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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스콧 니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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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미헬스가 '정당사회학'에서 지적했듯이 조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권력화되고 비민주적으로 바뀌는 경향이 있다. 흔히 말하는 조직에는 과두제라는 철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87년 이후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포스트 87체제'라고도 한다. 이 과정에서 사회운동은 끊임 없는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와 투쟁 속에서 민주주의 이행기의 문을 밀어왔고 이제는 민주주의의 공고화 단계까지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니 '민주주의의 위기'니 하는 '위기'담론들이 논의되고 있다. 왜일까? 대선을 앞두고 정치 평가와 함께 위기에 대한 다양한 진단과 대안적 담론들도 오가고 있다. 그러나 위기 담론과 대안들은 항상 국가나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정치, 사회, 경제라는 거시적 차원 속에 머물고 있다.

민주화가 되었지만 우리 일상은 바뀌지 않은 생활들. 운동사회는 그 바뀌지 않은 일상과 함께 조직의 과두제 속에 매몰된 것은 아닌가 싶다. 민주주의의 위기, 시민사회의 위기, 사회운동의 위기는 민주화 이후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운동사회 내부에서 일부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 속에서 자리잡은 비민주적 요소들. 현재 젊은 활동가들이 운동단체에 들어가 힘들어하다가 결국은 지쳐 튕겨져 나오는 이유중 하나이기도 하다. 활동가가 재생산 되지 않는 요인은 외부적 요인도 있지만 이 시점에서 분명 내부적 요인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절차도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고 말도 많고 갈등도 많은 제도이다. 하지만 함께 공존한다는 의미에서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사회운동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절대적인 민주주의를 추동하는 힘이다.

그런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커져만 가는 우리 안의 비민주적 요소들을 찾아볼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일상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족과 조직 속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런 요소들이 있으면 당당히 드러내고 문제를 제기해 바꿔야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아래 글은 많은 공감과 생각을 해보게 하는 글이다. 신영복 선생님께서 가끔 하시는 '처음처럼'이라는 말. 쉬운 말 같으면서도 참 어려운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다가도 항상 처음을 생각해봐야 하고, 끝났나 싶었는데 처음을 돌아보고 처음 처럼 시작해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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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문화가 바뀌어야 할 때 - 목적보다 일상과 인간이 중심이 되는 운동문화 되어야


운동사회가 더 훌륭한 곳이라는 생각 버리자

타고 서울여성의전화 회원 


<시민의신문> 전 사장 이형모씨의 성추행 사건을 계기로, 운동사회의 성폭력이 해결되기는커녕 음모설, 배후설, 명분설 등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문제가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시민의신문>을 운동단체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이견은 있지만, 2000년 ‘여성100인위’가 운동사회의 성폭력을 고발한 뒤 운동사회 내에서 노력해 왔던 반성폭력 운동을 바탕으로 한 가지 고민을 얘기하고자 한다.

우리가 운동사회의 성폭력 사건을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는 다른 일반 직장과 구별되는 두 가지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성폭력 사건이 일어난 조직은 해당 사건을 해결하는 것을 넘어 사건이 일어나는 구조, 배경을 지속적으로 척결하고자 한다. 이 욕망에 힘입어 구조적 해결의 일환으로 각 조직마다 일반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사건해결의 원칙이나 내규를 발전시켜 왔다.

다른 하나는, 운동사회가 더 평등하고, 더 민주적이기 때문에 법에 호소하기보다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대책위나 공대위 또는 진상조사위 등을 꾸려서 내부적 심판기구를 만들거나, 아예 상설기구를 두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는 논란에 휩싸이는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운동사회의 독자적인 움직임은 성과도 있지만 한계도 뚜렷하다. 반성폭력 운동 덕분에 내규를 만들거나, 기구를 두어 성폭력 사건이 더 이상 과거처럼 ‘사건화’도 되지 않는 시절은 지났다. 하지만, 내규와 기구가 있다고 사건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헌법과 법관이 있다고 사건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언제부턴가 운동사회도 사건을 인간의 삶의 문제로 다루기보다 사법부처럼 하나의 사건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일상은 변하지 않고 사건만 처리된다.

이제는 무엇보다 운동사회가 더 훌륭한 곳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운동사회가 성폭력 사건을 잘 해결할 것이라는 생각은 근거가 없다. 이런 믿음 뒤에는 운동조직이 더 평등하고, 더 민주적이며 그래서 더 진보적이라는 생각이 있다. 물론 조직이 표방하는 목표와 한국 사회의 현실을 비교할 때는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조직 안에서는 오히려 반대다. 일상에서는 사회적 명분을 갖는 운동을 한다는 생각 때문에 개인을 희생하는 문화가 여전히 정당하게 인식된다. 그래서 사건이 일어나면 무엇보다 명분의 훼손이나 조직의 앞날을 걱정한다. 이런 관성과 문화 속에서는 운동을 하면 할수록 개인의 주체성은 점점 더 사라진다. 활동을 하면 할수록 ‘나’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조직에 길들여진 ‘나’만 남는다. 어느 순간 개인의 정체성도 사라진다.

일상의 변화, 운동사회 문화의 변혁이 동반되지 않는 한 제자리 걸음일 수밖에 없다. 모든 사회운동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도록 만드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하지만 그 운동을 실천하면서 정작 자신은 상실되어 간다면 앙상한 목적만 남고 조직은 더 이상 삶이 숨쉬는 공간이 아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이 그렇게 되어 버리진 않았는지부터 일상에서 돌아보는 게 필요하다.

켄 로치 감독의 2006년 작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이런 고민을 한번쯤 해본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영화다. 시대와 운동이 만들어낸 숨막히게 잔인한 선택의 순간들을 슬프고도 가슴 아프게 그리고 있다. 목적보다 일상과 과정과 인간이 중심이 되는 운동문화가 만들어져야 비로소 반복되는 파행적 결말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 이 글은 서울여성의전화 소식지 <여성, 그 당당한 이름으로> 83호(12,1월호)에 실린 타고 서울여성의전화 회원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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