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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스콧 니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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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시설'에 해당되는 글 1건
도시의 삶과 비정규 노동, 그리고 그 저항의 징후들
- 복지시설행 증가하는 2030? 젊은 부랑자들? 아니, 아예 복지시설을 점거하자! -



1. 무기력한 젊은 부랑자들?

한국일보(2007. 1. 26)에 실업…신용불량… 무기력 2030 "젊은 부랑자 는다"라는 기사가 났다. 기사 내용은 대개 사실(fact) 그 자체와 그 사실에 대한 해석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기사는 읽다보면 사실 그 자체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고 싶은 생각을 들게 한다.

기사에는 부제를 통해 "복지시설行 증가…퇴소해도 'U턴' 일쑤… 재활 전문 프로그램 시급"이라고 썻지만 나는 차라리 "2030 복지시설行 증가 … 일자리를 찾아도 'U턴' … 재활 전문 프로그램 무용(無用)" 이라고 쓰고 싶다.

처음 기사의 fact를 가지고 이 도시 속의 삶에 대한 자료를 남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기사는 언론이 이 사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 언론의 시각을 학자들이 어떻게 뒷받침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공모 속에서 fact가 우리들에게 어떻게 왜곡되어 전달되는지,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국가는 노동자들의 사회적 저항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등을 생각해보게 한다.

fact는 우리들이 이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 삶을 사회는 어떻게 파괴하고 고립시키며 무력화시키는지 확인해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그 무력함 속에서 나오는 노동에 대한 포기, 그것은 오히려 또 다른 형태의 사회적인 저항인 아닌가 싶다. 


2. 기사의 주요 내용
기사의 주요 내용은 아래 그림과 같이 한 부랑인(?) 시설에 2-30대 입소자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사진: 한국일보, 2007. 1. 26]

그리고 20대 수용자는 정신적, 신체적으로 건강하다는 점이다. 가정 불화나 경제적 문제로 갈 곳을 잃은 경우가 많지만 실업이나 사회 부적응 등으로 복지시설을 찾는 이들도 적지 않다. 취업을 해도 시설을 떠날 생각이 없거나 퇴소한 뒤 금세 되돌아 올 정도로 사회성이 떨어지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부랑인들이 늘고 있는 것은 사회 적응에 실패하고 이탈한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현상과 관련이 있다는 해석이다. 

3. 수용자들의 시각

1) 용어 사용-부랑인, 부적응자, 실패자, 이탈자
매스미디어는 이들을 어떻게 재단하고 있는지, 그 시각을 학자들과 전문가들이 어떻게 뒷받침하고 있는지는 기사에 사용된 용어 그 자체만 봐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기사에 사용된 용어들은 부랑인, 수용자, 부적응, 사회 적응, 실패, 이탈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수용자의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회 속에서 살아보려고 노력하다가 어쩔 수 없어 복지시설에 찾아갔더니 복지시설은 이들을 수용하며 부랑인, 부적응자, 실패자, 이탈자로 취급하고 있는거다.

2) 비정규노동에 대한 차별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싣고 있다.
# A씨는 한창 사회활동을 할 나이에 왜 이 곳에서 허송세월을 하는 걸까. 고졸 학력인 A씨는 스무 살 때 부모로부터 독립했지만 장기간 실업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음식점이나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 돈벌이에 나선 본 적이 없다. 점점 무기력증에 빠진 A씨는 지난해 7월 제 발로 이 곳을 찾게 됐다.

