로 제약된다.

따라서 자유의 조건이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조건이라면, 그것은 1) 권력의 공정한 분배, 2) 노동 소외의 제거, 3) 물질적 기초의 확보, 4) 유년시절부터 개인적 자율성의 보장 등일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적 자유의 새로운 형태들에 대한 모색은 이처럼 자유의 조건들을 사고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위로
I. 들어가며

현대적 삶에서 소유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소유 개념으로부터 사회적 관계 구조를 도출하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살펴볼 것이다.

1. 소유의 역사적 체계들
1) 맑스의 소유개념의 문제점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에서 '생산관계의 법률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 소유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1) 소유관계는 생산관계의 반영, 그리고 더 자세히는 (2) 생산관계의 법률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생산수단을 둘러싼 생산자와 비생산자의 관계라는 생산양식 개념 자체가 이미 소유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즉 소유관계는 단지 생산관계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 생산관계를 규정하고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소유관계와 생산관계는 상호 규정적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소유관계를 생산관계로 규정하고 있다는 한계를 지닌다. 또한 소유관계를 단순히 법률적 관계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2) 구체적인 역사적인 소유관계
그렇다면 역사적 과정에서 소유관계와 생산관계는 어떻게 구성되고 변화되어 왔는가?
(1) 봉건적-신분적 사회구성체에서는 중층적 토지소유가 성립하고 있었으며, 이는 a)그 지배관계가 드러나면서 b) 노동자에게 노동수단이 보장되었다.

(2) 반면 자본주의에서 생산수단의 소유는 a)단순히 사물에 대한 관계처럼 나타나고, b)생산수단으로부터 배제된 노동자와의 관계는 감춰진다.
자본주의사회에 문제는 이러한 소유관계가 법적 소유관계로 환원되는 것, 즉 부르주아적 지배의 비밀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을 맑스는 소유관계가 생산관계를 규정하는 것, 소유관계가 생산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이중적 측면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부르주아적 지배의 소유권 개념은 (1) 소유관계의 폭력성이 상품관계에 의해 은폐된다는 것, (2) 노예 소유제도와 마찬가지로 토지 소유관계도 폭력적 지배관게로 성립한다는 것, (3) 상품관계가 아니라 생산관계가 소유관계을 만들어 낸다는 것, (4) 꼬민주의 사회에서는 소유관계가 지배관계임이 드러나리라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가 확립할 수 있는 것은 (1) 법률 관계와 상품 관계가 소유관계의 성격을 은폐한다는 것, (2) 소유관계는 지배관계를 내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맑스는 소유관계가 생산관계에 의해 규정된다고 하지만, 그리고 그처럼 간주하면서 소유관계를 거의 연구하지 않지만, 오히려 소유관계가 생산관계을 규정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II. 소유의 개념

1. 소유는 사물과의 관계이기 이전에 인간들 사이의 관계


1) 인간들 사이의 관계로서 소유
우리가 무엇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 '소유'가 배타적 처분권이라면, 타자는 그것에 대한 '소유'에서 배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민법에서는 소유란 다만 사물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일 뿐이라고 하지만, 현실적 관계에서 '소유권'이란 사물에 대한 관게에 앞서 타자에 대한 관계이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소유'한다는 것이 전제한다는 것은 '타자가 그것을 못 갖게 하는 것'이므로, 타자의 존재가 언제나 전제된다. 따라서 나의 '소유'는 타자의 '비소유'를 전제하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이다.

2) 타자 관계라는 소유 개념의 함의
소유관계가 타자와의 관계라는 것이 함의하는 것은 소유관계에 따라 타자와의 관계가 달라지고 타자와의 관계에 따라 소유관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타자와의 관계에 따라 소유의 성격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개인의 소유권이라하 하더라도 그것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타자에 대해 파괴성을 갖는다면 그 것은 '사적 소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타자와의 공존적 관계를 내포하는 소유 개념을 내포할 수 있을 것이다.  

3) 소유의 유형
로크는 소유를 '인식의 소유', '노동의 소유', '노동생산물의 소유'에 대한 소유로 나누고 타자와의 문제를 염두해 둔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소유는 (1) 타자가 더이상 그것에 대해 권리를 갖지 못하는 것이지만, (2) 그 자신의 노동을 통해 소유를 확정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은 타자의 몫이며, (3) 토지 소유가 가능한 것은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많이 남겨 놓을 때 가능하고, (4) 모든 사람은 그가 사용할 수 있을 만큼의 권리를 갖는 것으로 생각한다.

