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투데이 - 도시의 삶과 노동, 그리고 민주주의 : 위치로그 : 태그 : 방명록 : 관리자 : 새글쓰기
워킹투데이 - 도시의 삶과 노동, 그리고 민주주의 블로그에 오신것을 환영해요^^
생각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스콧 니어링
47
44
181898
'도시'에 해당되는 글 27건
  1. 2010/04/05 도시의 기억과 부풀려진 허구 (1)
  2. 2010/01/14 기득권층에 의해 백지화된 행정부처의 세종시 이전 문제 - 오히려 국회와 청와대 이전이 대안이 아니었을까? (1)
  3. 2009/12/23 승자도 패자도 없는 도박중독 사회와 도시
  4. 2009/12/14 짐멜, 메트로폴리스와 정신적 삶
  5. 2009/09/18 [연극] 오늘, 손님 오신다
  6. 2008/10/21 도시 비정규노동자의 삶과 고시원 살인방화
  7. 2007/08/02 겨울철쭉의 독서일기 -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도시와 그 시민에게 미치는 영향"
  8. 2007/07/09 [교수신문] [기획 _ 도시연구 현황과 쟁점] ④ ‘건축’으로 본 도시 - 위태롭고 지루한 풍경…상상력의 빈곤
  9. 2007/06/23 [교수신문] 기획 _ 도시연구 현황과 쟁점 ② 도시공간의 정치경제학
  10. 2007/06/18 [교수신문] [기획 _ 도시연구 현황과 쟁점] ① 도시사 / 도시공간, 역사행위 주체·구조로 바라보기
  11. 2007/01/27 도시 삶과 비정규 노동, 그리고 그 저항의 사회적 징후들 - 무기력한 젊은 부랑자들? (1)
  12. 2007/01/19 네그리의 '제국'에 대한 단상
  13. 2006/12/10 현대 도시 속의 삶...
  14. 2006/11/22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속의 도시 공간과 시간, 그리고 재생산
  15. 2006/11/21 공간적 양식의 변화와 자본과 노동 사이의 관계
  16. 2006/11/16 지역구조나 일상생활의 형성 조건과 지역 정치경제학적 접근
  17. 2006/11/10 자본의 위기와 그 변화의 징후 - 도시 노숙인
  18. 2006/11/03 자유의 재구성과 도시의 탈정치적 지배
  19. 2006/11/03 영문 참고문헌 - Understanding the Post-Industrial City
  20. 2006/11/03 영문 참고문헌 - Industrial and Post-Industrial Cities
  21. 2006/11/03 Cultural Clusters and the Post-industrial City:
  22. 2006/10/30 도심 주변의 산과 문화, 그리고 가을 산행
  23. 2006/10/26 도시에서 공원이라는 장소(공간)이 갖는 의미
  24. 2006/10/25 Matt의 서울(한국) 기행 - Gusts Of Popular Feeling (3)
  25. 2006/10/24 한국 참고문헌 (1)
  26. 2006/10/24 영문 참고문헌 - Labour Geographies
  27. 2006/10/24 한국도시연구소
우연히 'KBS 다큐멘터리 3일'을 보다. 가끔 보는 프로그램이지만 어제 방영한 '도시의 기억 - 서울 장사동 기계 공구 골목 72시간 ' 이라는 프로그램은 최근 본 다큐 중 가장 재미있게 봤던 프로그램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은 나중에 사료로의 가치가 더 클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내게 시간이 허락된다면 이 프로그램과 같이 도시라는 장소 속에서 만들어지는 삶의 모습과 기억들을 정리해보고 싶다.

먼저 도시 속의 삶과 노동을 끄집어 내는 시각과 그걸 보여주는 방식이 건강하다는 생각이다. 지금까지 방송에서는 대부분 도시의 삶과 노동을 깔끔한 정장차림의 화려한 모습만 보여주곤 했다. 한마디로 부풀려진 허구다. 그리고 이러한 부풀려진 허구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정상과 비정상에서 정상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게 해왔다. 하지만 그런 걸 볼 때마다 사람들은 한편으로 소외를 느낀다. 그리곤 삶을 오히려 고달프게 만든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서는 가끔 허구를 벗는다. 이번 프로그램이 그런 모습 속에서 따뜻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이와 관련해 향후 쓸 수 있는 자료들을 추려서 남기다.  
[KBS 다큐멘터리 3일] - 도시관련 방영 프로그램 리스트 




얼핏 고종석이 쓴 '도시의 기억'이라는 책이 생각난다. 딱히 재미있는 책은 아니다. 읽다보면 고종석이 방문한 도시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그가 방문한 도시에 대한 그의 상식을 읽고 있는 기분이다. 뚝뚝 묻어나는 그의 상식과 교양이 오히려 허영같기도 하고 거부감이 들기도 하던 책이다. 하지만 서문에 그가 남긴 몇 마디에는 수긍이 간다.


도시들은 닮았다. 그러나 닮았으면서도 엄연히 다르다. 그 다름은 오래된 건축물이나 박물관의 유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다름은 비슷한 듯 보이는 일상 속의 도시인들, 그 시민들의 '영혼'속에도 있다. ... 그것은 그 도시들이 제가끔 겪은 역사의 중량 덕분이다. 역사의 울타리 속에 간직된 그 고갱이가 서울을 서울로 만들고, 서울 사람을 서울로 만든다. 나는 세계화로 환원되지 않는 그 고갱이를 그 도시의 '영혼'이라고 부르려 한다.
그러니, 영혼은 촌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시에도 있다. 사람들이 파리에서 무수한 화가들을 떠올리고 빈에서 무수한 음악가들을 떠올리는 것은 상투적인 만큼이나 정당하다.

*고종석(2008), 도시의 기억, 개마고원, pp.16-17.



I. 세종시 발전방안
행정부처 세종시 이전 전면 백지화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나는 한마디로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층이 민주주의라는 형식을 빌어서 정치-경제-문화-사회적 권력 독점의 분산을 거부한 결과라고 평가하고 싶다.

II. 원안 축소 속에 나타난 발전방안
이번 2010년 1월 11일 발표한 아래 발전방안을 살펴보면 지난 2007년 7월 19일 발표한 원안과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번 발전방안은 원안을 축소하여 발표하는 한편 기존 원안에 있던 부차적인 내용들을 확대하여 발표하고 있다.

이번 발전방안에서는 원안이 '행정기능(+복합기능)'으로 표기하고 발전방안에 '산업,대학,연구기능'으로 변경한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원안의 복합기능에는 이미 산업, 대학, 연구기능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용인구도 이번 원안에는 8.4만명, 발전방안 24.6만명으로 정리하고 있지만 2007년 원안에는 20만개의 일자리를 갖춘 자족도시로 그리고 있다. 총인구 또한 이번 발표의 원안에는 17만명 발전방안에는 50만명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2007년 발표 원안에는 2030년까지 50만명의 복합기능도시로 발표했다.

투자유치도 이번 원안발표에는 9부 2처 2청으로 표기하고 발전방안에는 정부이전은 빼고 투자유치와 투자 기업들을 나열하고 있다. 그러나 2007년 원안에는 12부 4처 2청 이전과 자족도시 건설을 목표로 했다. 즉, 투자 유치 기업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번 발전방안과 같이 기업을 나열하는 식으로 발표하지는 않았다. 원안에서 상수는 행정부처 이전이고 변수는 그에 부수적으로 기업투자 유치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2007년 발표, 세종시 이전 원안]
이용섭 장관, "세종시, 국토균형발전 선도할 것" [정책포털 공감코리아] 2007.07.19
모두가 행복한 도시…‘세종시’ 착공 [정책포털 공감코리아] 2007.07.19

[2010년 발표, 세종시 이전 원안 및 발전방안]
세종시, 인구 50만 미래형 첨단경제도시 건설 [정책포털 공감코리아] 2010.01.11
세종시 발전방안 보도자료 [정책포털 공감코리아] 2010.01.11

구 분

원 안

발 전 방 안

도시성격

행정중심복합도시

교육과학중심의 경제도시

자족용지

6.7% (486만㎡)

20.7% (1,058만㎡)

주요기능

행정기능 (+복합기능)

산업·대학·연구기능

투자유치

9부 2처 2청

과학벨트, 삼성, 한화, 웅진, 롯데, SSF 사 등

투자규모

8.5조원 (재정)

16.5조원 (재정 8조원 + 과학벨트 3.5조원 + 민간기업 4.5조원)

고용인구

8.4만명

24.6만명 (원안의 약3배)

총인구

17만명

50만명

인센티브

없음

맞춤형 부지공급, 세제지원, 규제완화 등

도시인프라

2030년까지 단계적 개발

2020년까지 집중개발

III. 정치-경제-사회적 권력 독점과 지역 불균형 발전
권력은 단순히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 문화의 영역에도 존재한다. 그리고 각 영역은 서로의 권력을 공유한다. 대부분 이러한 권력은 도시에 집중된다. 문제는 이것이 한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때 권력의 독점이 강화되고 이를 누리는 기득권층과 이로부터 배제된 층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불균형적인 지역발전의 원인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특히나 서울을 중심으로 수도권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다는 문제가 있다.

