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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스콧 니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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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자의반 타의반 ‘한국 민주주의 회고와 전망’ 심포지엄 토론회에 들르다. '열광과 좌절의 싸이클을 넘어-민주주의 위기와 제2의 민주화 모색'이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다. 내겐 최근 참가했던 토론회 중 가장 많은 아이디어를 던져주는 토론회가 아니었나 싶다. 관련 기사와 핵심주제들, 그리고 내게 남는 단상들을 남기다.

[관련기사]
- 관련 자료집 [열광과 좌절의 싸이클을 넘어] 다운로드
- [알림] ‘한국 민주주의 회고와 전망’ 심포지엄 한겨레 생활/문화 2010.04.12
- “한국 참여민주주의 심각한 위기” 한겨레 사회 2010.04.14 (수)
- 최장집, “민족 중심의 민주/반민주구도 퇴영적이고 과거지향적” 폴리뉴스 정치 2010.04.14
- [제2의 민주화 모색 토론회]박태균, “4.19혁명, 미국 헤게모니 역할이 중요” 폴리뉴스 사회 2010.04.14
- [제2의 민주화 모색 토론회]김진호, “촛불, 불온한 시민종교의 탄생” 폴리뉴스 사회 2010.04.14
- [제2의 민주화 모색토론회]고정갑희, “적녹보라적인 운동으로 전환해야” 폴리뉴스 사회 2010.04.14
- [제2의 민주화 모색 토론회]홍종학, “해밀턴 전략 통한 성장 필요” 폴리뉴스 사회 2010.04.14
- [제2의 민주화 모색 토론회]고병권, “스스로의 근거를 문제 삼을 수 있는 체제가 민주주의” 폴리뉴스 사회 2010.04.14
- [제2의 민주화 모색 토론회]김종엽 “민주적 법치와 복지국가 선순환 안돼 MB정부 등장” 폴리뉴스 사회 2010.04.14
- [제2의 민주화 모색 토론회]김정훈, “진보와 보수의 갈등은 합리와 비합리의 갈등” 폴리뉴스 사회 2010.04.14
- [제2의 민주화 모색 토론회]최갑수, “노무현 정권도 ‘기업 프렌들리’였다” 폴리뉴스 사회 2010.04.14
- "참여정부, 재벌과 관료들에게 포획돼 있었다" 노컷뉴스 정치 2010.04.15

II. 내부화된 외부 주체와 잃어버린 주체


최장집은 기조연설을 통해 한국사회 민주화의 장애로 국가의 부활과 시민의 정치 참여 위기, 허약한 정당체제를 지적하고 있다. 이는 한국사회가 겪은 압축적 근대화의 결과이다.

이러한 압축근대화 속에서 한국사회는 "민주화 세력이 한 번도 헤게모니를 잡은 적이 없다. 비록 정권을 잡은 적은 있지만 진보이념이 사회자체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헤게모니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험을 해왔다"(박태균). 그러나 정일준은 이 과정에서 "미국은 '내부화된 외부 또는 구성된 외부'로 단순히 외부로 볼 수 없는 한계가 있으며, 한국사회는 '압축적 미국화'를 경험했다"고 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압축근대화 속에서 한국과 미국은 동일한 주체로 결합되는 '구조적 접합의 장' 속에 놓여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정일준은 주체보다 주체의 접합이 이루어지는 장에 대한 분석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미국이라는 '내부하된 외부주체'에 반해, 역으로 잃어버린 주체가 있다. 일종의 '사장된 내부주체'라고 할까?  고정갑희는 이러한 문제를 여성을 비롯한 대안적 주체들의 틀 속에서 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잃어버린 주체, 또는 주체의 누락이 어떻게 생산되는가도 고민해봐야할 지점이다. 고정갑희는 '가부장적 폭력'과 '국가폭력' 그리고 '자본의 폭력'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가부장은 문화나 이데올로기로 보지만, 사실은 문화가 아니고 자본과 국가가 어우러진 결과로 엄연한 하나의 체제로 봐야함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 세 폭력들의 어우러짐 속에서 이 사회는 다양한 주체를 누락시키고 제외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례가 낙태문제, 매춘노동의 문제, 기륭전자 여성노동자 문제, 이주노동자 문제, 용산참사 문제 등일 것이다.