2. 선점이 아니라 사회적 인정이 소유의 조건
소유의 조건으로 많이 이야기 하는 것으로 선점을 이야기 한다. 이러한 측면을 반영해 현대 물권법에서도 무주물선점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한 현실에서 이러한 측면은 법에 의해 인정된 것이다. 법이 인정하기에 앞서 힘으로 뺏으면 그만이다. 그것을 법이라는 것이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소유의 조건은 사회적 인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인정은 법과 같은 제도 이전으로 생각해야 한다. 즉 소유 자체를 상호성과 관련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를 때 우리는 (1) 소유 자체가 타자의 것을 타자의 것으로 인정하는 행위에 의해 발생, (2) 선점에의 주장은 무용하고, (3) 소유는 상호적 동의에 의해, (4) 관행 즉 관습적으로 성립하는 것이 소유이며, (5) 이러한 단계가 지나면 폭력에 의해, 즉 법제화와 같은 제도에 의해 규정되고, (6) 교환의 일반화 대상이 되는 것이다.  

3. 소유는 인간의 자연적 조건이다.
Hegel은 법철학 원리에서 인격의 자유를 가능하게 하기위한 조건으로 소유를 말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소유는 인간 삶의 자연적 전제, 즉 인간은 기본적 소유물과 자연적 통일체 또는 원초적 통일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적 생산조건들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자연적 전제들로 관계하며, 연장된 신체를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신의 삶의 자연적 전제에 대한 이러한 '소유'는 자연과의 통일체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소유가 생산수단의 '독점', 그리고 '자유로운 배타적 소유'로 일반화되어 오히려 삶의 자연적 전제로서의 '소유'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III. 소유의 전자본주의적 체제들

1. 소유형태의 복합적 형태들

고들리에(1978)는 '전자본주의 사회들'에서 "원시사회의 소유권은 토지, 가축, 생산수단, 나무, 의례적 지식 등과 관련하여 상이한 규칙을 가지고 복합적 체계를 이룬다"고 한다. 이것은 소유대상에 따라 소유형태가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각의 소유대상이 상이한 사회관계를 전제한다면, 소유형태가 단일성을 가질 필요는 없다. 단일성을 갖는다는 것이 오히려 폭력적일 수 있다.

고들리에는 이어서 뉴기니아 시안느 족의 예를 들면서 두 가지 형태의 점유(appropriation)이 존재하는 것을 지적한다. 그 점유의 형태는 (1) 타자에게 양도할 수 없고 아이에 대한 아버지의 입장과 같이 후견의 입장을 취하는 재화와, (2) 도끼, 바늘 등과 같이 개인적으로 전유되고 타자에게 양도될 수 있는 재화들로 나누어 진다.

그리고 사물들은 토지를 제외하고 (1) 생활재료, (2) 사치재, (3) 위광재로 나누고 같은 범주 내부에서 제한적 교환됨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집단내부에서의 경쟁은 생산과 생산수단 밖의 영역, 예컨대 위광재와 같은 영역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복합적 소유형태를 통해 체제내의 경쟁이 물질적 존재의 상실이 아닌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생활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짜여져 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농촌공동체를 생각해보자면 (1) 동제, 관혼상제의 공동화와 같은 공동의례, (2) 동회, 동계 등의 공동조직, (3) 공동납세, (4) 공동노동-노동교환이 결합된 공동체라는 유기적 전체 속에서 소유형태가 분배되고 있다는 것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분배는 공유림, 공동저수지, 공동오락이나 의례수단, 공동노동수단, 공동묘지 등의 (1)공동소유와 그 외의 (2) 개인적 소유로 대변되고 있다. 그리고 개인적 소유는 다시 (1) 공동노동으로 형성된 개인적 소유, (2) 개별노동으로 형성된 개별적 소유, (3) 대여 가능한 개인적 소유, (4) 대여 불가능한 개인적 소유, (5) 언제나  증여 가능한 개인적 소유 등으로 나누어 진다.