서울에서 수도권(고속도로를 타고 용인쯤)만 벗어나면 대부분 비슷비슷한 모습이다. 시골도 아니고 번화한 도시도 아니고 모두가 어중간한 시골도시들 뿐이다. 지역 불균형발전...막상 지역에 내려가서 살려고 해도 딱히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정치라는 것도 지역 토호들 중심이고 누릴 수 있는 문화도 없다. 읍으로 나와야 있는 문화시설이라고는 술집과 몇 개 노래방들뿐... 그래서 이래저래 서울로 올라온다.

이러한 지역불균형 발전에 따른 문제의 해결방법 중 하나가 행정부처의 세종시 이전 방법이 아니었나 싶다. 쉽게 생각하면 행정부처 이전, 즉 수도권에 독점되어 있는 정치,경제,문화적 권력 중 정치 영역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행정부처를 옮기는 거였다. 하지만 이러한 해결책은 근본적으로 본다면 미봉책이었다. 보다 근본적이라면 오히려 정치권력의 핵심인 국회와 청와대를 이전하는 것이 맞다. 즉, 행정부처의 세종시 이전은 국회와 청와대 이전에 대한 차선책으로 나온 대안이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안책마저도 기득권을 누리던 기존 계층은 거부하기 마련이다. 기존에 누리던 혜택을 잃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수도권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존에 누리던 권력 형태의 분산과 이전을 원하지 않는다. 결국 현재 세종시 행정부처 이전문제의 백지화는 이러한 권력 분산을 기득권 세력, 특히 서울과 수도권에 거주하는 기득권층의 반대에 기반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IV. 여론조사? 여론조작?
지금은 행정부처 세종시 이전 전면 백지화를 놓고 시끄럽지만, 오히려 국회와 청와대 이전문제를 논의해야 하는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은 기존의 행정부처 이전 문제마저도 백지화하고 이에 대한 합리화와 여론몰이 작업을 하고 있다. 의도된 여론의 변화 작업, 즉 새로운 안이 경제적으로 더 발전적이고 자족적 모습을 갖추었다는 인상과 여론작업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여론조사도 발전방안 지지로 바뀔 것이다(장기적으로 봐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에서 세종시로 국회 이전이나 청와대 이전 논의는 앞으로 나오기가 더 힘들다. 기존에 나왔던 논의는 물론 반대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녹색뉴스포털 그린투데이 GT! :: “국회 세종시 이전 반대 43%”

특히 여론조사는 수도권 거주자라는 기득권층의 여론이 반영되고 이는 행정부처 이전의 백지화마저도 정당화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 결국 정치적으로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빌어 세종시 행정부처 이전안의 백지화가 향후 충분히 관철될 수 있다.

세종시,여론 봐가며 진행”..법령 제·개정엔 ‘신중모드’ 파이낸셜뉴스 경제 2010.01.13 (수)

이 과정 속에서 정치적으로는 한나라당 내에서 박근혜의 백지화 반대와 이명박의 백지화와 수정안이 대결 구도를 달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이나 진보신당, 민노당 등의 반대안은 박근혜의 논의와 차별점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단지 박근혜 반대안의 언저리 정도로 자리잡고 있다. 일면 한나라당 내의 분열로 보일 수 있지만, 이는 결국 한나라당 내에서 세종시 행정부처 이전안의 찬성과 반대라는 정치적 의제를 모두 잡고 있는 형국이다.  

[세종시 신안(新案) 발표 이후] 청와대, 박근혜 발언 시점에 주목 중앙일보 정치 2010.01.14
[세종시 수정안 이후] 박근혜 잇단 ‘쐐기’ 친박 표단속 서울신문 정치 2010.01.14 (목)

아무튼... 여론조사의 표본구성을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다. 이번 여론조사는 표본구성에 대한 발표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표본이 지역 거주비율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면 여론조사의 표본 중 수도권 거주자가 많이 포함된다. 이러한 상태에서의 여론조사 결과, 즉 수도권 거주자라는 기득권층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는 여론조사는 행정부처 백지화안에 대한 찬성 비율이 높을 것을 어느정도 예측할 수 있다.

이 지점은 여론조사라는 형식을 통해 여론조작으로 이어질 수 있다. 즉, 지역에 따른 거주자 비율로 표본을 설정해 여론조사를 하면 인구밀도가 높은 수도권을 중심으로 발전방안에 대한 높은 찬성률이 나올 수 있고, 지역별로 동일한 수로 표본을 구성해 여론조사를 하면 발전방안에 대한 높은 반대결과가 나올 수 있다.     

[세종시 수정안 이후] 안갯속 여론… 같은 조사기관도 수정안 지지 7%P차 서울신문 사회 2010.01.14 (목)
충청민 64% "세종시 원안 고수" 충청일보 정치 2010.01.13 (수)

승자도 패자도 없는 도박중독 사회와 도시



1. 도박중독 사회

요즘은 한국사회 전반이 이미 도박중독사회 또는 투기사회로 변했다는 생각이다. 잠정적으로 나는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는 사회적 원인이 한국사회의 1) 급격한 산업화 경험과 2) 개발주의 속에서 형성된 3) 천민 자본주의적 성향, 그리고 4) 도시적 삶의 양식들이 결합한 결과라는 생각이다. 구체적인 분석은 해봐야 하겠지만, 이는 결국 계급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

마침 어제 <MBC 프라임>에서 '위험한 행운' 이라는 주제로 도박중독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주요 내용은 '한국의 경우 도박중독 유병률 9.5%로 18세 이상 성인 10명 중 한 명이 도박중독이며, 도박중독은 가족 해체와 각종 범죄로 이어지고 있으면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체계적인 도박중독 예방과 치유가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방송에서는 도박은 개인의 문제, 마음만 먹으면 고칠 수 있는 나쁜 습관으로 여기지만 도박중독은 일반인에 비해 인지능력이 떨어지고 충동조절 장애를 수반하는 질병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도박중독의 예방과 치유를 위해서는 외국과 같이 사행사업자가 책임져야 한다는 제언을 하고 있다.

방송내용에 따르면 도박중독의 원인은 결국 개인들이 경험한 '위험한 행운'이고, 그 속에서 도박중독이라는 질병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박중독자의 증가가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키기 때문에 이를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책임의 주체는 사행사업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질병차원에서 보고, 개인에 대한 사회적 질병퇴치 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거다. 이런 걸 사회병리학적 문제설정이라고 하나?  참...중세시대적 발상이지만 대부분의 정부정책, 또는 복지프로그램, 사회운동이란 게 이런 식이다.

