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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스콧 니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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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할 수 없는, 공간의 미시적 분화
도시의 공간, 그 공간은 보이지 않는 벽으로 나누어진다. 마치 꼴라쥬처럼 덕지덕지 벽 속에 갇혀 하나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물리적 공간의 벽이 아닌 관계적 공간의 벽, 서로 인식하고 소통할 수 없는 벽을 통한 차단. 서로 다른 계급관계들이 동시에 이 좁은 공간에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것도 안전하게...그 속에서 사람들은 위안을 느끼며 살아간다.


[관련연구]
조은진(2007), 상류층 주거지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배제양식 - 강남 타워팰리스 주거 공간 및 공간 경험 분석, <경제와사회> 통권 제76호, 2007. 12., pp.122~163.

이 연구는 최근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고 있는 서울시의 고급 주상복합단지를 특정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분’과 ‘배제’, 그리고 공간의 ‘열림’과 ‘닫힘’이라는 이중적 특성의 맥락에서 분석하고 있다. 특히 2002년 시공 완료 전후로 강한 반향을 일으키며 고급 주상복합 거주지의 대표격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강남의 타워팰리스 단지를 대상으로 이러한 공간 분석을 시도했다. 공간 분석의 과정은 우선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기존 주거 공간과의 구별된 공간적 특성을 끌어내고, 이 공간이 지니는 공간적 상징성, 혹은 상징적 알레고리를 독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의 독해와 함께 그 안에서 실제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시적인 연구를 함께 하여 공간과 공간을 경험하는 사람들, 이 둘 간의 상호적 관련성을 읽어낸다. 전통적인 부자 동네인 평창동, 성북동 단독주택은 높은 돌담을 통해 타 계층에 대한 강한 구분과 배제의 기제를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에 반해 최근 새로운 부촌으로 각광받고 있는 타워팰리스 공간은 아케이드 구조와 주상복합 구조를 기본으로 하여 외관상 ‘열린 공간’이지만, 또한 명확하게 구분되는 ‘그들만의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중정(中庭) 형태의 공간 배치와 주상복합이라는 기본 주제를 바탕으로 주거 공간, 소비 공간, 여가 공간, 자연 공간을 결합시킨 공간 통합의 모습은 과거보다 더 영리하고 효율적으로 다른 이들과 자신들을 구분 짓는 배제의 원리를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열려 있되 닫힌 공간’, ‘보이지 않는 벽’을 통해 그들만의 공간을 견고하게 확보해내려는 시도는 주민 정체성 구현의 방식에서도 외부와 자신을 구분 짓는 외향적 배제의 방식이 나타나는 동시에 특별함, 구분됨의 이미지를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는 방식은 커뮤니티나 사조직, 개인 스스로에 대한 인식 면에서 내향적 배제의 방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연구 과정을 통해 특정 주거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계층 배제 방식의 변화와 그 구체적인 특성을 밝히고 나아가 공간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양식과 공간 인식의 방식을 통해 좀 더 구체적인 수준에서의 공간과 사람 연구를 시도했다. 이는 한국 사회의 불평등과 계층 양극화가 드러나는 한 부분으로서의 주거 공간 문제를 공간 분석의 수준에서 검토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도시의 삶과 비정규 노동, 그리고 그 저항의 징후들
- 복지시설행 증가하는 2030? 젊은 부랑자들? 아니, 아예 복지시설을 점거하자! -



1. 무기력한 젊은 부랑자들?

한국일보(2007. 1. 26)에 실업…신용불량… 무기력 2030 "젊은 부랑자 는다"라는 기사가 났다. 기사 내용은 대개 사실(fact) 그 자체와 그 사실에 대한 해석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기사는 읽다보면 사실 그 자체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고 싶은 생각을 들게 한다.

기사에는 부제를 통해 "복지시설行 증가…퇴소해도 'U턴' 일쑤… 재활 전문 프로그램 시급"이라고 썻지만 나는 차라리 "2030 복지시설行 증가 … 일자리를 찾아도 'U턴' … 재활 전문 프로그램 무용(無用)" 이라고 쓰고 싶다.

처음 기사의 fact를 가지고 이 도시 속의 삶에 대한 자료를 남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기사는 언론이 이 사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 언론의 시각을 학자들이 어떻게 뒷받침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공모 속에서 fact가 우리들에게 어떻게 왜곡되어 전달되는지,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국가는 노동자들의 사회적 저항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등을 생각해보게 한다.

fact는 우리들이 이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 삶을 사회는 어떻게 파괴하고 고립시키며 무력화시키는지 확인해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그 무력함 속에서 나오는 노동에 대한 포기, 그것은 오히려 또 다른 형태의 사회적인 저항인 아닌가 싶다. 