소유의 이러한 복합적 체제는 택지, 공동경지 등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와 그에 맞는 복합적 노동방식에 상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전자본주의적 사회들에서 복합적 소유체제에 입각해 앞으로 보다 발전된 사회에서 토지, 생산수단, 주택, 소비수단 등에 대해 각각에 대한 소유형태(국민적 소유, 협동조합적 소유, 꼬뮌적 소유, 개인적 소유)등을 설정해 볼 수 있다.

2. 토지의 중층적 소유
소유의 전자본주의적 체제들의 두 번째 특징은 중세의 봉건제-신분제뿐 아니라 원시 사회에서도 중층적 소유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말리노브스키(1921)는 '트로브리안드 섬들의 원시경제'에서 토지가 추장, 주술사, 귀족, 경작자 그리고 주민 전체에 의해 중층적으로 소유될 수 있고, 이들 각자가 토지에 대해 일정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예는 유럽의 중세시대뿐 아니라 고려나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다. 구체적으로는 토지에 대한 상급소유권과 하급소유권을 들 수 있다. 상급 소유권에 의해서 국와이나 영주는 수조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하급 소유권에 의해 일반 농민은 상속.양도.이용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소유권의 중층적 구조와 다양성이 의미하는 것은 소유권의 제한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러한 소유권 체제에서는 확대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성립과 함께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가 확립되게 된다. 그것은 사적 소유 절대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IV.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의 확립

1. 국가권력의 개입으로부터 소유권의 해방

자본주의가 성립할 당시 부르주아에겐 무엇보다 국가권력의 개입으로부터 소유권을 해방시키고 재산권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러한 필요성은 로크와 흄과 같은 사상가들, 그리고 중농주의자들에 의해 국가의 주된 목적을 '재산의 보존' 또는 '소유권의 안전' 도모로 간주하게 하였고, 18C 계몽사상은 소유권을 자연권으로 간주하게 된다.

2. 소유권 절대의 원칙 확립 - 생산수단과 소비수단의 동일화
이러한 과정은 프랑스 혁명을 거쳐 1804년 프랑스 민법에 의해 1) 평등의 원리, 2) 계약자유의 원리, 3) 사적 소유 절대의 원리, 4) 과실책임의 원리를 확립한다.

이러한 법률체계는 (1) 추상적 보편주의 속에서, (2) 계약법에 의해 인간들의 다양성을 제거하고, (3) 소유법에 의해 사물들의 다양성(인간과 사물들의 관계)를 제거한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동일한 것으로 취급되는 가운데 생산수단의 소유와 소비수단에 대한 소유가 완전히 동일하게 취급되게 된 것이다.  

3.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의한 개인적 소유의 파괴
우리는 소유의 형태를 통해 인격의 연장이고 생존과 행복을 보장하기 위한 '개인적 소유'와 타자에 대해 배타적이고 폭력적이며 이윤의 원천이자 더 많은 화폐 획득을 위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로 나누어 볼 수 있었다. 이들 소유의 차이가 법에 의해 동일화되고, 모든 사물에 대한 단일한 소유권의 확립을 통해 제한되지 않은 일반적 교환을 확립시킨다. 이에 따라 모든 것이 판매 및 소유 대상화 되고 타자의 생존조건 마저도 매매되는 조건을 형성한다. 이러한 과정은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에 의해 개인적 소유가 파괴되는 현상을 낳는다.

4. 소유권의 모순과 소유권 제한
그러나 이러한 소유권의 절대성은 현실에서 모순을 낳고, 국민이 공공이익을 위해 소유권을 규제할 수 있는  경제-사회적 개입주의에 따른 소유권 제한이 생겨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자본주의 국가가 자본의 재생산 및 확대 재생산을 위해 행하는 것으로, 그 핵심은 자본을 위한 제한이라는 점이다.

V. 꼬민주의적 소유체계
엥겔스는 '1844년 초고'나 '신성가족'에서 사적 소유가 모든 모순의 원천인 것처럼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사적 소유를 철폐함으로서 자본주의를 지양할 수 있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앞에서 살펴본 소유의 개념과 유형, 그 기능 등의 측면에서 볼 때 현실 분석력이 떨어지며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 개념일 뿐이다.

