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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스콧 니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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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멜, 메트로폴리스와 정신적 삶


짐멜의 '메트로폴리스와 정신적 삶'(Georg Simmel, "The Metropolis and Mental Life")을 만났다.  왜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삶의 모습이 계산적이고 까칠할 수밖에 없나를 맑스나 베버와 같은 고전사회학자들보다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도시적 삶의 자유와 노동의 분화,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보여지는 삶의 태도들. 어쩌면 이 도시에서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서로를 그저 '일반화된 타자'로 여기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일종의 자기방어적 삶의 모습이다. 짐멜은 이러한 우리들의 삶의 모습들을 구태여 미워하거나 서운해하지 말자는 거다.

사회학에서는 맑스, 뒤르켐, 베버의 저작을 고전으로 삼기도 한다. 여기에 짐멜의 저작도 사회학적 고전의 반열에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짐멜의 저작은 맑스, 뒤르켐, 베버의 저작과 같이 체계적인 분석 속에서 이루어진 저작이 아니다. 짐멜의 저작은 대부분 article형태로 전체적인 사유체계는 글 속에서 유추해야 한다. 읽다보면 맑스, 베버, 뒤르켐의 사유들을 넘나들게 하며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게 짐멜이 갖는 힘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쉬움도 남는다. 하지만 체계적인 분석을 했다면 어땠을까? 오히려 지금보다도 뒤안길에 머물고 있을지도 모른다.

짐멜의 저작은 맑스의 사고와 유사하면서도 맑스가 분석하지 않은 지점을 건드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맑스는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의 생산에 중점을 두고 있다면 짐멜은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의 소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지점은 맑스의 '자본론'에서 상품과 화폐분석이 짐멜의 '돈의 철학'과 만나게 한다. 맑스는 물질적 생산 속에서 소외를 도출하고 이를 정신적 소외와 연결시킨다. 하지만 짐멜은 물질적 소비 속에서 소외(돈의 철학)을 도출하고 정신적 소외와 연결시키고 있다.

물질적-정신적 생산과 소비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동떨어질 수 없는 구조다. 헤겔과 맑스의 변증법은 이러한 물질적-정신적 생산과 소비가 서로 순환하며 재생산하는 관계 구조에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헤겔은 정신에, 맑스는 물질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다. 맑스는 물질적 생산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문화를 '(임금노동, 상품형태와 같은) 관습적이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을 자연적이고 불가피한 것으로 보이게끔 하는 것'으로, 실재에 대한 잘못되고 왜곡된 관점을 만들어내는 '허위의식'으로 보고 있다. 즉, 이데올로기적 지배를 위한 수단일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맑스의 분석은 기존 부르주아적 문화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을 뿐 노동자문화에 대한 분석은 하지 않고 있다. 적어도 맑스의 이론틀에서 보면 더 상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생산을 사회적 생산이라는 틀 속에서 분석하는 맑스의 틀에 의하면 문화도 사회적 생산과정에 의해 이미 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사회적 관계에서 소외되었건 아니면 지배자에 의해 전유되었건 문화 생산은 이미 사회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질적 생산과 정신적 생산, 그리고 그 소비를 통해 재생산되는 물질적 생산과 정신적 생산의 관계에 대한 분석의 결여는 베버의 계층구조에 의해 재구성되고 유형화되며 대체되었다. 하지만 베버의 저작에서는 물질적 생산과 정신적 생산, 양자의 규정관계를 모호하게 분리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는 파슨스의 이론으로 연결된다. 이에 반한 글들로 E.P Thompson의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이나 P.Bourdieu의 글들이 있지만 일반이론적 시도로 연결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이론적 공백 속에서 서비스사회로의 사회구조 변화와 문화산업 확대는 향후 베버와 파슨스의  이론에 기반한 사회학 이론들이 지금보다 힘을 얻고 득세할 수 있다.  

짐멜의 글도 베버나 맑스와 같이 사회구조를 도출하거나 거시 사회이론적 구축을 시도는 하지 않는다. 또한 물질적 생산과 정신적 생산의 규정관계를 도식적으로 구분하거나 유형화하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그 글들 속에 있는 단편적인 분석들은 오히려 거시 사회학 이론이나 사회학일반이론 차원으로 끌어올려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다. 이와 함께 예전에 남겼던 내 생각의 단편들(2006/11/03 자유의 재구성과 도시의 탈정치적 지배 )과도 연결해 봐야 할 것 같다. 




생산영역에서 부동산의 대표적 예는 토지와 생산장치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소비영역에서의 예는 주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분화는 산업화 과정 속에서 가속화 되었다.

산업화 과정에서 이러한 분화가 노동자들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농민에게 있어 토지라는 부동산이 했던 역할과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농민은 토지만 있으면 토막집이라도 짓고 먹고 살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산업도시에서 노동자들은 먹는 문제는 일터에서, 자는 문제는 일터 이외의 또 다른 장소에서 해결해야 했다. 즉 부동산이 일터와 집으로 분리된 것이다.

