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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스콧 니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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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찍기 좋은 곳'이라는 주제의 글들. 재미있고 생각해볼 문제다. 공간이 하나의 장소로 변하는 계기, 나와는 다른 공간일 수 있던 곳이 하나의 의미를 갖는 장소로 변하는 계기는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그 공간을 왜 장소로 만드는 것일가?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하지만 벗어날 수 없음에 대한 무의식이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나의 밖에 있던 공간이 내게 들어와 그 의미를 부여하며 나는 그 장소에 동화되는 계기일 수 있다. 그것은 때로는 잘못된 인식 또는 허구 속의 장소일 수 있다. 공간과 장소에 대한 소외가 일차적으로 발생하고 다시 그것을 찾는 과정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공간과 장소에 대한 소외의 치유일까?

예컨대 '사진찍기 좋은 곳'과 같은 장소들, 아니면 내가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가끔 허영을 부려 찾아가는 여행의 장소들, 그곳은 내 일상의 공간이 아니다. 그렇게 '사진찍기 좋은 곳'이라는 장소는 내 일상에서 벗어난 장소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 속에는 우리 무의식을 반영하는 이미지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내 일상의 공간이 아닌 장소의 이미지는 그 속에 이미 내 허영을 반영하는 이미지들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그 이미지들이 갖는 속성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이미지들이 우리의 삶에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고 싶다. 결국 그런 장소들은 마치 명품에 대한 소비와 같이 동경 속에서 이루어지는 소비대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장소는 문화상품이라는 상품 대상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기사와 블로그들 속에 있는 내용들을 맞춰서 그림을 그려보면 결국 그 장소는 더이상 장소가 아니라 상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 비슷한 곳들...결국 '사진찍기 좋은 곳'이라는 장소는 소비의 결과일 수 있다. 때로는 도시를 벗어나서 그 장소를 찾아가지만 그 곳은 또 다른 형태의 소비와 생산이 이루어지는 노동의 장소일 수 있다. 

그렇게 문화상품에 대한 생산은 소비 속에서 이루지기도 한다. 하지만 생산과 소비가 동일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상품 소유와 상품 소비 간에는 비대칭이 존재한다.

* 또 다른 단상: 우리에게 카메라는 대상을 남기는 생산수단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카메라에 잡히는 대상을 소비할 수 있는 소비수단일 수 있다. 문화의 상품화는 그렇게 생산과 소비수단의 양면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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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할 수 없는, 공간의 미시적 분화
도시의 공간, 그 공간은 보이지 않는 벽으로 나누어진다. 마치 꼴라쥬처럼 덕지덕지 벽 속에 갇혀 하나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물리적 공간의 벽이 아닌 관계적 공간의 벽, 서로 인식하고 소통할 수 없는 벽을 통한 차단. 서로 다른 계급관계들이 동시에 이 좁은 공간에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것도 안전하게...그 속에서 사람들은 위안을 느끼며 살아간다.


[관련연구]
조은진(2007), 상류층 주거지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배제양식 - 강남 타워팰리스 주거 공간 및 공간 경험 분석, <경제와사회> 통권 제76호, 2007. 12., pp.122~163.