"음식점이나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 돈벌이에 나서 본 적이 없다"는 표현. 아르바이트라고 표현했지만 대부분 비정규 노동의 한 형태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형태는 이 사회 속에서 이렇다 할 돈 벌이가 아닌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을 은폐하면서 차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A의 조건에서 직업을 구하려고 구인란을 뒤져보면 A가 경험한 일 외에 단순 조립공, 술집 웨이터나 바텐더, 텔레마케팅(영업사원), 총무, 운전 등이 대부분이다.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이렇다할 돈벌이인지 모르겠다. 이 사회에서, 특히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A와 같은 조건의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일들의 대부분은 이런 일들인데, 그것이 현실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비정규직으로라도 어떻게던지 살아보려고 노력했는데 이렇다 할 돈벌이에 나서 본 적이 없다니... 그러다 결국 좌절하고 복지시설을 찾은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혼자만의 문제로 그치고 있지 않다. 이 사회는 가족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태로까지 몰고 가고 있다. 이제 가족은 서로 버팀목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은 그 한계점에 다다라 오히려 서로에게 짐이 되고 있는 것이다. 기사에 난 아래의 사례를 보자.

#30대 초반의 B씨도 2005년 부랑인 복지시설을 찾았다. 대학을 졸업한 B씨는 대형 쇼핑몰에서 안전 요원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알코올 중독자였던 동생이 몰래 B씨의 신용카드를 사용해 졸지에 수천 만원의 빚을 졌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B씨는 일자리도 잃고 차압 등으로 갈 곳이 없게 되자 복지시설로 들어왔다.

재기를 모색하며 사회로 돌아갔지만 번번히 적응에 실패하고 입ㆍ퇴소를 3번이나 반복했다. 일자리가 생겨도 월급이 채권자에게 그대로 흘러가는 바람에 빈털터리가 됐다. 점점 사회생활에 적응하기가 힘들어졌고 일할 의욕도 상실했다.


3) 재활과 교육의 대상 - 정신적 재활 능력 부족자?
수용자들의 시각 속에서 나온 대책들은 사회 적응을 위한 재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잇다. 뭐 요지는 정신적 재활 능력을 잃었으니 이를 찾아주고 이와 관련해 사회 적응 프로그램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 적응을 위한 재활 프로그램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20-30대는 교육 과정을 이제야 막 마치고 사회에 나오는 사람들이다. 더구나 이미 고등학교나 대학까지 나온 사람들에게 또 어떤 사회 적응 프로그램이 필요하단 말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배운 교육 프로그램들은 사회 적응에 부적합한 프로그램이었단 말인가? 그렇게까지 무용지물이 될 것을 정말 예측할 수 없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지금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프로그램들은 사회 적응에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응 프로그램이 따로 있는 것인가? 사회가 너무 빨리 변해서 배울 때 시점과 지금 적응 시점의 차이가 있어서 적응이 어렵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4. 기사의 재구성과 재해석
1) 소극적 사회 저항의 증가

나는 '몸과 마음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데도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부랑인 복지시설에서 생활하는 20,30대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는 기사를 나는 재해석하고 싶다. 기사는 젊은 나이에 사회 적응에 실패한 이들에 대한 재활 프로그램이 시급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젊은이들이 적응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적응할 수 없는 사회 구조 속에서 무기력을 통해 이 사회에 저항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저항은 적극적 저항과 소극적 저항을 생각해볼 수 있다. 적극적 저항은 어떤 대상의 불합리한 요구에 대해 받아들일 수 없음을 집단적 또는 개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소극적 저항은 불합리한 요구에 대한 거부를 드러내지 않는 경우, 때로는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실제 결과는 기대하지 않은 결과들을 가져오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만큼 교육열이 강한 나라는 드물다. 쉽게 말해 한국의 젊은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또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입시의 압박 속에서 하고 싶은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 졸업하면 정규직 일 자리가 없어 취업준비를 하며 아르바이트라도 한다. 그래도 정규직이 되기 어려우면 비정규직으로라도 들어가 정규직의 절반밖에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며 일을 한다. 그렇게 생활을 하다가 한계에 다다르고 포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능력 있는 자들은 그것을 실패와 포기로 보이겠지만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소극적 저항이다. 왜냐하면 모두 다 포기를 한다면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그 능력 하나로 포기한 사람들을 다 감당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더이상 그 능력을 자만하며 과시할 대상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극적 저항의 한 형태로 드러내지 않는 경우는 생계형 범죄를 들 수도 있다. 생계형 범죄는 지배자의 입장에서 보면 범죄일 수 있지만 그 당사자는 범죄이기에 앞서 생존의 문제인 것이다. 그 생존을 위해 법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들키지 않는다면 법이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지배자들이야 법이 있어도 법을 어기는 자유를 누리는 판에, 굶어죽지 않기 위해 빵을 훔치는 것이 무슨 죄란 말인가? )