2.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도박
하지만 왜 문제 설정을 이렇게 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사회에서 도박은 일부의 사회적 문제도 아니고 개인의 병적인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문제설정이 빗가간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나마 MBC니까 이런 식으로라도 프로그램을 만들고 방송하지 싶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뒤르켐이 자살을 사회적 현상으로 보고 '자살론'을 통해 자살의 사회적 원인과 유형을 분석하고 자살의 일반적 성격을 도출하고 있다. 뒤르켐도 사회병리학적 관점에 있지만, 차라리 뒤르켐 같이 한국사회에서 도박중독 현상도 사회적 현상으로 보고 도박의 사회적 원인과 유형을 살펴봤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으면 왜 한국사회에서 도박과 같은 사행사업이 성장하고 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그러한 원인을 MBC 프라임에서와 같이 '불행한 행운'이라는 식으로 개인에게 돌리는 것에서 한 발 더 나간다면 기껏해야 정부 정책으로 돌리는 거다. 물론 한국의 사행사업은 2000년 이후 기존의 경마(1922년)와 경륜(1994년) 외에 카지노(2000년), 스포츠토토(2001년), 로또(2002년), 경정(2002년), 메인카지노 개장(2003년) 등 새로운 업종의 도입과 사행성 게임물 양산 등으로 인해 증가한 측면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원인을 돌리다보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설명하지 못하는 게 너무 많다. 예컨대 왜 우리 애들이 특목고를 가고 좋은 대학을 가려고 하는지, 왜 친구들이 조금이라도 돈이 있으면 주식과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려야 하는지, 왜 88만원 세대가 몇 백대 일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지...좋은 말로 노력의 결과를 얻기 위한 투자로 생각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한다. 하지만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이는 또 다른 형태의 로또 잡기의 한 형태라는 걸 서로 잘 알고 있다.

3. 아이러니
로또 잡기의 사회적 게임에서 성공하면 승자winner고 실패하면 패자looser다. 대부분이 실패하지만 간혹 작은 성공의 경험들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크게 성공하는 케이스는 꼭 있다. 이런 성공신화가 없으면 도박중독 또는 투기사회를 유지시킬 수 없다.   

아무튼...이렇게 삶의 로또를 잡으려는 우리들의 삶을 단순히 기회주의적이고 이기적으로만 볼 수 있을까? 그리고 승자와 패자로만 나눌 수 있을까? 어쩌면 팍팍한 이 한국 사회에서 모두다 따뜻한 꿈을 이루려 똑같이 몸부림 치고 있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사실 그 속에서 누구도 승자도 패자도 없다. 아이러니한 건 그 속에서 자신을 억제하고 서로를 타자화하며 사회적으로 서로를 죽여가고 있을 뿐이다. 각자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사회적으로 구멍이 나고 있는 거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자본주의 경제에서 '구성의 오류'The fallacy of composition가 나타나고 있는 거다.

[관련기사]
한국사회, `한탕주의'만 커간다 연합뉴스 경제 2010.06.10 (목)



짐멜, 메트로폴리스와 정신적 삶


짐멜의 '메트로폴리스와 정신적 삶'(Georg Simmel, "The Metropolis and Mental Life")을 만났다.  왜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삶의 모습이 계산적이고 까칠할 수밖에 없나를 맑스나 베버와 같은 고전사회학자들보다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도시적 삶의 자유와 노동의 분화,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보여지는 삶의 태도들. 어쩌면 이 도시에서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서로를 그저 '일반화된 타자'로 여기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일종의 자기방어적 삶의 모습이다. 짐멜은 이러한 우리들의 삶의 모습들을 구태여 미워하거나 서운해하지 말자는 거다.

사회학에서는 맑스, 뒤르켐, 베버의 저작을 고전으로 삼기도 한다. 여기에 짐멜의 저작도 사회학적 고전의 반열에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짐멜의 저작은 맑스, 뒤르켐, 베버의 저작과 같이 체계적인 분석 속에서 이루어진 저작이 아니다. 짐멜의 저작은 대부분 article형태로 전체적인 사유체계는 글 속에서 유추해야 한다. 읽다보면 맑스, 베버, 뒤르켐의 사유들을 넘나들게 하며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게 짐멜이 갖는 힘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쉬움도 남는다. 하지만 체계적인 분석을 했다면 어땠을까? 오히려 지금보다도 뒤안길에 머물고 있을지도 모른다.

짐멜의 저작은 맑스의 사고와 유사하면서도 맑스가 분석하지 않은 지점을 건드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맑스는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의 생산에 중점을 두고 있다면 짐멜은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의 소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지점은 맑스의 '자본론'에서 상품과 화폐분석이 짐멜의 '돈의 철학'과 만나게 한다. 맑스는 물질적 생산 속에서 소외를 도출하고 이를 정신적 소외와 연결시킨다. 하지만 짐멜은 물질적 소비 속에서 소외(돈의 철학)을 도출하고 정신적 소외와 연결시키고 있다.

물질적-정신적 생산과 소비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동떨어질 수 없는 구조다. 헤겔과 맑스의 변증법은 이러한 물질적-정신적 생산과 소비가 서로 순환하며 재생산하는 관계 구조에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헤겔은 정신에, 맑스는 물질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다. 맑스는 물질적 생산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문화를 '(임금노동, 상품형태와 같은) 관습적이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을 자연적이고 불가피한 것으로 보이게끔 하는 것'으로, 실재에 대한 잘못되고 왜곡된 관점을 만들어내는 '허위의식'으로 보고 있다. 즉, 이데올로기적 지배를 위한 수단일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맑스의 분석은 기존 부르주아적 문화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을 뿐 노동자문화에 대한 분석은 하지 않고 있다. 적어도 맑스의 이론틀에서 보면 더 상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생산을 사회적 생산이라는 틀 속에서 분석하는 맑스의 틀에 의하면 문화도 사회적 생산과정에 의해 이미 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사회적 관계에서 소외되었건 아니면 지배자에 의해 전유되었건 문화 생산은 이미 사회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질적 생산과 정신적 생산, 그리고 그 소비를 통해 재생산되는 물질적 생산과 정신적 생산의 관계에 대한 분석의 결여는 베버의 계층구조에 의해 재구성되고 유형화되며 대체되었다. 하지만 베버의 저작에서는 물질적 생산과 정신적 생산, 양자의 규정관계를 모호하게 분리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는 파슨스의 이론으로 연결된다. 이에 반한 글들로 E.P Thompson의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이나 P.Bourdieu의 글들이 있지만 일반이론적 시도로 연결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이론적 공백 속에서 서비스사회로의 사회구조 변화와 문화산업 확대는 향후 베버와 파슨스의  이론에 기반한 사회학 이론들이 지금보다 힘을 얻고 득세할 수 있다.  

짐멜의 글도 베버나 맑스와 같이 사회구조를 도출하거나 거시 사회이론적 구축을 시도는 하지 않는다. 또한 물질적 생산과 정신적 생산의 규정관계를 도식적으로 구분하거나 유형화하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그 글들 속에 있는 단편적인 분석들은 오히려 거시 사회학 이론이나 사회학일반이론 차원으로 끌어올려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다. 이와 함께 예전에 남겼던 내 생각의 단편들(2006/11/03 자유의 재구성과 도시의 탈정치적 지배 )과도 연결해 봐야 할 것 같다. 




소통할 수 없는, 공간의 미시적 분화
도시의 공간, 그 공간은 보이지 않는 벽으로 나누어진다. 마치 꼴라쥬처럼 덕지덕지 벽 속에 갇혀 하나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물리적 공간의 벽이 아닌 관계적 공간의 벽, 서로 인식하고 소통할 수 없는 벽을 통한 차단. 서로 다른 계급관계들이 동시에 이 좁은 공간에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것도 안전하게...그 속에서 사람들은 위안을 느끼며 살아간다.


[관련연구]
조은진(2007), 상류층 주거지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배제양식 - 강남 타워팰리스 주거 공간 및 공간 경험 분석, <경제와사회> 통권 제76호, 2007. 12., pp.122~163.