이에 반해 맑스는 '프랑스에서의 내전'을 통해 새로운 소유형태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1) 토지와 자본이라는 생산수단을 자유로운 연합된 노동의 단순한 도구로 전환시키고, 그리하여 2) 개인적 소유의 사실화를 통해, 3) 협동조합적 생산에 의한 자본주의적 체제를 대체하고, 4) 협동조합들이 모두 공동계획에 의거해 국민적 생산을 조절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사적 소유의 폐기라는 단순한 negative한 형태로서가 아니라, 연합적 소유, 협동조합적 소유, 개인적 소유 등의 범주가 보다 positive하게 제시되어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소유 대상이 내포하고 있는 사회관계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소유형태를 설정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이행을 얘기할 때는 단순히 생산관계의 변화나 사적 소유형태의 폐지라는 형태로 거칠게 얘기하기 보다는, 그 매개적 단계로서 소유형태들의 변화와 새로운 복합적 소유체제의 설정을 얘기하는 것이 타당하다.

생산관계를 변화은 소유관계의 변화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로

* 글을 정리하며 *

우리의 상상력은 어디까지 가능하며, 그것이 가능한 조건들은 무엇일까? 기존의 공간들은 어떻게 우리들의 상상력 속에서 재창조되고 새로이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인공적 인간과 같은 대상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공적 인간이라는 수단을 통해 일부가 자기보존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일까, 아니면 개별자들이 자기보존 의지를 집단적 표현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은 국가의 성격과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지점과 연결되고 있다.

인간이 아닌 다른 형태의 인공물에 대한 창조는 불가능한 것일까? 설사 인간이라해도 그 인간은 처한 생존 조건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며 그의 인성을 형성하는데, 이를 홉스와 같이 투쟁하는 인간이라는 자연상태로 가정하는 것이 타당할까? 결국 하나의 인공적 인간이 또 다른 주체를 만나면 투쟁(전쟁)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인공적 인간을 가정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국가의 존재조건과 유형, 민주주의, 그리고 전쟁과 세계 국가로의 전환 등의 고민과 연결될 수 있다.

여기저기 많은 상상력들을 자극하는 글들이다.



인공적 인간 - 리바이어던

...국가의 주권은 몸 전체에 생명과 동작을 주는 인공적 '혼'이며, 각부 장관이나 행정부.사법부의 관리는 인공적 '관절'이다. 그리고 보상이나 처벌은 '신경'으로 이것은 모든 관절기관과 국민을 국가 주권자에 묶어서 그 의무를 수행하게 만드는 데 필요하다. 모든 국민의 재산과 부는 모여서 '국력'을 이룬다. 국민의 안전이 국가의 '사업'이며, 고문관들은 '기억'에 해당하며, 형평과 법은 '인공 이성'이며 '의지'이다. 조화는 건강이요, 반란은 병환이며 내란은 죽음이다. 긑으로 이 정치 공동체를 만드는 합의나 동의는 우주를 창조할 때 신이 말씀하신 "이제 사람을 창조하자"라는 명령과 같다고 하겠다.

...인간의 지혜는 책을 읽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서설)


홉스, 리바이어던, 임명방.한승조 역,
언어의 기호기능이 갖는 네 가지 효과적인 이용과 이에 상응하는 네 가지 악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네 가지 언어의 악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말을 일정한 의미로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잘못 기록할 뿐 아니라 자기를 기만하는 경우, 말을 비유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기만하는 경우, 말을 통해 자기 의지가 아닌 것을 자기 의지라고 하는 경우, 그리고 서로 괴롭히기 위해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그것들이다.(김용환, 2004: 64)

"이 세상에 보편적(universal)인 것은 없고 이름(name)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름 붙여진 사물들은 모두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없이는 사람들 사이에 국가도, 사회도, 계약도, 평화도 없으며 사자나 곰, 늑대들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다(홉스 )"

'굴뚝으로 들어와 방에 갇힌 새가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유리창의 반사광만을 좇는다'는 갇힌 새의 비유는 교훈적이다. 잘못된 정의를 못 보고 책장만 넘기는 스콜라철학자들과, 앞선 철학자들의 권위에 짓눌려 무비판적으로 책의 권위만을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모두 갇힌 새와 같다. 이렇듯 정의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홉스가 강조하고 있는 배경에는 정의하는 일이 그의 철학적 방법론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용환, 2004: 69)

동일한 사물에 대한 우리들의 지각이 다른 사람과 다르고 또 동일한 사람이라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른 이유를 '리바이어던'에서는 사람의 체질이나 편견 때문이라고 간단히 넘어가고 있으나 '법의기초'에서는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관습의 힘, 교육의 결과 등이 사람들의 정념에 다양한 이름을 붙이게 만들며 추리에서도 오류에 빠지게 만든다고 설명하고 있다(김용환, 2004: 70)

김용환, 홉스의 사회.정치철학 - '리바이어던' 읽기, 철학과 현실사, 2004.