하지만 잃어버린 주체나 누락된 주체를 말하고 재해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김원은 민주화 과정에서 이러한 주체가 왜 재해석되지 못했나를 봐야함을 주문한다. 그것은 기존 민주화 운동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그러한 비판 또는 반성없이 민주화 주체에 여성 주체와 같은 잃어버린 주체를 추가하는 사유는 단지 '온정주의'적 시각에 지나지 않는다.


III. '천민적으로 시장화된 시민주체'와 '한국적 시민종교의 탄생'

0. 천민적으로 시장화된 주체

랑시에르는 정치와 민주화, 그리고 주체 문제에 대해 '정치의 제도화'를 주장한다. 최장집도 이러한 선상에 있다. 이에 반해 조희연은 '정치의 사회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는 주체의 구성과 이의 실현이 제도를 통해 또는 사회를 통해 이루어져야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김진호는 한국사회의 압축적 근대화는 '정치의 사사화'로 수렴되고 있음 주장한다. 다시말해, 최장집이나 조희연의 생각은 일종의 바램일 수 있지만 현실은 그 반대라는 것이다.
김진호가 보기에  한국사회는 압축적 근대화 속에서 독재와 시장화의 경험을 겪고, 이 속에서 시민은 "천민적으로 시장화된 시민"이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대중의 무한 경쟁 상황이 통합 축"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일상생활 속의 정치와 권력은 개인의 영달과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며, 이를 위한 무한경쟁은 체제의 붕괴가 아니라 오히려 현 체제를 유지시키는 일종의 통합 기능을 한다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이러한 무한경쟁은 "타자의 몰락과 자신의 주체화란 모순적 딜레마"을 겪게 한다. 이러한 딜레마는 민주화 속에는 불안과 딜레마가 있음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민주화는 좋다라는 식으로 '감정적 공조'를 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 이것을 사회적으로 묶어주는 '의미의 틀'이 없는 것이다. 즉, '감정적 공조'는 가능하지만 현실로 돌아와서는 내가 살고봐야하는 것이다.

0.  '한국적 시민종교의 탄생' : 종교의례 같은 착각 속의 민주화?
김진호는 '감정적 공조'는 있으나 그것을 엮는 '의미틀'이 부재하는 현 상황은 마치 '종교의례'와 같다고 본다. 종교의례는 의례 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틀을 열어 놓고 이중적 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즉, 현재 나타나는 민주화는 이러한 종교의례와 같은 착각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촛불시위와 같이 사람들은 모이기도 하지만 그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절에 가서는 무소유를 생각하면서도 현실로 돌아와서는 하나라도 더  늘리는 부동산투기를 해야하는 것이다. 교회에 가서는 사랑과 믿음을 얘기하지만 현실에 그런 사람은 바보다. 항상 의심하고 확인해야 한다.

결국 한국사회 속의 주체들은 존재의 딜레마를 해소하기위해 마치 '종교의례' 같은 정치적 착각 속의 의례 속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김진호는 촛불시위를 오히려 불온하게 본다. 그리고 이를 '한국적 시민종교의 탄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진보적으로 생각한다는 사람들은 촛불시위를 불온하게 보지 않았다. 아니 오리혀 새로운 주체의 형성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김진호의 시각에서 보면 기존의 촛불시위에 대한 진보의 생각과 평가는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일종의 '한국적 시민종교의 탄생'을 찬양하며, 종교적 의례 속에서 안일함을 추구하는 이중적 생활을 하는 것일 수 있다.


IV. 제2의 민주화와 모순적 시민

하지만 김진호의 주장처럼 한국사회에서 주체를 '천민적'으로 시장화된 주체로 볼 수 있는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그렇게 되면 남는게 없다. 이성백은 오히려 근대화, 그리고 근대화된 시민이 의미하는 것은 '시장의 인간'으로 봐야 함을 지적한다. 이를 두고 '천민적으로 시장화된 시민'으로 평가하는 것은 오히려 시민을 고대의 철인으로 보려는 생각인 것이다. 즉, 김진호와 같은 비판은 '계몽적 민주화'의 사유 속에서 민주화를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가 가능하다.