이 연구는 최근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고 있는 서울시의 고급 주상복합단지를 특정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분’과 ‘배제’, 그리고 공간의 ‘열림’과 ‘닫힘’이라는 이중적 특성의 맥락에서 분석하고 있다. 특히 2002년 시공 완료 전후로 강한 반향을 일으키며 고급 주상복합 거주지의 대표격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강남의 타워팰리스 단지를 대상으로 이러한 공간 분석을 시도했다. 공간 분석의 과정은 우선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기존 주거 공간과의 구별된 공간적 특성을 끌어내고, 이 공간이 지니는 공간적 상징성, 혹은 상징적 알레고리를 독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의 독해와 함께 그 안에서 실제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시적인 연구를 함께 하여 공간과 공간을 경험하는 사람들, 이 둘 간의 상호적 관련성을 읽어낸다. 전통적인 부자 동네인 평창동, 성북동 단독주택은 높은 돌담을 통해 타 계층에 대한 강한 구분과 배제의 기제를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에 반해 최근 새로운 부촌으로 각광받고 있는 타워팰리스 공간은 아케이드 구조와 주상복합 구조를 기본으로 하여 외관상 ‘열린 공간’이지만, 또한 명확하게 구분되는 ‘그들만의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중정(中庭) 형태의 공간 배치와 주상복합이라는 기본 주제를 바탕으로 주거 공간, 소비 공간, 여가 공간, 자연 공간을 결합시킨 공간 통합의 모습은 과거보다 더 영리하고 효율적으로 다른 이들과 자신들을 구분 짓는 배제의 원리를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열려 있되 닫힌 공간’, ‘보이지 않는 벽’을 통해 그들만의 공간을 견고하게 확보해내려는 시도는 주민 정체성 구현의 방식에서도 외부와 자신을 구분 짓는 외향적 배제의 방식이 나타나는 동시에 특별함, 구분됨의 이미지를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는 방식은 커뮤니티나 사조직, 개인 스스로에 대한 인식 면에서 내향적 배제의 방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연구 과정을 통해 특정 주거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계층 배제 방식의 변화와 그 구체적인 특성을 밝히고 나아가 공간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양식과 공간 인식의 방식을 통해 좀 더 구체적인 수준에서의 공간과 사람 연구를 시도했다. 이는 한국 사회의 불평등과 계층 양극화가 드러나는 한 부분으로서의 주거 공간 문제를 공간 분석의 수준에서 검토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도시 비정규노동자의 삶과 고시원 살인방화

송용한

1. 내 스스로 위안이라도 해야하나?
고시원 살인방화와 관련된 기사가 사회면 일면을 장식하고 있다. 이럴땐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우선 죽은 사람들에게 애도의 마음을 전해야할 거다. 그리고 방화범에 대한 생각에 앞서, 이 사회 속에서 나의 무력감을 느낀다. 이번 고시원 방화사건은 어쩌면 우리들이 느끼는 이 무력감에 대해 표출되는 한 개인의 사회적 저항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극단적 행위에 대해 일부 언론에서는 "고시원 살인·방화는 '반사회성인격장애'의 전형"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경찰에서는 정신병적인 증세로도 보고 있다. "다행이다...그래도 나는 아직 그런 '반사회성인격장애'는 아닌가보다"라고 내 스스로 위안이라도 해야하나?

2. 삶의 무게들 - 비정규노동과 부동산 문제
한겨레 신문 기사 ['궁핍, 사회불만의 흉기', 고시원 참극]에서 보듯이, 방화범(정씨)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02년 서울로 올라와 식당 보조원과 주차요원 등으로 일했으며, 최근엔 고시원 인근 분식집에서 배달원 일을 해 왔다. 정씨와 같은 조건에서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사실 이런 류의 단순서비스직에 종사하는 비정규직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월급은 받아야 보통 100만원 내외, 많아야 150만원 정도다.  

이 돈으로 사실 정상적인 가족 생활, 그것도 서울에서 결혼해서 집을 얻고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결혼은 둘째치고 집을 얻는 것만으로도 버겁고 힘든 일이다. 싸도 몇 억대를 넘는 집을 산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고, 전세를 얻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이런 조건에서 비정규직으로 일을 하며 원룸이나 월세라도 얻고 생활하려면 한달 번 돈의 반 이상은 집세로 내야한다. 서울 변두리라면 40정도면 가능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변두리로 나가면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다. 설사 변두리가 아니라 도심에 일자리를 구한다 해도 출퇴근 시간만 한 두 시간은 족히 걸린다.

결국 시급이 다른 조건보다 좋은 조건에서 일자리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서라도 도심 안에서, 그것도 잘 나가는 동네서 일자리를 구해야한다. 그리고 일하는 곳에서 쪽방을 내주거나 일 끝나고 가게 쇼파 같은 곳에서라도 자라고 하면 다행이다. 이런 조건도 어려울 경우 도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주거공간이 고시원이다. 말 그대로 쪽방의 또 다른 이름이 고시원인 거다1).

그 곳에서 정씨는 빡빡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거다. 그 고시원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사람도 정씨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에 놓여있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비정규노동 문제'와 '부동산 문제'가 얽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우리의 삶을 내리누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3. 이중도시와 감정노동
강남이라는 공간. 이 공간은 전형적으로 '이중도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공간이다. 이 동일한 장소에서 강남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러한 향유를 위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강남에는 한국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를 비롯해 백화점과 음식점, 그리고 고급 유흥시설들이 즐비해있다. 아파트에는 경비아저씨가 있고, 백화점에는 판매원과 주차요원, 청소부가 있고, 음식점에는 식당 보조원, 배달원이 있다. 이런 일들은 정씨가 해 온 일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정씨가 해 온 그 일들의 대부분 '감정노동'에 속하는 일들이다.

감정노동. 고객에게 무시를 당해도 웃음 지으며 화나는 나의 감정을 항상 참아내야하는 일이다.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그나마 돈이라도 많이 주면 그렇다치지만 그렇지도 않으면서 언제까지 참아내야한다는 말인가. 이건 말이 감정노동이지 인간의 영혼을 파는 일들이다. 이런 일을 저임금의 비정규직으로 생활하며 하루하루 참고 견뎌내야 한다는 거.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삶인데 정말 우울증, 화병, 대인기피증, 공황장애 등에 걸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이번 고시원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은 이 이중도시 속에서 감정노동을 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견뎌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게 조금이라도 아끼며 빨리 버는 방법이기도 하다. 남들은 어떻게 저렇게 사나 하겠지만, 그래도 가슴 속에 꿈을 갖고 쇠붙이 같은 삶의 무게일지라도 열심히 길을 달려간다.

4. 삶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는 무력감
하지만 가끔은 더이상 넘을 수 없는 벽.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내가 오를 수 없는 산이 있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들. 그럴 때는 지금까지 가져왔던 희망조차도 무너지고 더이상 삶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혼자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그 무력감...

이 무력감. 당사자인 나의 책임으로 물어야할까? 하지만 나도 나름 열심히 살아왔는데...더이상 내가 어쩔 수 없서서 그러는 건데.... 그럼 당신의 책임으로 물어야할까? 하지만 당신도 남에게 피해 입히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할텐데...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5. 인정투쟁과 사회적 대책?
결국 우리는 이렇게 양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양분된 두 당사자 가운데 한 사람만이 위협을 자신의 인격성과 관련된 문제로 인식한다. 그 이유는 상처받은 주체만이 대항 행위를 통해 자신의 전 인격체의 불가침성을 위해 투쟁하기 때문이다(엑셀 호네트, [인정투쟁] p.57)

하지만 이 사회가 그 문제에 대해 그건 너 혼자만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대답할 때...상처받은 한 개인은 혼자 분개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확 불지르고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닌가 싶다. 더 비참한 건 이렇게 상처받은 주체만이 위협을 자신의 인격성과 관련된 문제로 인식하고 혼자 죽음으로 해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정작 상처를 준 이 사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사회가 가한 위협이 한 인격성을 어떻게 파괴했는지에 대해 생각하기보다 오히려 그들을 정신병자로 분류한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정상적인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치안을 강화하고, 그들을 격리시키고 교정할 생각부터 한다. 그런 사회적 정당성 속에서 치안사업, 교정사업, 복지사업은 더욱 확대된다.

그 울타리 속에 들어간 우리들은 한편으로 위안하겠지만...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 높은 벽을 느끼고 곧 무력감에 빠져들거다. 그러다 우리들은 다시 그 울타리 밖으로 내쳐질거다. 그 때에는 일본과 같이 '도리마' 공포가 한국 사회에도 확산되고 있다고 언론들은 떠들어댈거다...참 쓸쓸한 현실이다.


------------------------------------------------------------------------------------
1) 이번 방화사건을 계기로 고시원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극단에는 고시원을 폐쇄하겠다고 난리를 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이들이 어디로 갈지 의문이다. 찜질방? 그것도 하루이틀이지...아니면 노숙인?      