                   자유의 재구성과 도시의 탈정치적 지배
                                      - 자유의 확장과 도시 소비를 중심으로 -

   
                                                                                                                   송용한


I. 들어가며 - 도시 성격의 변화에 대해
산업화시기 산업도시는 이성적 자유에 기반한 계획도시라 할 수 있다. 그 도시에는 특정의 주류 산업(제조업)이 지배하고 이에 걸맞는 지역적 공간배치가 이루어진다. 그 속에서 일상생활, 즉 사람들간의 관계가 재구성된다. 그러나 지금의 도시, 특히 대도시는 대부분 서비스 산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 속에 다양한 직종과 직업은 도시를 산업도시에서와 같은 일정한 질서가 아닌 무질서해보이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부는 이성이 지배하지 않는, 자유와 방종이 난무하는 모습으로 그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혼란스럽고 제멋대로인 것 처럼 보이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말 이성이 지배하지 않고 자유와 방종만이 난무하는 공간일까? 오히려 이성적 지배의 한계를 넘어서는 과정이고 또 다른 형태의 이성적 지배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미 누군가 이런 생각을 개념과 함께 정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내가 그런 생각의 글들을 만나 함께 고민하고 정리하지 못했다. 다만, 그 전에 지금의 생각들을 정리해보고 향후 이와 관련된 생각들이 어떻게 만날지 상상해 본다.    

II. 자유의 확장과 도시 소비 - 탈정치적 지배
1. 자유의 재구성 - 사회적 자유, 내면적 자유, 자연적 자유
스피노자, 칸트, 헤겔에게 있어 '자연적 자유'는 부정된다. 이 과정에서 '자의(自意)'를 규제하고 '이성적 자유'로서 '사회적 자유'를 체계화한다. 그것의 결정판이 '국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과정은 근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성립과 결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시장이건 계획경제건 이성에 의해 생산과 소비의 통제가 이루어지고 그 속에서 확대재생산과 자본주의적 축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맑스는 국가를 자본주의적 지배 도구로 해석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맑스도 '사회적 자유'를 지향한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한 지류에 놓여 있는 것이다. 레닌도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사회적 자유에 기반한 합리적 소비가 한계에 이르렀을 때 자본주의적 축적은 위기에 이른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이 '자연적 자유'를 다시 복원시키는 과정이고, 이것이 포스트모던과 자본주의가 다시 만나는 지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자유의 중심 축이 '이성'이라는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적 자유'에서 '행위적 자유'와 '내면적 자유'를 중시하는  '자연적 자유'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역에서 생산과 소비의 양식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곧바로 생산과 소비 양식이 재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는 자본주의적 해체과정과 이를 다시 자본주의적으로 재수용하는 과정이 놓여 있는 것이다. 먼저 자본주의적 해체의 사유 과정에 사르트르, 레비나스, 푸코가 있고 좀 더 최근의 선상에 데리다, 들뢰즈 등이 놓여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구체적인 내용은 세부 검토가 필요하다). 문제는 이러한 해체의 과정이 억압에서 자유를 확장하는 형태의 운동으로 나타나지만, 이 과정이 오히려 자본주의적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자유의 주체와 대상의 문제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적으로 보면 즉자존재와 대자존재의 구별과 자유를 '존재하는 무'의 세계로 보는 의 한계일 수 있다. 존재하는 무를 찾아 나서는 끊임없는 관계의 복원과정이 합리적 이성을 뛰어넘는 것처럼 보이지만, 존재하는 무라는 것이 오히려 이성을 호출하고 이성을 강화하고 기존의 이성적 지배를 변형적 지배로 만드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내가 있지만 나도 나를 알 수 없기에 부단히 나를 찾아 나서야 하는 과정이 오히려 이성에 의해 포획되는 기회와 그 틀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2. 도시의 소비와 자유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현대 도시는 자유스럽고 비이성적인 곳으로 보이지만 그렇게 자유스럽거나 비이성적인 곳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기존 이성의 지배가 공고화되고 이를 넘어서는 범위로 자유의 범위를 확장하는 과정에 놓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사회적 자유'에서 '내면적 자유'를 통해 '자연적 자유'까지 범위를 재구성과정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의 소비는 확장되고 재구성된 자유에 따라 다시 분화될 수 있다. 사회적 자유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의 소비, 자연적 자유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의 소비가 존재하는 것이다. 사회적 자유가 허용하는 범위는 산업자본주의적 소비양식, 즉 버는 한도 내에서 소비의 자유가 허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생산으로 선순환되는 합리적 소비가 전제되고 그 소비의 대상과 한계가 정해져 있다. 사치품이 아닌 기본적인 의식주 과정에 대한 소비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레져나 향락성 소비는 또 다른 성격의 자유와 만나는 소비형태가 아닌가 싶다. 그것은 자연적 소비와 그 한계, 즉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지만 나를 찾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 기존의 일상과 만나는 것이다. 구속을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내면적 자유일 뿐이다.