이 연구는 최근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고 있는 서울시의 고급 주상복합단지를 특정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분’과 ‘배제’, 그리고 공간의 ‘열림’과 ‘닫힘’이라는 이중적 특성의 맥락에서 분석하고 있다. 특히 2002년 시공 완료 전후로 강한 반향을 일으키며 고급 주상복합 거주지의 대표격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강남의 타워팰리스 단지를 대상으로 이러한 공간 분석을 시도했다. 공간 분석의 과정은 우선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기존 주거 공간과의 구별된 공간적 특성을 끌어내고, 이 공간이 지니는 공간적 상징성, 혹은 상징적 알레고리를 독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의 독해와 함께 그 안에서 실제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시적인 연구를 함께 하여 공간과 공간을 경험하는 사람들, 이 둘 간의 상호적 관련성을 읽어낸다. 전통적인 부자 동네인 평창동, 성북동 단독주택은 높은 돌담을 통해 타 계층에 대한 강한 구분과 배제의 기제를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에 반해 최근 새로운 부촌으로 각광받고 있는 타워팰리스 공간은 아케이드 구조와 주상복합 구조를 기본으로 하여 외관상 ‘열린 공간’이지만, 또한 명확하게 구분되는 ‘그들만의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중정(中庭) 형태의 공간 배치와 주상복합이라는 기본 주제를 바탕으로 주거 공간, 소비 공간, 여가 공간, 자연 공간을 결합시킨 공간 통합의 모습은 과거보다 더 영리하고 효율적으로 다른 이들과 자신들을 구분 짓는 배제의 원리를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열려 있되 닫힌 공간’, ‘보이지 않는 벽’을 통해 그들만의 공간을 견고하게 확보해내려는 시도는 주민 정체성 구현의 방식에서도 외부와 자신을 구분 짓는 외향적 배제의 방식이 나타나는 동시에 특별함, 구분됨의 이미지를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는 방식은 커뮤니티나 사조직, 개인 스스로에 대한 인식 면에서 내향적 배제의 방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연구 과정을 통해 특정 주거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계층 배제 방식의 변화와 그 구체적인 특성을 밝히고 나아가 공간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양식과 공간 인식의 방식을 통해 좀 더 구체적인 수준에서의 공간과 사람 연구를 시도했다. 이는 한국 사회의 불평등과 계층 양극화가 드러나는 한 부분으로서의 주거 공간 문제를 공간 분석의 수준에서 검토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역사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실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실재하는 현상이 있고 역으로 그것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한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에 따라 그 현상이 동일할지라도 그 이면의 실재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개념과 언어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4년전 광화문 집회에서 조세희 작가를 본 일이 있다. 당시 그는 카메라를 들고 집회 차량 위에 올라가 시위대의 모습을 연신 사진에 담고 있었다. 노년의 허름한 차림, 하지만 젊은이들보다  더 치열해 보이던 모습...오늘은 광화문에서 민중 총궐기 대회가 있는 날이다. 오늘도 그를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내가 그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소설을 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87년 시국이 어수선할 무렵. 학교 옆 대학에서는 집회를 하고 거리에는 데모대열이 줄을 잇곤 했다. 최류탄 가스 때문에 선생들도 우리들도 교실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때 처음 최류탄 가스라는 걸 알았다. 선생들은 우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며 집회장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명령을 했다. 물론 갔다 걸리면 각오하라는 협박도 잊지 않았다.

나는 대학 앞 뒷골목 헌책방에 들러 이 책을 집어들었다. 면식있던 헌책방 주인은 내가 소설책을 사면 싸게 주곤 했다. 그냥 싼 값에 사들고 와서 읽었지만, 내게는 참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 삶의 모습들, 그리고 이게 우리네 삶의 현실이구나 하는 생각들.

지금 생각하면 산업화시기나 지금이나 그 삶의 모습들은 변한게 없는 것 같다. 최근들어 그 모습들은 오히려 또렷이 재생산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왜일까?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재생산되고 있는 것일까? 차이점이 있다면 70년대 도시빈민 삶의 시공간과 지금의 차이점은 무엇이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

어쩌면 이 곳의 글들은 또 다른 형식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소설쓰기가 될 수도 있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과 같이 허무주의를 빌어 상징적 의지로 끝을 내는 것이 아닌 또 다른 형식의 소설쓰기.

[관련논문]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연구 - 시간과 공간을 중심으로

프롤로그 III.