이성백은 마키아벨리적 시민이 오히려 근대적 시민이고, 그 속에서 존재의 딜레마를 겪는 것을 받아들여야 함을 주장한다. 비록 권모술수적으로 움직이는 시민을 근대시민으로 받아들일 때 제2의 민주화가 오히려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전에는 이러한 시민을 믿지 못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보고 누군가 지도를 해야했던 민주화가 지난 민주화라고 하면, 이제는  그것을 벗어나야하고 이를 위해 있는 그대로의 주체를 인정해야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근대사회에서 주체는 항상 '천민적으로 시장화된 시민'으로의 압력에 있으며, 이에 대한 딜레마 속에서 항상 저항이 존재하고 재구성된다고 본다. 일종의 주체의 변증법적 재구성이라고 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현재 국면이 어떠한 국면에 있느냐 하는 점이라는 생각이다. 그에 대한 판단이 부재하는 것은 양비론적 시각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판단을 유보하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거다. 이와 관련해, 나는 '천민적으로 시장화된 시민'의 심화라는 김진호의 지적에 동의한다.  


I. 세종시 발전방안
행정부처 세종시 이전 전면 백지화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나는 한마디로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층이 민주주의라는 형식을 빌어서 정치-경제-문화-사회적 권력 독점의 분산을 거부한 결과라고 평가하고 싶다.

II. 원안 축소 속에 나타난 발전방안
이번 2010년 1월 11일 발표한 아래 발전방안을 살펴보면 지난 2007년 7월 19일 발표한 원안과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번 발전방안은 원안을 축소하여 발표하는 한편 기존 원안에 있던 부차적인 내용들을 확대하여 발표하고 있다.

이번 발전방안에서는 원안이 '행정기능(+복합기능)'으로 표기하고 발전방안에 '산업,대학,연구기능'으로 변경한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원안의 복합기능에는 이미 산업, 대학, 연구기능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용인구도 이번 원안에는 8.4만명, 발전방안 24.6만명으로 정리하고 있지만 2007년 원안에는 20만개의 일자리를 갖춘 자족도시로 그리고 있다. 총인구 또한 이번 발표의 원안에는 17만명 발전방안에는 50만명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2007년 발표 원안에는 2030년까지 50만명의 복합기능도시로 발표했다.

투자유치도 이번 원안발표에는 9부 2처 2청으로 표기하고 발전방안에는 정부이전은 빼고 투자유치와 투자 기업들을 나열하고 있다. 그러나 2007년 원안에는 12부 4처 2청 이전과 자족도시 건설을 목표로 했다. 즉, 투자 유치 기업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번 발전방안과 같이 기업을 나열하는 식으로 발표하지는 않았다. 원안에서 상수는 행정부처 이전이고 변수는 그에 부수적으로 기업투자 유치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2007년 발표, 세종시 이전 원안]
이용섭 장관, "세종시, 국토균형발전 선도할 것" [정책포털 공감코리아] 2007.07.19
모두가 행복한 도시…‘세종시’ 착공 [정책포털 공감코리아] 2007.07.19

[2010년 발표, 세종시 이전 원안 및 발전방안]
세종시, 인구 50만 미래형 첨단경제도시 건설 [정책포털 공감코리아] 2010.01.11
세종시 발전방안 보도자료 [정책포털 공감코리아] 2010.01.11

구 분

원 안

발 전 방 안

도시성격

행정중심복합도시

교육과학중심의 경제도시

자족용지

6.7% (486만㎡)

20.7% (1,058만㎡)

주요기능

행정기능 (+복합기능)

산업·대학·연구기능

투자유치

9부 2처 2청

과학벨트, 삼성, 한화, 웅진, 롯데, SSF 사 등

투자규모

8.5조원 (재정)

16.5조원 (재정 8조원 + 과학벨트 3.5조원 + 민간기업 4.5조원)

고용인구

8.4만명

24.6만명 (원안의 약3배)

총인구

17만명

50만명

인센티브

없음

맞춤형 부지공급, 세제지원, 규제완화 등

도시인프라

2030년까지 단계적 개발

2020년까지 집중개발

III. 정치-경제-사회적 권력 독점과 지역 불균형 발전
권력은 단순히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 문화의 영역에도 존재한다. 그리고 각 영역은 서로의 권력을 공유한다. 대부분 이러한 권력은 도시에 집중된다. 문제는 이것이 한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때 권력의 독점이 강화되고 이를 누리는 기득권층과 이로부터 배제된 층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불균형적인 지역발전의 원인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특히나 서울을 중심으로 수도권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다는 문제가 있다.