3. 주체의 분할과 탈정치적 지배
이러한 도시적 자유와 소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첫 번째로는 자유가 확장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성적 자유에 의한 억압에서 벗어나 행위적 자유와 내면적 자유라는 자연적 자유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자연, 즉 자연적 자유가 아닌 자연 그 자체로 돌아갈 수 없는 자유 속의 자유, 결국 이성적 자유의 틀 속에서 외연을 확장시키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돈과 시간만 있으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두 번째, 주체의 분할을 의미한다. 특히 내면적 자유가 이성적 자유의 범위 내에서 해소되는 (소비)과정에서 이 분할의 선은 구체화된다. 이종영은 내면성과 내면적 자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내면에 있어 '구속'이 부과되기 전에 존해하는 것은 모든 인간마다 상이한, 개인의 고유한 내면성일 뿐이다. 이 내면성은 온갖 형태의 규정성들이 개입하는 고유한 개인적 체험들의 축적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고유한 내면이 '자유'의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은 1) 그 내면과 대립되는 '외부적 구속'이 부과될 때, 2) 그리고 그 개인이 외부의 구속에 종속됨에 따라 그의 외적 행위가 내면과 분리될 때이다.
사르트르적으로 말하면 대자적 자유 속에서 자기를 대면하고 자기를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내면이 부재하는 '나'라는 즉자적 한계, 결국 '나'를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기를 벗어나는 과정은 개별적으로 분할을 확장시킨다. 그리고 외부의 구속에 종속되는, 즉 소비양식에 지배를 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도시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주체에 의한 다양한 하위문화의 한 측면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체의 분할은 세 번째, 기존 정치의 해체적 분할 지배를 의미한다. 정치체제는 집단적으로 특정한 형태의 '사회적 자유'들만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도시에서 보여지는 자유의 확장과 주체의 분할은 이러한 기존의 집단적 정치를 해체한다. 그럼에도 '이성적 자유', 즉 '사회적 자유'에 포획됨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집단적 정치가 존재하고 정치형식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네트워크 사회 또는 리좀 문화가 의미하는 것이 이러한 측면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III. 결론
포스트모던적 삶이라 할 수 있는 도시적 삶을 자유의 재구성적 측면에서 보면 도시적 삶은 자유의 확장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 그 자체의 한계, 그리고 자유에 대한 추구가 어떤 형태의 자유에 대한 추구인가에 따라 다시 한계지워지고 모던(근대성)에 지배되는 현실로 되돌아 온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포스트모던은 단지 근대를 재구성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탈근대 과정에서 기존의 근대성이 가지고 있던 이성은 한 단계 높은 추상적 이성으로 다시 자리 잡고, 모던 시대의 이성은 다시 중세의 신의로 또는 즉자적인 '나'라는 개인으로 또는 자연으로 대체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도시적 삶은 종잡을 수 없는 다양한 잡종적 삶의 모습으로 보여지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는 근대의 이성을 벗어나는 대체물을 찾지 못했다. 현실 속에서 그 대체물을 찾는 과정은 국가를 부정하고 기존의 정치를 부정하는 자율주의 운동 또는 아나키즘적 운동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대체물에 대한 탐구 과정이 탈정치적 분할 지배의 틀과 만날 수 있는 이론적 틀을 제공하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