2. 기사의 주요 내용
기사의 주요 내용은 아래 그림과 같이 한 부랑인(?) 시설에 2-30대 입소자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사진: 한국일보, 2007. 1. 26]

그리고 20대 수용자는 정신적, 신체적으로 건강하다는 점이다. 가정 불화나 경제적 문제로 갈 곳을 잃은 경우가 많지만 실업이나 사회 부적응 등으로 복지시설을 찾는 이들도 적지 않다. 취업을 해도 시설을 떠날 생각이 없거나 퇴소한 뒤 금세 되돌아 올 정도로 사회성이 떨어지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부랑인들이 늘고 있는 것은 사회 적응에 실패하고 이탈한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현상과 관련이 있다는 해석이다. 

3. 수용자들의 시각

1) 용어 사용-부랑인, 부적응자, 실패자, 이탈자
매스미디어는 이들을 어떻게 재단하고 있는지, 그 시각을 학자들과 전문가들이 어떻게 뒷받침하고 있는지는 기사에 사용된 용어 그 자체만 봐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기사에 사용된 용어들은 부랑인, 수용자, 부적응, 사회 적응, 실패, 이탈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수용자의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회 속에서 살아보려고 노력하다가 어쩔 수 없어 복지시설에 찾아갔더니 복지시설은 이들을 수용하며 부랑인, 부적응자, 실패자, 이탈자로 취급하고 있는거다.

2) 비정규노동에 대한 차별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싣고 있다.
# A씨는 한창 사회활동을 할 나이에 왜 이 곳에서 허송세월을 하는 걸까. 고졸 학력인 A씨는 스무 살 때 부모로부터 독립했지만 장기간 실업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음식점이나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 돈벌이에 나선 본 적이 없다. 점점 무기력증에 빠진 A씨는 지난해 7월 제 발로 이 곳을 찾게 됐다.

"음식점이나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 돈벌이에 나서 본 적이 없다"는 표현. 아르바이트라고 표현했지만 대부분 비정규 노동의 한 형태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형태는 이 사회 속에서 이렇다 할 돈 벌이가 아닌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을 은폐하면서 차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A의 조건에서 직업을 구하려고 구인란을 뒤져보면 A가 경험한 일 외에 단순 조립공, 술집 웨이터나 바텐더, 텔레마케팅(영업사원), 총무, 운전 등이 대부분이다.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이렇다할 돈벌이인지 모르겠다. 이 사회에서, 특히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A와 같은 조건의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일들의 대부분은 이런 일들인데, 그것이 현실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비정규직으로라도 어떻게던지 살아보려고 노력했는데 이렇다 할 돈벌이에 나서 본 적이 없다니... 그러다 결국 좌절하고 복지시설을 찾은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혼자만의 문제로 그치고 있지 않다. 이 사회는 가족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태로까지 몰고 가고 있다. 이제 가족은 서로 버팀목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은 그 한계점에 다다라 오히려 서로에게 짐이 되고 있는 것이다. 기사에 난 아래의 사례를 보자.

#30대 초반의 B씨도 2005년 부랑인 복지시설을 찾았다. 대학을 졸업한 B씨는 대형 쇼핑몰에서 안전 요원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알코올 중독자였던 동생이 몰래 B씨의 신용카드를 사용해 졸지에 수천 만원의 빚을 졌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B씨는 일자리도 잃고 차압 등으로 갈 곳이 없게 되자 복지시설로 들어왔다.

재기를 모색하며 사회로 돌아갔지만 번번히 적응에 실패하고 입ㆍ퇴소를 3번이나 반복했다. 일자리가 생겨도 월급이 채권자에게 그대로 흘러가는 바람에 빈털터리가 됐다. 점점 사회생활에 적응하기가 힘들어졌고 일할 의욕도 상실했다.