서울에서 수도권(고속도로를 타고 용인쯤)만 벗어나면 대부분 비슷비슷한 모습이다. 시골도 아니고 번화한 도시도 아니고 모두가 어중간한 시골도시들 뿐이다. 지역 불균형발전...막상 지역에 내려가서 살려고 해도 딱히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정치라는 것도 지역 토호들 중심이고 누릴 수 있는 문화도 없다. 읍으로 나와야 있는 문화시설이라고는 술집과 몇 개 노래방들뿐... 그래서 이래저래 서울로 올라온다.

이러한 지역불균형 발전에 따른 문제의 해결방법 중 하나가 행정부처의 세종시 이전 방법이 아니었나 싶다. 쉽게 생각하면 행정부처 이전, 즉 수도권에 독점되어 있는 정치,경제,문화적 권력 중 정치 영역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행정부처를 옮기는 거였다. 하지만 이러한 해결책은 근본적으로 본다면 미봉책이었다. 보다 근본적이라면 오히려 정치권력의 핵심인 국회와 청와대를 이전하는 것이 맞다. 즉, 행정부처의 세종시 이전은 국회와 청와대 이전에 대한 차선책으로 나온 대안이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안책마저도 기득권을 누리던 기존 계층은 거부하기 마련이다. 기존에 누리던 혜택을 잃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수도권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존에 누리던 권력 형태의 분산과 이전을 원하지 않는다. 결국 현재 세종시 행정부처 이전문제의 백지화는 이러한 권력 분산을 기득권 세력, 특히 서울과 수도권에 거주하는 기득권층의 반대에 기반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IV. 여론조사? 여론조작?
지금은 행정부처 세종시 이전 전면 백지화를 놓고 시끄럽지만, 오히려 국회와 청와대 이전문제를 논의해야 하는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은 기존의 행정부처 이전 문제마저도 백지화하고 이에 대한 합리화와 여론몰이 작업을 하고 있다. 의도된 여론의 변화 작업, 즉 새로운 안이 경제적으로 더 발전적이고 자족적 모습을 갖추었다는 인상과 여론작업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여론조사도 발전방안 지지로 바뀔 것이다(장기적으로 봐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에서 세종시로 국회 이전이나 청와대 이전 논의는 앞으로 나오기가 더 힘들다. 기존에 나왔던 논의는 물론 반대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녹색뉴스포털 그린투데이 GT! :: “국회 세종시 이전 반대 43%”

특히 여론조사는 수도권 거주자라는 기득권층의 여론이 반영되고 이는 행정부처 이전의 백지화마저도 정당화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 결국 정치적으로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빌어 세종시 행정부처 이전안의 백지화가 향후 충분히 관철될 수 있다.

세종시,여론 봐가며 진행”..법령 제·개정엔 ‘신중모드’ 파이낸셜뉴스 경제 2010.01.13 (수)

이 과정 속에서 정치적으로는 한나라당 내에서 박근혜의 백지화 반대와 이명박의 백지화와 수정안이 대결 구도를 달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이나 진보신당, 민노당 등의 반대안은 박근혜의 논의와 차별점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단지 박근혜 반대안의 언저리 정도로 자리잡고 있다. 일면 한나라당 내의 분열로 보일 수 있지만, 이는 결국 한나라당 내에서 세종시 행정부처 이전안의 찬성과 반대라는 정치적 의제를 모두 잡고 있는 형국이다.  

[세종시 신안(新案) 발표 이후] 청와대, 박근혜 발언 시점에 주목 중앙일보 정치 2010.01.14
[세종시 수정안 이후] 박근혜 잇단 ‘쐐기’ 친박 표단속 서울신문 정치 2010.01.14 (목)

아무튼... 여론조사의 표본구성을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다. 이번 여론조사는 표본구성에 대한 발표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표본이 지역 거주비율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면 여론조사의 표본 중 수도권 거주자가 많이 포함된다. 이러한 상태에서의 여론조사 결과, 즉 수도권 거주자라는 기득권층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는 여론조사는 행정부처 백지화안에 대한 찬성 비율이 높을 것을 어느정도 예측할 수 있다.

이 지점은 여론조사라는 형식을 통해 여론조작으로 이어질 수 있다. 즉, 지역에 따른 거주자 비율로 표본을 설정해 여론조사를 하면 인구밀도가 높은 수도권을 중심으로 발전방안에 대한 높은 찬성률이 나올 수 있고, 지역별로 동일한 수로 표본을 구성해 여론조사를 하면 발전방안에 대한 높은 반대결과가 나올 수 있다.     