이러한 생산영역과 소비영역에서 부동산 역할의 분리와 그 소유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산영역의 부동산(토지와 생산장치)과 소비영역(주택)의 부동산으로 나누면 소유의 가능성에 따라 네 가지의 유형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두 영역을 다 소유하는 가능성, 둘 중 어느 한 영역만 소유하는 가능성, 둘 다를 소유하지 못하는 가능성으로 말이다. 또한 공동으로 소유하느냐 개별적으로 소유하느냐 즉 어떤 식으로 소유하느냐로도 다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노동자들이 생산영역의 부동산을 소유하는 것은 힘들다. 반면에 소비영역에서 주택이라는 부동산을 소유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하지만 이러한 소유의 분리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잠을 잘 수 있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만 먹고 사는 수단을 해결할 수 없는 구조를 갖는다. 즉 사회적 재생산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생산영역내 부동산을 소유하지 못하는 반면 소비영역에서 부동산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일종의 소유의 이중적 구조 속에 놓이는 것이다. 이러한 소유구조의 분리와 이중성은 소유의 가능성에 대한 환상과 함께 또 다른 형태의 지배구조를 강화시킨다.

부동산을 누가 어떤 식으로 소유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그 사회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부동산에 대한 소유가 소수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 즉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소수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소유구조는 사회 형태가 어떤 형태이건간에 그 사회의 기반을 흔드는 문제이다.

* 읽을만한 글들


* 토지 소유의 가능성에 대한 환상 [사례 1] - 부동산 투기
난장판 된 인천 송도 오피스텔 청약 현장[한국일보 2007. 3. 11]

                   자유의 재구성과 도시의 탈정치적 지배
                                      - 자유의 확장과 도시 소비를 중심으로 -

   
                                                                                                                   송용한


I. 들어가며 - 도시 성격의 변화에 대해
산업화시기 산업도시는 이성적 자유에 기반한 계획도시라 할 수 있다. 그 도시에는 특정의 주류 산업(제조업)이 지배하고 이에 걸맞는 지역적 공간배치가 이루어진다. 그 속에서 일상생활, 즉 사람들간의 관계가 재구성된다. 그러나 지금의 도시, 특히 대도시는 대부분 서비스 산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 속에 다양한 직종과 직업은 도시를 산업도시에서와 같은 일정한 질서가 아닌 무질서해보이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부는 이성이 지배하지 않는, 자유와 방종이 난무하는 모습으로 그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혼란스럽고 제멋대로인 것 처럼 보이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말 이성이 지배하지 않고 자유와 방종만이 난무하는 공간일까? 오히려 이성적 지배의 한계를 넘어서는 과정이고 또 다른 형태의 이성적 지배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미 누군가 이런 생각을 개념과 함께 정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내가 그런 생각의 글들을 만나 함께 고민하고 정리하지 못했다. 다만, 그 전에 지금의 생각들을 정리해보고 향후 이와 관련된 생각들이 어떻게 만날지 상상해 본다.    

II. 자유의 확장과 도시 소비 - 탈정치적 지배
1. 자유의 재구성 - 사회적 자유, 내면적 자유, 자연적 자유
스피노자, 칸트, 헤겔에게 있어 '자연적 자유'는 부정된다. 이 과정에서 '자의(自意)'를 규제하고 '이성적 자유'로서 '사회적 자유'를 체계화한다. 그것의 결정판이 '국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과정은 근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성립과 결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시장이건 계획경제건 이성에 의해 생산과 소비의 통제가 이루어지고 그 속에서 확대재생산과 자본주의적 축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맑스는 국가를 자본주의적 지배 도구로 해석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맑스도 '사회적 자유'를 지향한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한 지류에 놓여 있는 것이다. 레닌도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사회적 자유에 기반한 합리적 소비가 한계에 이르렀을 때 자본주의적 축적은 위기에 이른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이 '자연적 자유'를 다시 복원시키는 과정이고, 이것이 포스트모던과 자본주의가 다시 만나는 지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자유의 중심 축이 '이성'이라는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적 자유'에서 '행위적 자유'와 '내면적 자유'를 중시하는  '자연적 자유'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역에서 생산과 소비의 양식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곧바로 생산과 소비 양식이 재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는 자본주의적 해체과정과 이를 다시 자본주의적으로 재수용하는 과정이 놓여 있는 것이다. 먼저 자본주의적 해체의 사유 과정에 사르트르, 레비나스, 푸코가 있고 좀 더 최근의 선상에 데리다, 들뢰즈 등이 놓여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구체적인 내용은 세부 검토가 필요하다). 문제는 이러한 해체의 과정이 억압에서 자유를 확장하는 형태의 운동으로 나타나지만, 이 과정이 오히려 자본주의적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자유의 주체와 대상의 문제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적으로 보면 즉자존재와 대자존재의 구별과 자유를 '존재하는 무'의 세계로 보는 의 한계일 수 있다. 존재하는 무를 찾아 나서는 끊임없는 관계의 복원과정이 합리적 이성을 뛰어넘는 것처럼 보이지만, 존재하는 무라는 것이 오히려 이성을 호출하고 이성을 강화하고 기존의 이성적 지배를 변형적 지배로 만드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내가 있지만 나도 나를 알 수 없기에 부단히 나를 찾아 나서야 하는 과정이 오히려 이성에 의해 포획되는 기회와 그 틀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2. 도시의 소비와 자유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현대 도시는 자유스럽고 비이성적인 곳으로 보이지만 그렇게 자유스럽거나 비이성적인 곳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기존 이성의 지배가 공고화되고 이를 넘어서는 범위로 자유의 범위를 확장하는 과정에 놓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사회적 자유'에서 '내면적 자유'를 통해 '자연적 자유'까지 범위를 재구성과정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의 소비는 확장되고 재구성된 자유에 따라 다시 분화될 수 있다. 사회적 자유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의 소비, 자연적 자유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의 소비가 존재하는 것이다. 사회적 자유가 허용하는 범위는 산업자본주의적 소비양식, 즉 버는 한도 내에서 소비의 자유가 허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생산으로 선순환되는 합리적 소비가 전제되고 그 소비의 대상과 한계가 정해져 있다. 사치품이 아닌 기본적인 의식주 과정에 대한 소비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레져나 향락성 소비는 또 다른 성격의 자유와 만나는 소비형태가 아닌가 싶다. 그것은 자연적 소비와 그 한계, 즉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지만 나를 찾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 기존의 일상과 만나는 것이다. 구속을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내면적 자유일 뿐이다.