3) 재활과 교육의 대상 - 정신적 재활 능력 부족자?
수용자들의 시각 속에서 나온 대책들은 사회 적응을 위한 재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잇다. 뭐 요지는 정신적 재활 능력을 잃었으니 이를 찾아주고 이와 관련해 사회 적응 프로그램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 적응을 위한 재활 프로그램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20-30대는 교육 과정을 이제야 막 마치고 사회에 나오는 사람들이다. 더구나 이미 고등학교나 대학까지 나온 사람들에게 또 어떤 사회 적응 프로그램이 필요하단 말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배운 교육 프로그램들은 사회 적응에 부적합한 프로그램이었단 말인가? 그렇게까지 무용지물이 될 것을 정말 예측할 수 없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지금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프로그램들은 사회 적응에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응 프로그램이 따로 있는 것인가? 사회가 너무 빨리 변해서 배울 때 시점과 지금 적응 시점의 차이가 있어서 적응이 어렵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4. 기사의 재구성과 재해석
1) 소극적 사회 저항의 증가

나는 '몸과 마음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데도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부랑인 복지시설에서 생활하는 20,30대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는 기사를 나는 재해석하고 싶다. 기사는 젊은 나이에 사회 적응에 실패한 이들에 대한 재활 프로그램이 시급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젊은이들이 적응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적응할 수 없는 사회 구조 속에서 무기력을 통해 이 사회에 저항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저항은 적극적 저항과 소극적 저항을 생각해볼 수 있다. 적극적 저항은 어떤 대상의 불합리한 요구에 대해 받아들일 수 없음을 집단적 또는 개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소극적 저항은 불합리한 요구에 대한 거부를 드러내지 않는 경우, 때로는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실제 결과는 기대하지 않은 결과들을 가져오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만큼 교육열이 강한 나라는 드물다. 쉽게 말해 한국의 젊은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또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입시의 압박 속에서 하고 싶은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 졸업하면 정규직 일 자리가 없어 취업준비를 하며 아르바이트라도 한다. 그래도 정규직이 되기 어려우면 비정규직으로라도 들어가 정규직의 절반밖에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며 일을 한다. 그렇게 생활을 하다가 한계에 다다르고 포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능력 있는 자들은 그것을 실패와 포기로 보이겠지만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소극적 저항이다. 왜냐하면 모두 다 포기를 한다면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그 능력 하나로 포기한 사람들을 다 감당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더이상 그 능력을 자만하며 과시할 대상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극적 저항의 한 형태로 드러내지 않는 경우는 생계형 범죄를 들 수도 있다. 생계형 범죄는 지배자의 입장에서 보면 범죄일 수 있지만 그 당사자는 범죄이기에 앞서 생존의 문제인 것이다. 그 생존을 위해 법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들키지 않는다면 법이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지배자들이야 법이 있어도 법을 어기는 자유를 누리는 판에, 굶어죽지 않기 위해 빵을 훔치는 것이 무슨 죄란 말인가? )

2) 사회적 통제장치의 작동
하지만  복지시설을 찾아오는 젊은이들은 범죄와 같은 식으로 저항하지 않는다. 이러한 형태는 사회적 통제 장치의 틀 내에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푸코의 표현을 빌린다면 사회적 감시장치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결과는 기대하지 않은 결과들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의도하지 않은 수용 대상들이 들어와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복지시설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드러나지 않는 소극적 저항 형태들이 늘었을 것이다. 그리고 경찰 유치장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성인이 아니라면 아마 소년원 같은 곳이 더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학교, (정신)병원 등... 그런데 지금은 그나마 복지시설이 있어 그 곳으로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유럽의 복지제도가 발달한 과정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만일 이러한 시설이 더이상 이들을 수용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기사의 내용과 같이 '사회의 정신적 재활 능력이 부족'해서 복지시설의 예산을 늘리고 전문 상담사를 배치해서 정신적 재활 능력을 심어주고 이들을 사회로 내보낸다고 해결이 될까? 정신적 재활 능력을 가지고 나와도 받아주거 갈 곳이 없는 현실, 그 앞에서 확인하는 것은 소위 말하는 정신적 재활 프로그램들이 허구라는 것이다.

3) 사회적 수용의 한계
이 지점에서 젊은이들이 복지시설에 오게 된 과정들을 되돌아보면 지금의 문제는 사회의 정신적 재활 능력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기사에서도 '몸과 마음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이들이 찾아오고 있다'라고 쓰고 있다. 이는 결국 사회구조적 문제이고 젊은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 수용 능력'이 구조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자리 나눔의 문제와 사회적 분배 구조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다. 이는 노동시장의 문제이고, 현재와 같은 비정규 노동시장 구조로는 더이상 이 사회를 지탱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가 복지시설을 통해 소극적 저항 형태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5. 소극적 저항의 확산과 변화의 징후
하지만 이러한 형태의 저항은 확산하려고 한다고 확산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 내재적으로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징후를 나타내다가 어느 시점 급격히 확산될 수 있다. 물론 조건에 따라 다르겠지만 확산이론에서 S자 곡선은 이러한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수용자들의 시각 속에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소극적 사회 저항을 무능력자, 부랑자, 사회 적응 실패자라고 취급하고 있다.