[관련기사]
출처: 겨울철쭉의 독서일기
http://member.jinbo.net/~rudnf/red/board.php3?table=reading&query=view&l=39&go=68&p=5

<경제의 세계화와 도시의 위기>/사스키아 사센/푸른길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도시와 그 시민에게 미치는 영향"


가끔 좋은 책들이 묻혀있는 경우를 발견한다. 이 책도 그런 경우. 요즘에 유행하는 얄팍한 혹은 저널리즘적인 세계화 비판서들 보다 훨씬 알찬 내용을 보여준다.(나는 이 책을 다른 책의 각주를 통해서 알았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서는 아니다. 오히려 약간 '빗나간' 주제를 다룬다. 바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과정에서 '도시', 그리고 그곳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변하는가하는 문제이다.

생산이 탈지역화하고, 자본이 초민족화하면서 생산의 입지는 분산된다. 금융자본의 운동과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이 낳은 결과이다. 그럼 대도시는 쇠퇴하는가?

예상밖으로 저자는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물론 금융중심지로 도약하지 못한 어떤 도시들은 쇠퇴한다.(혹은 이 과정에서 제3세계의 공업도시는 생산입지의 변경으로 인해 팽창할 수도 있다.중국과 동남아시아의 대도시들.) 그러나 초국적 거대도시들(뉴욕, 런던, 파리, 도쿄 등)은 오히려 더욱 팽창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이 도시 지역이 생산자본의 초국적화에 맞물리는 초민족적 자본의 금융화의 중심지이기 때문.(90년대 이후의 이른바 '신경제'에서 자본의 축적은 생산에서 금융부문으로 이동한다.) 금융거래를 중심으로 도시의 기능이 팽창하고, 또한 이러한 입지에는 금융거래의 인프라를 제공하는 정보통신 기업이 집중된다. 이에 따라 오히려 초국적 거대도시들은 팽창한다.

우리나라의 서울의 예도 그렇다. 금융기능이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집중되며, 아무리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정보통신 산업에 투자한다, 무슨 '벨리'를 만든다고 해도 서울 강남에 정보통신 기업은 집중된다. 자본의 축적양식이 금융적인 것으로 변화하면서 이에 따라 기업의 입지 조건도 바뀌고 도시의 성장도 바뀌는 것이다. 한편으로 인천과 같은 공업도시들은 고유의 생산 기능을 상실해가고 서울의 위성도시화한다.(대우 자동차가 GM에 매각될 경우 부평공장의 폐쇄는 기정사실로 보이는데, 그 경우 이 과정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한편,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도시의 하부 구조에 저임금의 단순노동, 하인노동(피부관리사 등과 같은 것이나 파출부 등)을 양산한다. 어떤 첨단 빌딩도 청소부나 보일러 관리공 없이 운영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첨단의 도시와 주거지역도 편의점의 파트타임 저임금 노동력 없인 운영될 수 없다.

결국 도시의 계층분화는 더욱 진전되고, 대도시의 인구는 금융과 정보통신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귀족들과 하층 비정규직, 하인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들로 분할된다.(이러한 노동인구의 분할에 대해서 이 책은 도시공간의 분석을 통해 답하고 있지만, 이러한 도시 풍경의 변화는 금융세계화 과정과 떨으뜨려 사고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노동인구를 분할하는 데 있어 금융세계화가 미치는 영향과 그 매커니즘에 대해서는 <신자유주의와 노동의 위기 : 불안정 노동 연구>(사회진보연데/문화과학사)를 참고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도 역시 서울과 같은 도시에 들어맞는다.(물론 서울보다는 뉴욕이나 런던, 도쿄에 잘 들어맞겠지만.) 이른바 '테헤란 벨리'와 여의도 증권가의 고임금 직종의 노동자들이 존재하는 한편에 열악한 조건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넘쳐난다. 그리고 이들은 주거지역도 중산층 아파트와 좁은 다세대 주택, 이런 식으로 분할된다.

이 책은 이렇게 추상적인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과정에 대한 인식을 구체적으로 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자본의 축적 양태의 변화에 따른 효과가 우리의 삶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드러나는지를 보여준다.

그럼 이 책이 그리는 미래는 디스토피아일까? 글쎄, 저자는 명확히 답하고 있지 않지만, 이러한 모순된 상황, 즉 거대한 금융자본의 축적과, 한편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의 공존은 그대로 유지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삶의 조건들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은 도시의 변화과정에서 도시공간을 '정치화'하면서 더욱 확산될 것이다.

또한 초국적 도시의 팽창과 더불어 쇠퇴할 수밖에 없는 '민족국가'의 통치성의 위기는 이 체제의 근본적 불안정성을 심화한다. 역사적으로 대중을 지배하는 체제로 효과적으로 정착한 '민족국가'는 내부로부터 초국적 대도시와 시골, 쇠퇴하는 도시로, 그리고 초국적 도시 내부의 분열로, 몇겹으로 분열돼 간다. (저자는 이에 따라 미래가 초국적 거대도시들의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의 모습을 띨 수도 있다고 진단한다. 민족국가라는 자본주의 고유의 국가형태가 도시의 연합에 의한 초국제적인 지배로 변환된다는 예상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자본주의가 민족국가 형태를 취하는 것은 그것이 여러가지 대안 중 가장 효과적으로 대중을 지배할 수 있도록 했으며 자본축적에 유리한 조건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금융세계화는 스스로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묘굴인이 될 것인가?

미래는 여전히 구성중일 것이지만, 이 책이 진단하는 바는 거의 가시적으로 들어맞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시적인' 미래에 대해서 우리의 대응은 무엇이어야할 것인가?

등록일 : 2001-10-05 [13:52]

출처: 교수신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4189)

위태롭고 지루한 풍경…상상력의 빈곤
[기획 _ 도시연구 현황과 쟁점] ④ ‘건축’으로 본 도시
2007년 07월 09일 (월) 10:52:18이종호 / 한국예술종합학교·건축과
고대 도시 이래 수천 년을 걸어 온 길임에도 오늘 건축가들이 새삼 이 도시를 걷는다. 도시를 걸으며 이 도시를 이해하려 애쓴다. 도시의 역사, 도시의 이론들을 몰라서가 아니다. 오늘 우리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현대의 도시를 그 어떤 역사도, 이론도 충분히 설명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시아의 도시들, 지난 세기 후반 등장했었고 지금도 맹렬히 팽창하고 있는 “아시아의 거대도시-Asian Hyperpolis”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오늘 전 세계의 도시화 현상과는 또 다르다. 아시아의 거대도시들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도시의 현상들이 모두 함께 있다. 전근대의 자취를 읽을 수 있으며 그 위에 근대의 기획들이 집적되어 있는가 하면 다시 후근대의 여러 징후들로 분열되어 나간다. 이 모든 일들이 시공간을 함께하며 탁류의 도도함처럼 흘러 나간다. 이 나라의 이 도시들, 어느 도시 못지않다. 그래서 오늘 이 도시의 건축가들은 그들 작업의 공간이고 그들 상상력의 원천이며 사실은 그들 자신의 존재기반인 이 도시를 걸으며 생각에 잠긴다. 학습한다.