[세종시 수정안 이후] 안갯속 여론… 같은 조사기관도 수정안 지지 7%P차 서울신문 사회 2010.01.14 (목)
충청민 64% "세종시 원안 고수" 충청일보 정치 2010.01.13 (수)

                   자유의 재구성과 도시의 탈정치적 지배
                                      - 자유의 확장과 도시 소비를 중심으로 -

   
                                                                                                                   송용한


I. 들어가며 - 도시 성격의 변화에 대해
산업화시기 산업도시는 이성적 자유에 기반한 계획도시라 할 수 있다. 그 도시에는 특정의 주류 산업(제조업)이 지배하고 이에 걸맞는 지역적 공간배치가 이루어진다. 그 속에서 일상생활, 즉 사람들간의 관계가 재구성된다. 그러나 지금의 도시, 특히 대도시는 대부분 서비스 산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 속에 다양한 직종과 직업은 도시를 산업도시에서와 같은 일정한 질서가 아닌 무질서해보이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부는 이성이 지배하지 않는, 자유와 방종이 난무하는 모습으로 그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혼란스럽고 제멋대로인 것 처럼 보이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말 이성이 지배하지 않고 자유와 방종만이 난무하는 공간일까? 오히려 이성적 지배의 한계를 넘어서는 과정이고 또 다른 형태의 이성적 지배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미 누군가 이런 생각을 개념과 함께 정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내가 그런 생각의 글들을 만나 함께 고민하고 정리하지 못했다. 다만, 그 전에 지금의 생각들을 정리해보고 향후 이와 관련된 생각들이 어떻게 만날지 상상해 본다.    

II. 자유의 확장과 도시 소비 - 탈정치적 지배
1. 자유의 재구성 - 사회적 자유, 내면적 자유, 자연적 자유
스피노자, 칸트, 헤겔에게 있어 '자연적 자유'는 부정된다. 이 과정에서 '자의(自意)'를 규제하고 '이성적 자유'로서 '사회적 자유'를 체계화한다. 그것의 결정판이 '국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과정은 근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성립과 결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시장이건 계획경제건 이성에 의해 생산과 소비의 통제가 이루어지고 그 속에서 확대재생산과 자본주의적 축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맑스는 국가를 자본주의적 지배 도구로 해석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맑스도 '사회적 자유'를 지향한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한 지류에 놓여 있는 것이다. 레닌도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사회적 자유에 기반한 합리적 소비가 한계에 이르렀을 때 자본주의적 축적은 위기에 이른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이 '자연적 자유'를 다시 복원시키는 과정이고, 이것이 포스트모던과 자본주의가 다시 만나는 지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자유의 중심 축이 '이성'이라는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적 자유'에서 '행위적 자유'와 '내면적 자유'를 중시하는  '자연적 자유'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역에서 생산과 소비의 양식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곧바로 생산과 소비 양식이 재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는 자본주의적 해체과정과 이를 다시 자본주의적으로 재수용하는 과정이 놓여 있는 것이다. 먼저 자본주의적 해체의 사유 과정에 사르트르, 레비나스, 푸코가 있고 좀 더 최근의 선상에 데리다, 들뢰즈 등이 놓여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구체적인 내용은 세부 검토가 필요하다). 문제는 이러한 해체의 과정이 억압에서 자유를 확장하는 형태의 운동으로 나타나지만, 이 과정이 오히려 자본주의적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자유의 주체와 대상의 문제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적으로 보면 즉자존재와 대자존재의 구별과 자유를 '존재하는 무'의 세계로 보는 의 한계일 수 있다. 존재하는 무를 찾아 나서는 끊임없는 관계의 복원과정이 합리적 이성을 뛰어넘는 것처럼 보이지만, 존재하는 무라는 것이 오히려 이성을 호출하고 이성을 강화하고 기존의 이성적 지배를 변형적 지배로 만드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내가 있지만 나도 나를 알 수 없기에 부단히 나를 찾아 나서야 하는 과정이 오히려 이성에 의해 포획되는 기회와 그 틀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2. 도시의 소비와 자유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현대 도시는 자유스럽고 비이성적인 곳으로 보이지만 그렇게 자유스럽거나 비이성적인 곳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기존 이성의 지배가 공고화되고 이를 넘어서는 범위로 자유의 범위를 확장하는 과정에 놓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사회적 자유'에서 '내면적 자유'를 통해 '자연적 자유'까지 범위를 재구성과정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의 소비는 확장되고 재구성된 자유에 따라 다시 분화될 수 있다. 사회적 자유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의 소비, 자연적 자유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의 소비가 존재하는 것이다. 사회적 자유가 허용하는 범위는 산업자본주의적 소비양식, 즉 버는 한도 내에서 소비의 자유가 허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생산으로 선순환되는 합리적 소비가 전제되고 그 소비의 대상과 한계가 정해져 있다. 사치품이 아닌 기본적인 의식주 과정에 대한 소비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레져나 향락성 소비는 또 다른 성격의 자유와 만나는 소비형태가 아닌가 싶다. 그것은 자연적 소비와 그 한계, 즉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지만 나를 찾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 기존의 일상과 만나는 것이다. 구속을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내면적 자유일 뿐이다.