확산을 막으려고 극단의 경우에는 유럽의 근대화 과정에서 구빈법이 부랑자법으로 바뀌었듯이 악으로 규정하고 범죄자로 몰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그 법들은 대부분 폐지됐다. 일시적으로는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계가 있는 것이다.

결국 나는 '무기력한 젊은 부랑자 증가'를 소극적 사회 저항의 증가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사회에서 수용할 수 없는 상태에 다다르면서 사회구조 자체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6. 사회적 재활프로그램의 대상들
그리고 나는 기사 내용과 같이 세상을 보는 시각들에 대해 화가 치민다. 젊은이들을 점점 무기력증에 빠지게 한 장본인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IMF이후 지금과 같은 정치-경제-법 제도적 변화의 필요성을 부추키고 선전해댄 언론들, 이에 맞장구를 치며 사회를 재단하고 설계한 사람들이 만나는 과정들...  

일반 대중들은 그래도 이들을 믿고 열심히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 삶은 더이상 견딜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 사회를 재단하고 설계해 온 장본인들은 슬쩍 빠져나가며 그 책임을 다시 일반 대중에게 돌리고 있다. 특히 이들은 젊은이들을 무기력증에 빠진 사람들로 평가를 하고 재활 프로그램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재활 프로그램의 대상은 젊은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시각을 가진 자들이 아닌가 싶다.

                  자본의 위기와 그 변화의 징후 - 도시 노숙인
                                         - 왜 도시에는 노숙인이 존재하나?  -


                                                                                                                 
I. 들어가며

신문에 서울시에서 9일 노숙인들의 동사와 안전사고를 막기 위해 오는 15일부터 이듬해 3월15일까지 노숙인 보호대책을 시행한다고 밝혔다. 신문에 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습추위가 시작된 가운데 서울시가 노숙인을 위한 동절기 보호대책을 마련했다.
서울시는 9일 노숙인들의 동사와 안전사고를 막기 위해 오는 15일부터 이듬해 3월15일까지 노숙인 보호대책을 시행한다고 밝혔다.
시는 철도공사, 시민·종교단체, 자원봉사자 등의 협조를 받아 1대1 밀착상담 시스템을 가동키로 했다. 이를 위해 노숙인 상담반을 11개조 62명으로 대폭 늘렸다. 상담반원들은 서울역, 영등포역, 용산역, 청량리역 등 노숙자 밀집지역을 24시간 누비며 보호시설 입소를 적극 유도할 계획이다. 또 손전등과 담요, 보온통 등도 준비해 필요할 때 제공한다.
노숙인을 위한 무료진료소도 서울역 앞에 설치된다.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30분까지 공중보건의, 간호사, 사회복지사가 무료 진료를 펼칠 예정이다. 이뿐만 아니라 거리의료상담반도 운영, 노숙 밀집지역을 돌며 의료상담 서비스도 지원한다. 시는 특히 일자리 제공 등 자활프로그램을 확대하기로 했다.
올해부터 시작한 일자리 제공 사업과 특별자활사업을 늘려 모두 2840명에게 근로기회를 제공한다. [서울신문 2006-11-10 09:03]
서울시가 가만히 손놓고 있는 것보다야 잘한 일이지만 사실 씁쓸한 기사다. 이 기사는 우리가 우리 사회 자체를 보는 시각과 그 속에서 나오는 현재의 복지정책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사다. 나라마다 처지가 다르고 그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있는거라고 말하면 더 할말은 없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스스로의 무능함과 한계에 대한 합리화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것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 무능함과 한계에 대한 합리화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사실 여기에는 첨예한 시각대립이 존재하고 있다. 그 하나는 대중들에게 그 책임을 돌리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책입안자들과 같은 지배자들과 그 지배연합에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사회운동이 존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논의는 이 글의 범위를 넘는다.