2) 사회적 통제장치의 작동
하지만  복지시설을 찾아오는 젊은이들은 범죄와 같은 식으로 저항하지 않는다. 이러한 형태는 사회적 통제 장치의 틀 내에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푸코의 표현을 빌린다면 사회적 감시장치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결과는 기대하지 않은 결과들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의도하지 않은 수용 대상들이 들어와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복지시설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드러나지 않는 소극적 저항 형태들이 늘었을 것이다. 그리고 경찰 유치장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성인이 아니라면 아마 소년원 같은 곳이 더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학교, (정신)병원 등... 그런데 지금은 그나마 복지시설이 있어 그 곳으로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유럽의 복지제도가 발달한 과정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만일 이러한 시설이 더이상 이들을 수용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기사의 내용과 같이 '사회의 정신적 재활 능력이 부족'해서 복지시설의 예산을 늘리고 전문 상담사를 배치해서 정신적 재활 능력을 심어주고 이들을 사회로 내보낸다고 해결이 될까? 정신적 재활 능력을 가지고 나와도 받아주거 갈 곳이 없는 현실, 그 앞에서 확인하는 것은 소위 말하는 정신적 재활 프로그램들이 허구라는 것이다.

3) 사회적 수용의 한계
이 지점에서 젊은이들이 복지시설에 오게 된 과정들을 되돌아보면 지금의 문제는 사회의 정신적 재활 능력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기사에서도 '몸과 마음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이들이 찾아오고 있다'라고 쓰고 있다. 이는 결국 사회구조적 문제이고 젊은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 수용 능력'이 구조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자리 나눔의 문제와 사회적 분배 구조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다. 이는 노동시장의 문제이고, 현재와 같은 비정규 노동시장 구조로는 더이상 이 사회를 지탱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가 복지시설을 통해 소극적 저항 형태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5. 소극적 저항의 확산과 변화의 징후
하지만 이러한 형태의 저항은 확산하려고 한다고 확산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 내재적으로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징후를 나타내다가 어느 시점 급격히 확산될 수 있다. 물론 조건에 따라 다르겠지만 확산이론에서 S자 곡선은 이러한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수용자들의 시각 속에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소극적 사회 저항을 무능력자, 부랑자, 사회 적응 실패자라고 취급하고 있다.

확산을 막으려고 극단의 경우에는 유럽의 근대화 과정에서 구빈법이 부랑자법으로 바뀌었듯이 악으로 규정하고 범죄자로 몰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그 법들은 대부분 폐지됐다. 일시적으로는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계가 있는 것이다.

결국 나는 '무기력한 젊은 부랑자 증가'를 소극적 사회 저항의 증가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사회에서 수용할 수 없는 상태에 다다르면서 사회구조 자체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6. 사회적 재활프로그램의 대상들
그리고 나는 기사 내용과 같이 세상을 보는 시각들에 대해 화가 치민다. 젊은이들을 점점 무기력증에 빠지게 한 장본인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IMF이후 지금과 같은 정치-경제-법 제도적 변화의 필요성을 부추키고 선전해댄 언론들, 이에 맞장구를 치며 사회를 재단하고 설계한 사람들이 만나는 과정들...  

일반 대중들은 그래도 이들을 믿고 열심히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 삶은 더이상 견딜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 사회를 재단하고 설계해 온 장본인들은 슬쩍 빠져나가며 그 책임을 다시 일반 대중에게 돌리고 있다. 특히 이들은 젊은이들을 무기력증에 빠진 사람들로 평가를 하고 재활 프로그램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재활 프로그램의 대상은 젊은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시각을 가진 자들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