도시적 일상 속의 공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공간처럼 여겨지지만 실상 그렇게 자유스럽지만은 않은 공간이다. 아침에 집을 나와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출근길에 올라야 한다. 하지만 출퇴근 시간대, 저 아스팔트 길 위의 모습과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한적한 시간대(모두 일터에 들어가 있는...)의 길 위의 모습은 다르다. 비록 각자 개인들은 자유스럽게 이 공간을 점유하는 것 같지만 시간의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공간은 그렇게 시간에 의해 경계가 재구성되고, 시간의 변화에 따라 동일한 공간이 다른 모습 을 보이며 시간에 따른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시간과 공간의 재구성은 자본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이다. 출근시간대에 출근길에 올라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행을 떠나도 되는 사람이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존 홀러웨이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총체성과 공간적 경계, 그리고 자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의 총체성'은 지구적 (즉 세계적 범위의) 총체성이다. 자본은 본성상 어떠한 공간적 경계도 알지 못한다. 자본주의를 초기의 계급 착취 형태들로부터 구분하는 노동자의 '자유'는 동시에 (훨씬 더 실제적 의미에서) 착취자의 자유이다.(존 홀러웨이, 1999: 183)

착취관계는 공간 속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공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불확정적이며 항상 변화한다. 공간의 절대적 우연성은 화폐로서의 자본의 실존 속에 요약되어 있다. 화폐 자본이 이동할 때는 언제나 (즉, 항상적으로) 자본과 노동 사이의 관계의 공간적 양식이 변화한다.(존 홀러웨이, 1999: 184)
이러한 개별적인 시간의 일상을 모으고 그 속에 있는 공간 속의 자유를 재구성해보면 기든스가 지적하듯이 감옥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의 자유도로 파악될 수 있다. 이에 반해 홀러웨이의 지적은 노동시간이 화폐에 의해 매개되고 자유를 가장한 시장에 의해 착취관계의 공간이 생성된다는, 즉 마르크스의 자본론 분석에서 그 이상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 사회 속에서 작동하는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을 재확인하고 그 내용을 풍부히 하는 것 자체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이후의 문제를 상상하거나 또 다른 대안적 존재의 확인도 중요하다.  

그 이후가 어떤 형태일까? 화폐와 시장이 사라진다고 착취적 공간이 사라질까? 그러나 지금 상태에서 화폐와 시장의 폐지는 공간의 폐쇄를 가져올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공간의 불확정성과 변화를 없앨 수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착취적 관계 구조의 고착화와 사회적 관계의 폐쇄를 가져올 수 있다. 그나마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상의 자유도마저 폐지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기존 사회주의가 가지고 있던 한계들이기도 하다.

이는 화폐와 시장의 성격을 바꿔야 하는 문제, 또는 화폐와 시장 개념의 재구성 문제로 나갈 수 있다. 다른 의미로는 어떤 화폐와 시장인가 하는 대안화폐와 대안시장의 문제로 접근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도시 공간에서 존재하고 활성화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역으로 존해할 수 없는 조건은 무엇인가에 대한 접근과 조사도 필요하다.  

<참고문헌>
존 홀러웨이, "지구적 자본과 민족국가", 워너 본펠드, 존 홀러웨이 편, 이원영 옮김, 1999, [신자유주의와 화폐의 정치], 갈무리.

                   자유의 재구성과 도시의 탈정치적 지배
                                      - 자유의 확장과 도시 소비를 중심으로 -

   
                                                                                                                   송용한


I. 들어가며 - 도시 성격의 변화에 대해
산업화시기 산업도시는 이성적 자유에 기반한 계획도시라 할 수 있다. 그 도시에는 특정의 주류 산업(제조업)이 지배하고 이에 걸맞는 지역적 공간배치가 이루어진다. 그 속에서 일상생활, 즉 사람들간의 관계가 재구성된다. 그러나 지금의 도시, 특히 대도시는 대부분 서비스 산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 속에 다양한 직종과 직업은 도시를 산업도시에서와 같은 일정한 질서가 아닌 무질서해보이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부는 이성이 지배하지 않는, 자유와 방종이 난무하는 모습으로 그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혼란스럽고 제멋대로인 것 처럼 보이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말 이성이 지배하지 않고 자유와 방종만이 난무하는 공간일까? 오히려 이성적 지배의 한계를 넘어서는 과정이고 또 다른 형태의 이성적 지배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미 누군가 이런 생각을 개념과 함께 정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내가 그런 생각의 글들을 만나 함께 고민하고 정리하지 못했다. 다만, 그 전에 지금의 생각들을 정리해보고 향후 이와 관련된 생각들이 어떻게 만날지 상상해 본다.    