간단히 말하면, 예컨대 집을 몇 채씩 소유한 사람들의 집을 제한하고, 도시에 빈 집들에 노숙인들이 들어가서 살 수 있게 하고, 사회적으로 노동시간을 대폭 줄여 일자리를 나누자는 운동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려운 것은 국가가 이를 시행하려고 해도 개인(사유재산)의 자유를 국가가 제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국민들이 이를 원하지도 않는다는 견해다. 그리고 대중들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져 있기에 경쟁을 통해 또 다른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지배자들이 한편으로는 대중의 눈을 멀게하고, 이를 이용하면서 지배를 지속시키는 술수에 불과하다는 견해가 있다.

나는 운동의 입장에서 지배자들과 지배연합의 논리가 허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프랑스나 북유럽 사민주의 국가를 설명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 같은 영미식 국가가 왜 양극화가 심화되는지 설명할 수도 없다. 여기서는 다만 도시 노숙인에 대해 생각해 볼 문제점들에 대해 정리를 해보고 싶다.

II. 도시 변화의 징후-노숙인 문제
1. 현재
어느 도시에나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노숙인들이 존재하고 있다. 왜 도시에 노숙인들이 존재할까? 그것이 가능한 조건은 무엇인가? 단순히 주거공간이 없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주거 공간이 생긴다면 노숙인이 없어질까? 오히려 먹고사는 문제를 도시의 거리에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거리에서의 구걸행위, 소매치기, 시민에 대한 위협, 그리고 구호센터의 지원...하지만 일자리 제공과 자활프로그램? 근본적인 해결책일 수 있다. 하지만 현재 노숙인의 문제는 그 일자리로부터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과정에서 나온 문제이다. 그런데 어떻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자활프로그램을 실시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사회 구조적인 변화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그런데 도시마다 노숙인들의 존재 양태가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시마다 사회적 부의 분배 정도가 다르기 때문일까? 즉 거리로 나앉지 않을 정도로 도시민들 모두 먹고 살 정도가 되기 때문일까? 아니면 푸코의 말처럼 시민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시설(보호시설, 자활시설, 감옥, 병원 등)에 감금을 당한 것일까? 그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존재양태가 자본의 확대재생산 과정에서 야기되는 위기국면과 이것에 대한 징후, 그리고 그 조절양식의 상이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사회적 관계의 해체를 통한 자본주의적 생산구조에 대한 결과가 오히려 사회적 책임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닌가?

2. 과거
역사 속에서 노숙인은 사회적으로 어떤 식으로 존재해왔으며 어떻게 다루어졌을까? 노숙인은 자본주의 시대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자본주의 이전에 노숙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마찬가지로 그 조건은 무엇인가? 존재했다면 노예제, 봉건제 사회에서 노숙인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3. 미래
자본의 시대가 끝나고 나면 노숙인은 없어지는 것일까? 자발적 노숙인조차도 없는 사회가 가능할까? 자발적 노숙인이 존재한다면 그 조건과 의미는 무엇일까? 역으로 불가능 하다면 그 조건과 의미는 무엇일까? 또 다른 형태의 사회적 감금을 의미하는 것일까?


4. 노숙인의 문제는 역사 속에 존재하는 지배적 생산양식과 그에 따른 사회적 지배, 그리고 그 변화의 징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다시말해 노숙인 문제는 지금 이 시대, 자본의 위기를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것은 사회적 연대(운동)와 지배의 문제로 다시 연결되는 것은 아닌가?

III. 최근 선행연구 결과

노숙인 인권침해 실태는 각 영역에서 다차원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동시에 각각의 요소가 상호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거리 생활에서 불규칙한 식사와 영양 및 수면부족이 건강권을 위협하고 또한 이러한 문제들은 적절한 주거생활이 보장되지 못함과 연결되어 있었다. 주거 생활은 취업 및 노동권과 연결되어 있고, 안정적 노동을 통한 소득의 획득이 이루어지지 아니함으로써 주거 불안정과 연관되어 있었다(정원오 외, 2005:13).

노숙인의 주거권 문제는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노숙인은 곧 주거권이 보장되지 못한 집단이며, 그 원인이 경제적 문제이든, 실업의 문제이든, 혹은 정신질환의 문제이든, 노숙상태로 떨어지는 근본적인 원인은 다양하지만, 노숙생활의 직접적인 이유는 주거 곤간이 없다는 점이다(정원오 외, 2005: 15).
정원오 외, '2005년 인권상황실태조사 연구용역보고서 - 노숙인 인권상황 실태조사', 국가인권위원회,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