3. 주체의 분할과 탈정치적 지배
이러한 도시적 자유와 소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첫 번째로는 자유가 확장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성적 자유에 의한 억압에서 벗어나 행위적 자유와 내면적 자유라는 자연적 자유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자연, 즉 자연적 자유가 아닌 자연 그 자체로 돌아갈 수 없는 자유 속의 자유, 결국 이성적 자유의 틀 속에서 외연을 확장시키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돈과 시간만 있으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두 번째, 주체의 분할을 의미한다. 특히 내면적 자유가 이성적 자유의 범위 내에서 해소되는 (소비)과정에서 이 분할의 선은 구체화된다. 이종영은 내면성과 내면적 자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내면에 있어 '구속'이 부과되기 전에 존해하는 것은 모든 인간마다 상이한, 개인의 고유한 내면성일 뿐이다. 이 내면성은 온갖 형태의 규정성들이 개입하는 고유한 개인적 체험들의 축적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고유한 내면이 '자유'의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은 1) 그 내면과 대립되는 '외부적 구속'이 부과될 때, 2) 그리고 그 개인이 외부의 구속에 종속됨에 따라 그의 외적 행위가 내면과 분리될 때이다.
사르트르적으로 말하면 대자적 자유 속에서 자기를 대면하고 자기를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내면이 부재하는 '나'라는 즉자적 한계, 결국 '나'를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기를 벗어나는 과정은 개별적으로 분할을 확장시킨다. 그리고 외부의 구속에 종속되는, 즉 소비양식에 지배를 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도시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주체에 의한 다양한 하위문화의 한 측면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체의 분할은 세 번째, 기존 정치의 해체적 분할 지배를 의미한다. 정치체제는 집단적으로 특정한 형태의 '사회적 자유'들만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도시에서 보여지는 자유의 확장과 주체의 분할은 이러한 기존의 집단적 정치를 해체한다. 그럼에도 '이성적 자유', 즉 '사회적 자유'에 포획됨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집단적 정치가 존재하고 정치형식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네트워크 사회 또는 리좀 문화가 의미하는 것이 이러한 측면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III. 결론
포스트모던적 삶이라 할 수 있는 도시적 삶을 자유의 재구성적 측면에서 보면 도시적 삶은 자유의 확장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 그 자체의 한계, 그리고 자유에 대한 추구가 어떤 형태의 자유에 대한 추구인가에 따라 다시 한계지워지고 모던(근대성)에 지배되는 현실로 되돌아 온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포스트모던은 단지 근대를 재구성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탈근대 과정에서 기존의 근대성이 가지고 있던 이성은 한 단계 높은 추상적 이성으로 다시 자리 잡고, 모던 시대의 이성은 다시 중세의 신의로 또는 즉자적인 '나'라는 개인으로 또는 자연으로 대체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도시적 삶은 종잡을 수 없는 다양한 잡종적 삶의 모습으로 보여지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는 근대의 이성을 벗어나는 대체물을 찾지 못했다. 현실 속에서 그 대체물을 찾는 과정은 국가를 부정하고 기존의 정치를 부정하는 자율주의 운동 또는 아나키즘적 운동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대체물에 대한 탐구 과정이 탈정치적 분할 지배의 틀과 만날 수 있는 이론적 틀을 제공하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