II. 자유의 확장과 도시 소비 - 탈정치적 지배
1. 자유의 재구성 - 사회적 자유, 내면적 자유, 자연적 자유
스피노자, 칸트, 헤겔에게 있어 '자연적 자유'는 부정된다. 이 과정에서 '자의(自意)'를 규제하고 '이성적 자유'로서 '사회적 자유'를 체계화한다. 그것의 결정판이 '국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과정은 근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성립과 결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시장이건 계획경제건 이성에 의해 생산과 소비의 통제가 이루어지고 그 속에서 확대재생산과 자본주의적 축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맑스는 국가를 자본주의적 지배 도구로 해석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맑스도 '사회적 자유'를 지향한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한 지류에 놓여 있는 것이다. 레닌도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사회적 자유에 기반한 합리적 소비가 한계에 이르렀을 때 자본주의적 축적은 위기에 이른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이 '자연적 자유'를 다시 복원시키는 과정이고, 이것이 포스트모던과 자본주의가 다시 만나는 지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자유의 중심 축이 '이성'이라는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적 자유'에서 '행위적 자유'와 '내면적 자유'를 중시하는  '자연적 자유'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역에서 생산과 소비의 양식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곧바로 생산과 소비 양식이 재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는 자본주의적 해체과정과 이를 다시 자본주의적으로 재수용하는 과정이 놓여 있는 것이다. 먼저 자본주의적 해체의 사유 과정에 사르트르, 레비나스, 푸코가 있고 좀 더 최근의 선상에 데리다, 들뢰즈 등이 놓여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구체적인 내용은 세부 검토가 필요하다). 문제는 이러한 해체의 과정이 억압에서 자유를 확장하는 형태의 운동으로 나타나지만, 이 과정이 오히려 자본주의적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자유의 주체와 대상의 문제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적으로 보면 즉자존재와 대자존재의 구별과 자유를 '존재하는 무'의 세계로 보는 의 한계일 수 있다. 존재하는 무를 찾아 나서는 끊임없는 관계의 복원과정이 합리적 이성을 뛰어넘는 것처럼 보이지만, 존재하는 무라는 것이 오히려 이성을 호출하고 이성을 강화하고 기존의 이성적 지배를 변형적 지배로 만드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내가 있지만 나도 나를 알 수 없기에 부단히 나를 찾아 나서야 하는 과정이 오히려 이성에 의해 포획되는 기회와 그 틀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2. 도시의 소비와 자유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현대 도시는 자유스럽고 비이성적인 곳으로 보이지만 그렇게 자유스럽거나 비이성적인 곳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기존 이성의 지배가 공고화되고 이를 넘어서는 범위로 자유의 범위를 확장하는 과정에 놓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사회적 자유'에서 '내면적 자유'를 통해 '자연적 자유'까지 범위를 재구성과정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의 소비는 확장되고 재구성된 자유에 따라 다시 분화될 수 있다. 사회적 자유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의 소비, 자연적 자유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의 소비가 존재하는 것이다. 사회적 자유가 허용하는 범위는 산업자본주의적 소비양식, 즉 버는 한도 내에서 소비의 자유가 허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생산으로 선순환되는 합리적 소비가 전제되고 그 소비의 대상과 한계가 정해져 있다. 사치품이 아닌 기본적인 의식주 과정에 대한 소비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레져나 향락성 소비는 또 다른 성격의 자유와 만나는 소비형태가 아닌가 싶다. 그것은 자연적 소비와 그 한계, 즉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지만 나를 찾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 기존의 일상과 만나는 것이다. 구속을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내면적 자유일 뿐이다.