3. 주체의 분할과 탈정치적 지배
이러한 도시적 자유와 소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첫 번째로는 자유가 확장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성적 자유에 의한 억압에서 벗어나 행위적 자유와 내면적 자유라는 자연적 자유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자연, 즉 자연적 자유가 아닌 자연 그 자체로 돌아갈 수 없는 자유 속의 자유, 결국 이성적 자유의 틀 속에서 외연을 확장시키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돈과 시간만 있으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두 번째, 주체의 분할을 의미한다. 특히 내면적 자유가 이성적 자유의 범위 내에서 해소되는 (소비)과정에서 이 분할의 선은 구체화된다. 이종영은 내면성과 내면적 자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내면에 있어 '구속'이 부과되기 전에 존해하는 것은 모든 인간마다 상이한, 개인의 고유한 내면성일 뿐이다. 이 내면성은 온갖 형태의 규정성들이 개입하는 고유한 개인적 체험들의 축적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고유한 내면이 '자유'의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은 1) 그 내면과 대립되는 '외부적 구속'이 부과될 때, 2) 그리고 그 개인이 외부의 구속에 종속됨에 따라 그의 외적 행위가 내면과 분리될 때이다.
사르트르적으로 말하면 대자적 자유 속에서 자기를 대면하고 자기를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내면이 부재하는 '나'라는 즉자적 한계, 결국 '나'를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기를 벗어나는 과정은 개별적으로 분할을 확장시킨다. 그리고 외부의 구속에 종속되는, 즉 소비양식에 지배를 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도시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주체에 의한 다양한 하위문화의 한 측면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체의 분할은 세 번째, 기존 정치의 해체적 분할 지배를 의미한다. 정치체제는 집단적으로 특정한 형태의 '사회적 자유'들만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도시에서 보여지는 자유의 확장과 주체의 분할은 이러한 기존의 집단적 정치를 해체한다. 그럼에도 '이성적 자유', 즉 '사회적 자유'에 포획됨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집단적 정치가 존재하고 정치형식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네트워크 사회 또는 리좀 문화가 의미하는 것이 이러한 측면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III. 결론
포스트모던적 삶이라 할 수 있는 도시적 삶을 자유의 재구성적 측면에서 보면 도시적 삶은 자유의 확장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 그 자체의 한계, 그리고 자유에 대한 추구가 어떤 형태의 자유에 대한 추구인가에 따라 다시 한계지워지고 모던(근대성)에 지배되는 현실로 되돌아 온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포스트모던은 단지 근대를 재구성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탈근대 과정에서 기존의 근대성이 가지고 있던 이성은 한 단계 높은 추상적 이성으로 다시 자리 잡고, 모던 시대의 이성은 다시 중세의 신의로 또는 즉자적인 '나'라는 개인으로 또는 자연으로 대체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도시적 삶은 종잡을 수 없는 다양한 잡종적 삶의 모습으로 보여지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는 근대의 이성을 벗어나는 대체물을 찾지 못했다. 현실 속에서 그 대체물을 찾는 과정은 국가를 부정하고 기존의 정치를 부정하는 자율주의 운동 또는 아나키즘적 운동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대체물에 대한 탐구 과정이 탈정치적 분할 지배의 틀과 만날 수 있는 이론적 틀을 제공하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