도시이론, 실제도시 앞선 적 없어
도시에 관한 두 갈래의 인식이 오늘의 상황을 가른다. 하나는 근대의 기원에서 나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후근대의 성찰에서 읽혀지는 것이다.
사유의 전통 속에 ‘낡은 마을’을 허물고 ‘새 도시’를 건축해야만 했던 데카르트의 다음과 같은 말이 전자의 인식을 대표한다. “고대의 도시들이 크고 작은 집들과 그것들이 이루는 꼬불꼬불하고 부정형한 거리를 어떻게 이루고 있는가를 살펴본다면 이것들은 한 사람의 건축가가 자기의 꿈을 좇아 만들어 낸 정연한 도시에 비해 훨씬 덜 정돈되어 있다.”(<방법서설> 제II부) 후자의 인식은 자신의 앞선 사유를 부정하며 일상 언어의 가치를 재삼 받아들인 비트겐슈타인의 다음과 같은 말 속에 드러난다. “우리의 언어는 하나의 오래된 도시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새로운 도시로 비유될 수 있다. 좁은 길과 공터, 오래된 집과 새로운 집, 그리고 여러 시대를 통해서 증축되어진 집들로 이루어진 미로의 도시(오래된 일상 언어). 그리고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규칙적인 직선도로, 똑 같은 모습의 집들로 채워진 수많은 새로운 교외 시가지(새로운 형식 언어).” (<탐구>) 그러나 속단하지 말자. 생각에 잠긴 건축가는 쉬이 두 번째 이야기에 기울어 있을 것이라고.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 도시의 건축가들은 오래된 도시 같은 달동네를 그저 풍경으로 노래하지 않는다. 무교동의 골목과 종로의 피맛길을 그저 향수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보다 복잡한 함수와 보다 치열한 현실이 있음을 이미 안다.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았던 데카르트의 언급은 3백년 후 아테네에서(꼬르뷔제 주도의 CIAM 회의) 그 권위가 확정된다. 아직 계획이던 권위는 브라질의 밀림 위에 그리고 펀잡 주의 들판(샨디가르)위에서 이내 현실이, ‘삶이 함께하지 않는 불온한 현실’이 되고 만다. 불온한 현실은 쉽게 소멸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소환된다. 사회주의 도시에서 인민의 주택으로, 거주를 자본의 재생산으로만 간주하는 도시에서 자본과 정치권력 모두에게 ‘훌륭한’ 도구로. 마침내 웃지 못 할 극점이 평양에 준비된다.
80년 대 북쪽의 정권은 서울에서 벌어지는 올림픽에 맞서기 위해 제 13차 세계 청년 학생축전을 유치한다. 교외에는 광복거리, 통일거리가, 기존 도심부에는 창광거리가 만들어진다. 넓은 도로와 고층 아파트가 이루는 그 실루엣이라니! 꼬르뷔제의 꿈인 ‘빛나는 도시’가 바로 그곳에 있다. 폭격으로 인한 백지위의 계획이 그곳에 있다면 이곳 남쪽에는 계획에 의한 폭격이 벌어진다. 끊임없이 지우고 세우며 또 다시 지워 쓴다. 비트겐슈타인의 도시 소묘는 이곳에서 전도된다. 오래된 일상 언어가 새로운 형식언어에 (그래도 질서 있게)둘러싸인 것이 아니라 오래된 일상 속으로 새로운 껍데기의 형식들이 불쑥 불쑥 침투한다. 착종된다. 긴 시간 동안의 수많은 ‘계획’들은 대체 이 상황 속 어디에 있는가? 혼성의 풍경은 또 어떤 ‘계획’들의 산물인가? 이러한 도시 속에서 건축의 규범이 어떠하다며 ‘예쁜 집’ 한 채를 더해 나가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의미가 있기라도 하는가? 흰 벽에 비추이는 나뭇가지의 그림자에서 흔들리는 현상을 붙잡으려던, 빛으로 드러나는 침묵의 공간에서 존재의 심연을 노래하려던 건축가는 그 집 문 밖을 나서는 순간 그가 갈망하던 존재, 현상을 과연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깊은 절망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나 절망은 지속되지 않는다. 그리 될 수도 없다. 모든 것은 관념 너머의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의 탓을 말하기 전 우리의 사회적 과정이 드러내는 한 단면이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그것을 먼저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그 어떤 해석도, 해석에 이어지는 성찰과 대응도, 작업도 단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만다. 

삶의 실재성에 대한 인식과 탐구 필요
한 무리의 건축가들(sa라는 이름의)이 이 나라의 도시들을 유랑하고 있다. 제주의 한 마을에서 무주, 강경, 양구로. 부산에서 새만금, 목포, 통영, 순천으로. 그리고 이제 서울로. 벌써 십년이다. 오직 몸으로 그 도시들에 부딪힌다. 그 도시들 속에 어떻게 온갖 종류의 시간들이 질곡으로 겹쳐 있으며 현실은 어떻게 수많은 정책, 수많은 계획들을 비틀며 비웃고 있는지를 확인한다. 어디를 가도 발견의 즐거움이 있다. 전체 구조 속에, 작은 골목 속에 그리고 지적선 속에 보이지 않게 숨어있는 의미들이 있다. 현실화의 과정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위태롭다. 굵은 도로 계획선과 재개발, 뉴타운 등등, 제도의 이름이 그것들을 위태롭게 한다. 안타까운 것은 그 의미들의 소멸 때문이 아니다. 의미들은 자신들이 올곧이 드러나 현실화되기 보다는 오늘 더 의미 있는 다른 계열로 재구성되며 현실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그 기회를 잡지 못하는 소멸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그러하지 않을 방도가 필요하다. 혼돈이라 불리는 이 도시들의 또 다른 의미와 잠재력을 애써 붙잡아야 한다. 잠재력이란 그 혼돈의 역동성일 수도, 여러 층위의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일 수도 있다.
한 무리의 건축가들이 지금 유랑하고 있는 것이 그 때문이다. 여전히 학습이지만 때로 실천으로 향한다. 하지만 형식과 제도로만 근대를 만들어 온 이 사회는 도시를 실천하는 그 길목에 어느새 온갖 소통의 방벽부터 만들어 놓았다. 내부로만 작동하는 폐쇄의 회로를 구축해 놓았다. ‘신은 자연을 만들었으며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는 멈포드의 말은 인간이라는 단어를 특별한 도시전문가, 군림하는 도시행정가 그리고 그들과 이익을 주고받는 탐욕스런 도시개발자로 대체한다면 글자 그대로 정확한 오늘의 현실이 된다. 그 시스템의 작동으로 이루어 낸 것들이 과연 무엇인가? 폐쇄회로의 제도들이 아직도 온당한가? 대체할 그 무엇은 또 무엇인가? 상상력이다. 이들 도시의 지루한 풍경위에, 미세한 혈관 위에 가해지고 더해질 상상력이다. 지역과 지구의 경계를 넘어, 제도와 형식의 껍질을 뚫어 다원화된 삶의 내용들을 너끈히 포용할 수 있는 도시 건축적 상상력이다. 누구로부터의 상상력이든 무슨 관계인가. 열어 젖혀 논의될 수 있기만 한다면. 제도 사이를 비집을 때 실천의 작은 틈들이 있다. 광주에서, 순천과 무주에서 기회를 얻는다. ‘기본구상’의 이름을 가진, 제도구 전 단계의 자유로운 기회들이다. 봉평, 양구로 이어지고 이제 제주에서 다시 시도되려 한다. 실천인 동시에 여전히 학습이다. 궁극의 학습은 다시 건축을 향하게 된다.

도시이론, 도시 ‘실재’에 마주치는 것부터
그러나 이때의 건축은 더 이상 도시를 구성하던 개별 요소로서의 건축이 아니다. 이미 건축은 그 안에 도시를 품었고 도시는 건축과 상호 함의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건축가들이 바라보는 현대도시의 현상과 변화는 건축의 새로운 규범인 동시에 개념 그 자체다. 건축과 도시를 나누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과거에 비할 바 없이 다양한 집단과 다양한 개인들 사이의 충돌, 급속한 팽창 그리고 변형들이라는 현대 도시의 징후들은 건축의 내부에서도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현상이 이론을 앞서고 있는 아시아의 도시들. 인류의 도시화 과정에서 가장 빠르게, 가장 넓고 크게 도시화의 과정을 겪고 있는 이들 도시를 해석할 수 있는 그 어떤 이론을 우리는 아직 가지고 있지 않다. 겨우 붙여지는 말이라야 고밀, 초집적 정도다. 우린 이미 그 스펙타클 속에서 무감각하다. 논의는 계속될 것이나 그것이 어디로 향할 수 있을지 아직은 잘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 어떤 선험도 필요치 않다. 도시의 실재에 마주설 뿐이다. 그리고 실재란 삶을 관찰하는 모든 분야들을 다 동원한다 해도 충분치 않다. 하물며 도시, 건축이라는 좁은 테두리 속만의 상상력이란 더더욱 아니다.