3. 주체의 분할과 탈정치적 지배
이러한 도시적 자유와 소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첫 번째로는 자유가 확장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성적 자유에 의한 억압에서 벗어나 행위적 자유와 내면적 자유라는 자연적 자유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자연, 즉 자연적 자유가 아닌 자연 그 자체로 돌아갈 수 없는 자유 속의 자유, 결국 이성적 자유의 틀 속에서 외연을 확장시키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돈과 시간만 있으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두 번째, 주체의 분할을 의미한다. 특히 내면적 자유가 이성적 자유의 범위 내에서 해소되는 (소비)과정에서 이 분할의 선은 구체화된다. 이종영은 내면성과 내면적 자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내면에 있어 '구속'이 부과되기 전에 존해하는 것은 모든 인간마다 상이한, 개인의 고유한 내면성일 뿐이다. 이 내면성은 온갖 형태의 규정성들이 개입하는 고유한 개인적 체험들의 축적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고유한 내면이 '자유'의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은 1) 그 내면과 대립되는 '외부적 구속'이 부과될 때, 2) 그리고 그 개인이 외부의 구속에 종속됨에 따라 그의 외적 행위가 내면과 분리될 때이다.
사르트르적으로 말하면 대자적 자유 속에서 자기를 대면하고 자기를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내면이 부재하는 '나'라는 즉자적 한계, 결국 '나'를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기를 벗어나는 과정은 개별적으로 분할을 확장시킨다. 그리고 외부의 구속에 종속되는, 즉 소비양식에 지배를 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도시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주체에 의한 다양한 하위문화의 한 측면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체의 분할은 세 번째, 기존 정치의 해체적 분할 지배를 의미한다. 정치체제는 집단적으로 특정한 형태의 '사회적 자유'들만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도시에서 보여지는 자유의 확장과 주체의 분할은 이러한 기존의 집단적 정치를 해체한다. 그럼에도 '이성적 자유', 즉 '사회적 자유'에 포획됨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집단적 정치가 존재하고 정치형식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네트워크 사회 또는 리좀 문화가 의미하는 것이 이러한 측면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III. 결론
포스트모던적 삶이라 할 수 있는 도시적 삶을 자유의 재구성적 측면에서 보면 도시적 삶은 자유의 확장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 그 자체의 한계, 그리고 자유에 대한 추구가 어떤 형태의 자유에 대한 추구인가에 따라 다시 한계지워지고 모던(근대성)에 지배되는 현실로 되돌아 온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포스트모던은 단지 근대를 재구성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탈근대 과정에서 기존의 근대성이 가지고 있던 이성은 한 단계 높은 추상적 이성으로 다시 자리 잡고, 모던 시대의 이성은 다시 중세의 신의로 또는 즉자적인 '나'라는 개인으로 또는 자연으로 대체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도시적 삶은 종잡을 수 없는 다양한 잡종적 삶의 모습으로 보여지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는 근대의 이성을 벗어나는 대체물을 찾지 못했다. 현실 속에서 그 대체물을 찾는 과정은 국가를 부정하고 기존의 정치를 부정하는 자율주의 운동 또는 아나키즘적 운동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대체물에 대한 탐구 과정이 탈정치적 분할 지배의 틀과 만날 수 있는 이론적 틀을 제공하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가을, 요즘은 단풍철이다. 하지만 올해는 날이 더워 아직까지 단풍이 제대로 들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가을 단풍을 보기위해 산으로 향한다.  

한국에서 산이라는 장소, 일상생활속에 자리잡고 있는 참 친숙한 공간이 아닌가 싶다. 특히 한국의 산은 도심 주변에 위치하고 있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소다. 그곳에 가면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계곡도 있고, 준비해온 음식을 모여 앉아 먹을 수 있는 너른 바위도 있다. 때로는 절에 들러 풍경소리를 들으며 명상에 잠길 수도 있다. 그렇게 사람과 산이 함께 하고 있다.

         [도봉산 우이암, 그리고 멀리 보이는 도시의 아파트촌 ⓒ 진욱. 2006.10.28]

어느 외국인은 한국의 산행 열풍이 유럽의 축구 열풍과도 같다는 말을 했다. 즉 한국의 산은 모든 사람들에게 빼 놓을 수 없는 또 다른 휴식공간이기도 하고 문화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특히 도시와 같이 소비만이 강요되는 공간에서 도시 노동자들에게 산은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산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많은 시간과 돈을 들이지 않고 산을 오르며 서로의 살아가는 정감을 나눌 수 있기도 하고 함께 삶을 기획할 수 있기도 하다.

이런 산이 산업화 과정, 그리고 그 이후 우리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해왔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한다. 거칠지만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들은 모임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과, 시대를 거치며 조금씩 변형되고 있다는 점이다.

산업화시기, 회사(공장)나 (사회-노동)운동단체나 산행 모임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있다. 하지만 당시 회사는 동원을 위한 단합의 수단으로, 운동단체 자체가 부정되던 당시 운동 조직은 합법적 모임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지금도 사람들이 모인다는 측면, 특히 자원동원의 측면에서 본다면 둘 다 동일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과 동일하지 않은 차이점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 곳에는 간단하게 현재 모습의 스케치만 남긴다. 우선 외형상으로 차림이 동일해졌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소위말해 좀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등산복을 입지 않고 그저 가벼운 옷차림들이었다. 예컨대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 정도일 거다. 심지어 직장갈 때 차림 그대로 구두에 정장을 입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산에 가보면 거의 대부분 등산복에 등산화 그리고 등산용 가방을 메고 오른다. 등산복 색깔은 남자나 여자나 검은색이 주를 이루고 등산화는 남자는 밤색이나 회색, 여자는 붉은색이 주를 이룬다. 나도 최근에 그 등산복을 샀다.

산에 오르기. 전에는 산에 오르는 초입에 자리를 잡고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요새는 그 노래 소리가 많이 없어졌다. 다만 산을 오른 후 내려와 함께 산을 올랐던 사람들과 간단히 식사를 하고 헤어지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이건 나만이 바뀐 습관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변화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뭏든 다음 산행에서는 이것저것 더 생각해볼 일이다.

생태공원 행사의 글을 읽고 도시에서 공원이라는 공간이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왜 도시에 공원이라는 공간이 생기게 되었는지, 어떤 과정 속에서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그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등.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그 공원이라는 공간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주말에 가족과 함께 공원에 나와 거니는 모습.
실직일 수도 있고 휴일일 수도 있고 외근 중일 수도 있고...자의건 타의건 생산현장 밖으로 나왔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들른 공원.
야근하고 돌아온 남편이 잠을 잘 동안 아이가 울어 남편이 깰까봐 집밖으로 나와 아이를 데리고 공원을 산책해야하는 아내의 모습.
부모님이 모두 일하러 간 동안 친구들과 공원에 모여 농구를 하던 내 어린시절.
아침이면 조기 운동회 사람들이 모여 에어로빅을 하기도 하고 배드민턴을 치기도 하는 모습.
귀에 이어폰을 끼고 혼자 달리는 모습.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들이 혼자 앉아 있는 모습. 
밤에 친구와 이얘기저얘기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

누가 어떤 식으로 어떻게 이용하고 유지하느냐의 문제. 지금까지는 나와 별개의 공간처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닐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 한 번 도시 속의 공원에 대해 짧게라도 정리를 해보고 싶네요. 사회운동이 공유하는 또 하나의 장소-공간.
http://www.srgseoul.org/
공간연구집단은 살 맛 나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소박하지만 강한 희망을 공유하고 있는 모임입니다. 기존의 공간 담론들이 사회의 특정 집단들의 배타적 이익을 숨기기 위해 이용되는 것에 반대하고, 이론과 실천을 아우르는 학문을 탐구하기 위해 1997년에 결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