이종호 / 한국예술종합학교·건축과


출처: 교수신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3982)
집값 폭등·대도시 집중· 양극화 ‘처방’ 안목 제공
기획 _ 도시연구 현황과 쟁점 ② 도시공간의 정치경제학
2007년 06월 23일 (토) 11:02:04조명래 / 단국대·도시지역계획학
한국의 앞선 도시화률에 견준다면 도시에 대한 연구는 그렇게 다양화도, 선진화도 되어 있지 않다. 도시개발과 같이 정책 관련 연구가 지배적이다 보니, 한국의 도시연구는 현상 추수적이고 도구적이어서 이론적·담론적인 깊이를 결여하고 있다. 주류 도시담론은 대개 제도권 연구기관이나 학계가 주도하고, 또한 대학 강단을 통해 유포되면서, 후코가 말하는 ‘권력으로서 지식’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지배적인 도시담론의 대척점에서 ‘도시의 존재론적 깊이를 들추어내면서’, 그 내재적인 얼개와 모순을 주목하고자 하는, 그래서 도시에 대한 우리의 인식지평을 넓혀주고자 하는 대안적 도시지식이 곧 ‘도시(공간의) 정치경제학’이다. 도시정치경제학이 제기하는 도시에 관한 물음은 가령 이러한 것들이다.

도시공간, 구조적 얼개·모순에 주목
도시로 인구가 계속 집중한다면, 지구화되는 한국자본주의와는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집중된 도시인구는 내부적으로 어떠한 계급 내지 역할구조를 가지고 있을까. 도시 토지이용이 돈이 되는 주거지와 상업지로 집중된다면, 이는 한국의 자본축적체제 변화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도시개발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된다면, 도시공간 속에 설정되는 국가와 시민사회 간 권력분립과는 어떻게 연관되는가? 도시경관이 기호적이고 이미지적인 것으로 변모한다면 신자유주의 지구화 속에서 도시공간이 상품화되는 경향과는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선, 도시공간의 문제를 단순히 집값·땅값 문제, 도시계획의 문제, 도시환경오염의 문제, 지방자치단체의 행정문제로만 바라보는 것을 넘어 이러한 문제를 만들어내는 뿌리, 즉 구조의 세계로 돌아가서 그 답을 찾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마르크스적 방법론(예, 실재론, 총체론, 유물론, 구조주의 등)이 동원된다면, 도시공간을 하나의 구성체로 간주하고, 그 물적 토대인 ‘경제의 차원’으로부터 상부구조인 ‘정치의 차원’을 유기적으로 통합해 분석·설명하는 ‘정치경제적 접근(political economy)’이 가능하게 된다. 이를테면,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와 도시문제를 결부시켜 도시공간의 구조적 얼개와 모순을 읽으려고 하고, 이를 위해 마르크스적 방법론을 활용한다면, 이는 곧 도시정치경제학적 접근이 되는 것이다.
도시정치경제학은 유럽의 1970년대 ‘자본주의적 도시공간’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등장했다. 후기자본주의의 모순이 도시공간을 통해 드러나는 점을 주목한 일단의 비판사회과학자들이, 한편에서 도시에 대한 기존의 경험주의적 공간지리적 접근을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주의 관점으로 도시공간의 본질을 파헤쳐보려는 시도를 하는 가운데 도시정치경제학이란 새로운 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도시정치경제학파가 형성되기까지는 여러 이론가들의 선도적이면서 창발적인 이론적·경험적 연구들이 있었다. 자본주의에 의해 도시공간이 만들어 진다고 주장하는 ‘르페브르(Lefevre)의 공간생산론’, 도시를 노동자 계급이 재생산되는 장이라고 주장하는 ‘카스텔(Castells)의 집합적 소비론’, 자본순환 과정에서 발생한 잉여자본이 흘러들면서 도시란 인조환경이 생겨난다는 ‘하비(Harvey)의 건조환경론’ 등이 대표적인 이론들이다.

‘자본주의적 도시공간’ 배경으로 등장
이들 도시정치경제학 이론들은 1970년대 유럽도시를 배경을 하여 형성된 것들로서, 마르크스 방법론을 공간에 접목시켰다는 점에서, 이들을 포괄적으로 ‘공간정치경제학’으로 부르기도 한다. 말하자면, 공간정치경제학은 ‘자본과 공간’의 관계를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입장 전반을 지칭하는 것으로 도시정치경제학은 이의 한 유파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 도시정치경제학은 1980년대 후반 고도화되는 한국자본주의의 모순이 도시공간을 통해 집중적으로 발현하자(예, 집값앙등, 산업구조의 첨단화, 권력의 집중 등), 이를 공간정치경제학으로 설명하는 시도들이 이루어지면서 등장했다. 서울대 환경대학원과 대학원 지리학과의 소장 연구자들이 모여, 1988년에 창립한 한국공간환경연구회(현, 한국공간환경학회)가 유럽의 공간정치경제학을 한국의 도시문제를 분석·설명하는 대안이론으로 소개하고 연구하면서 도시정치경제학이 학계의 ‘진보적 아방가르드’로 대두했다. 도시공간만 아니라 국토공간, 나아가 생태공간 전반에 대해 다양한 정치경제학적 연구를 시도하면서 한국공간환경연구회는 용역형 학술연구에 빠져 있는 보수적인 기성학계가 다루지 못한 연구를 수행했고, 또한 그 결과를 다양한 학술총서로 생산해 왔다.
1994년 출간된 <서울연구>(한울)는 한국공간환경학회가 도시정치경제학적 연구와 관련하여 생산한 연구결과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도시정치경제학의 여러 이론들을 서울연구를 위한 방법론으로 정립하고, 이를 토대로 30여명의 소장학자들이 서울대도시를 생산구조와 노동시장, 토지주택 등의 하부구조, 소비유통, 일상소비문화, 도시운동과 정치 등의 영역으로 나누어 연구했던 것이 곧 <서울연구>란 연구서다. 도시정치경제학적 분석을 위해 이 책은 1990년대 한국자본주의의 상황을 조절이론에서 말하는 주변부포드주의(perppheral Fordism)로 설정하고, 이의 공간적 특성이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현장으로서 서울 대도시공간을 해부하고자 했다.
한국에서 도시정치경제학 연구는 결국, 한국공간환경학회의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져 왔다 할 수 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대구대 최병두 교수, 단국대 조명래 교수, 경상대 김덕현 교수, 연세대 김왕배 교수 등을 필두로 하여, 지난 수년전부터 학계로 진입한 부경대 권오혁 교수, 중부대 강현수 교수, 서울대 김용창 교수, 세종대 변창흠 교수, 서울대 박배균 교수 등을 꼽을 수 있다. 전통학문분류로 볼 때, 이들은 지리학, 사회학, 도시계획학, 행정학 등에 걸쳐 있지만, 도시공간을 연구함에 있어서는 전통학제의 연구시각보다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관점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 점에서 도시정치경제학파로 함께 묶어진다.
개별연구자에 따라 연구의 영역과 관점, 그리고 강조점의 정도가 다르다. 가령, 대구대 최병두교수는 ‘하비’의 연구성과를 충실하게 한국의 학계에 소개하면서, 하비의 최근 연구경향에 따라 ‘정치생태학’의 영역으로까지 연구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단국대 조명래 교수는 프랑스의 조절이론을 받아들여 포스트포드주의 도시론(post-Fordist city)으로 발전시키다가 최근에는 축적체제의 공간적 확장으로 나타나는 사회생태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연세대 김왕배 교수는 카스텔의 집합적 소비론을 일찍이 소개하면서 도시일상주체들의 삶의 세계가 가지는 정치경제적 모순을 탐구하고자 했으며 근자에는 이를 노동계급이나 사회적 연줄 등의 문제와 결부시키고 있다. 그 밖의 소장학자들은 엄밀한 이론적 주제 보다, 토지주택문제, 신도시문제, 수도권과밀문제, 지역혁신문제, 거버넌스의 문제 등과 같이 정책적으로 논란이 되는 주제들을 공간정치경제학적으로 다루는 데 더 역점을 두는 연구들을 수행하고 있다.

제도권 도시정책에 비판적 태도
도시정치경제학은 마르크스주의 전망을 도시읽기의 관점으로 끌어 들어오기 때문에, 기존 도시담론에 비해 이론적 추상성이 높고 또한 이념적으로 급진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이는 곧 주류 도시론에 익숙한 입장에서 이해하기엔 너무 ‘난해’하면서 ‘이론 지상적’인 것으로 비추어지는 까닭이 되고, 또한 보수적인 주류 도시연구나 제도권의 도시정책에 대해 비판적이다 보니 현실로부터 ‘배제’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최근의 탈이념적인 현실추세와 맞물리면서 도시정치경제학은 설 자리가 갈수록 더 협소해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자본주의가 건재하고, 그 모순이 공간적으로 계속 표출되는 한, 이를 독해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도시정치경제학적 사고와 접근은 앞으로도 계속 유의하고 유효하다. 도시정치경제학은 도시현상을 넘어 공간의 본질을 보고자하기 때문에 도시에 관한 계몽주의적 사유, 나아가 진보적 변혁을 꿈꾸고자 한다. 이 자체만으로도, 도시정치경제학은, 대도시집중, 집값·땅값 폭등, 강남북 불균형, 양극화, 갈등 등의 문제에 대해, 도시에 관한 어느 학파보다 올곧게 진단하고 처방하는 안목을 제공해준다. 제도권의 보수적인 도시담론에 의해 배제되고 있는 현실은 안타깝지만, 도시정치경제학이 가지고 있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갈릴레오적 믿음, 즉 ‘도시의 진실에 관한 믿음’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으리라 본다.

조명래 / 단국대·도시지역계획학

출처: 교수신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3883)

도시공간, 역사행위 주체·구조로 바라보기
[기획 _ 도시연구 현황과 쟁점] ① 도시사
2007년 06월 18일 (월) 10:29:16민유기 /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교수신문은 ‘도시연구’와 관련한 학술동향 기획을 마련했다. 도시는 현재의 세계를 이해하는 좋은 사례가 되고 있으며 구미세계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도시연구’와 관련해 다양한 관점으로 학제간 접근을 통해 종합적인 학계 동향을 소개한다. 한국 도시환경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제시해 학술적 토론에 그치지 않고 정책적 방향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최근 우리 역사학계에서 도시사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도심 재개발이나 신도시 건설, 주택문제 해결에 대한 각종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며, 지방자치단체가 도시와 인근 지역의 역사와 전통을 문화·관광 자원화하면서 세계화와 지방화 시대에 도시와 지역정체성 구성에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간 우리 사회에서 도시에 대한 연구는 주로 지리학, 도시사회학, 도시행정학, 도시계획학 등 사회과학과 공학 분야에서 이루어졌고 대체로 도시의 현재적인 문제나 도시공간의 미래 기능과 활용 문제에 집중되었다. 이런 연구들은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도시공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유산과 기능, 행위 주체들 사이의 긴장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편이다. 도시사학자는 현재의 도시에 대한 고찰과 미래의 도시에 대한 전망이 과거의 도시에 대한 이해 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19세기부터 도시에 대한 연구 시작
도시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근대적 학문이 형성된 19세기에 시작되었다. 주로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잉태하고 발전시킨 중세도시의 탄생과 성장, 길드와 자치행정 등 ‘봉건사회의 섬들’에서 등장한 새로운 정치·경제 제도가 탐구되었다. 19세기의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가 낳은 사회적 문화적 구조 변동과 이것이 인간 삶에 미친 변화를 설명하는 ‘도시성(urbanity)’이란 개념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20세기 초부터 1950년대까지는 특정 도시의 탄생, 성장, 변화를 다루는 도시의 일대기(City Biography)로서의 ‘도시의 역사(Town’s History)’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후 1960년대부터 유럽과 미국 학계에서 도시사 연구영역, 방법론, 사료 등에 대한 집단적 고민의 결과로 역사학의 하위분과이자 방법론으로 도시사 영역이 구축되었다.
1960년대 이후 일본의 도시사 연구는 유럽과 미국의 흐름과 비슷하게 진행되었고, 중국에서는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 국가적 차원의 지원을 받는 연구단을 중심으로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우리 학계에서는 70~80년대 사회경제사 연구 성과기반 위에서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주년’을 기점으로, 또한 90년대 이후 지방자치단체의 지역문화 활성화 노력에 발맞추어 흥미로운 도시사 연구 성과가 하나둘씩 축적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도시사는 연구, 교육, 사회적 인식의 세 층위에서 생소하고 낯선 분야이다. 아직 소수인 도시사 연구자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도시사 연구의 필요성과 의미를 소개하고 있으며 조만간 한국도시사학회를 출범시킬 예정이다.
역사학은 시간과 공간을 유기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그간 역사학자들은 시간에 보다 초점을 맞추었고, 공간은 역사의 배경이나 무대로만 간주하는 경향이 많았다. 도시사 연구는 시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과되었던 공간의 문제를 강조한다. 도시사는 시간과 공간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면서 역사이해의 범위를 넓히는 데 이바지한다.
도시사 연구에서는 도시를 사회·문화적 변화의 구조이자 주체로 파악한다. 도시민의 투쟁이 공간 구조를 변화시키기도 했고, 공간 구조 자체가 역사적 행위를 유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도시사 연구는 도시라는 분석단위 안에 정치사, 경제사, 사회사, 문화사, 여성사 등 역사학의 하부영역이나 방법론이 지닌 다양한 시각들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킨다. 도시 공간에서는 계급계층, 인종, 젠더, 상이한 문화적 가치 등이 경계를 넘나들고 ‘충돌’ 혹은 ‘공존’하면서 지속적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도시사가들은 도시를 연구하는 다양한 학문분과와 상호소통하면서 사회학, 인류학, 지리학, 도시설계와 계획학, 지방행정학, 지역개발학 분야에 역사적 시각을 제시한다. 도시사 연구에서는 문헌사료뿐 아니라 다양한 시각적 사료분석이 필수적이다. 주요 건축물 및 도시계획 설계도면, 지적도, 사진, 지도, 삽화, 축제나 행사 안내서, 도시문화를 다룬 화가들의 그림, 오늘날의 모습을 담은 현장 사진 등이 주요 사료로 활용된다.

도시사 연구, 도시 인프라 구축 위해 필수
국제적으로 합의된 도시사 연구 테마들은 다음과 같다. 1.도시사 방법론, 사학사, 개별 도시의 성장사를 다룬다. 2.인구문제로 특정 도시 공간에서의  출생, 결혼, 사망, 질병, 이민 등의 문제를 다룬다. 3.도시의 물리적 구조, 건축형태, 주택조건 등을 분석한다. 4.도시사회영역으로 도시 사회집단의 특성과 구조, 계급 계층 구조, 사회조직, 소수자 집단, 가족생활 등을 연구한다. 5.도시의 경제활동으로 도시나 인근 지역에서의 산업과 상업, 소비, 노동조건, 노동운동 문제 등을 고찰한다. 6.교통과 통신의 발달, 이런 발달의 원인과 결과인 도시화과정과 공간 이동성이 낳은 역사적 행위의 유형을 고찰한다. 7.도시정치와 행정으로 자치행정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집단의 조정, 도시 공공정책 등을 다룬다. 8.도시환경, 도시계획, 지역발전, 이상도시론 등을 연구한다. 9.도시문화의 다양한 형태, 여가, 교육, 종교, 정보 교환, 일상생활 등을 분석한다. 10.도시공간에 대한 인식과 태도, 문학, 미술, 영화 등에서 다루어진 도시 이미지 등을 분석한다. 이들 연구 테마들은 기존의 정치사, 사회사, 문화사에서도 연구되던 것들이지만 도시사에서는 공간의 형태와 기능, 도시적 특성에 대한 시각을 결합시킨다. 해외학계에서 가장 최근에 주목받는 연구 테마들은 비교도시사, 도시의 정체성, 도시공간의 표상과 이미지 등이다.  
도시사 연구는 현재와 미래 도시의 기능과 환경을 보다 인간적인 것으로, 도시 인프라망을 보다 사회적으로 만들기 위해 필수적이다. 또한 다양하고 풍요로운 도시와 지방/지역문화를 재발견하고 이를 발전시켜 문화국가의 콘텐츠를 증대하는 데 기여한다. 모든 역사가 현재사인 것은 오늘날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과거 인간 삶의 복합적 층위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설계하기 때문이다. 도시화는 앞으로 더욱 확산될 것이며 도시공간에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영역에서의 다양한 긴장관계와 갈등도 더욱 첨예화 될 것이다. 체계적인 도시사 연구는 각종 도시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 도시에서의 삶의 질과 문화적 향상에 기여할 것이다.


민유기 /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필자는 파리1대에서 ‘파리 지역의 서민주택 개혁 1870-1914: 사회주택의 역사인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도시이론과 프랑스도시사연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