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투데이 - 도시의 삶과 노동, 그리고 민주주의 : 위치로그 : 태그 : 방명록 : 관리자 : 새글쓰기
워킹투데이 - 도시의 삶과 노동, 그리고 민주주의 블로그에 오신것을 환영해요^^
생각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스콧 니어링
61
44
181912
'주체'에 해당되는 글 4건
I.
자의반 타의반 ‘한국 민주주의 회고와 전망’ 심포지엄 토론회에 들르다. '열광과 좌절의 싸이클을 넘어-민주주의 위기와 제2의 민주화 모색'이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다. 내겐 최근 참가했던 토론회 중 가장 많은 아이디어를 던져주는 토론회가 아니었나 싶다. 관련 기사와 핵심주제들, 그리고 내게 남는 단상들을 남기다.

[관련기사]
- 관련 자료집 [열광과 좌절의 싸이클을 넘어] 다운로드
- [알림] ‘한국 민주주의 회고와 전망’ 심포지엄 한겨레 생활/문화 2010.04.12
- “한국 참여민주주의 심각한 위기” 한겨레 사회 2010.04.14 (수)
- 최장집, “민족 중심의 민주/반민주구도 퇴영적이고 과거지향적” 폴리뉴스 정치 2010.04.14
- [제2의 민주화 모색 토론회]박태균, “4.19혁명, 미국 헤게모니 역할이 중요” 폴리뉴스 사회 2010.04.14
- [제2의 민주화 모색 토론회]김진호, “촛불, 불온한 시민종교의 탄생” 폴리뉴스 사회 2010.04.14
- [제2의 민주화 모색토론회]고정갑희, “적녹보라적인 운동으로 전환해야” 폴리뉴스 사회 2010.04.14
- [제2의 민주화 모색 토론회]홍종학, “해밀턴 전략 통한 성장 필요” 폴리뉴스 사회 2010.04.14
- [제2의 민주화 모색 토론회]고병권, “스스로의 근거를 문제 삼을 수 있는 체제가 민주주의” 폴리뉴스 사회 2010.04.14
- [제2의 민주화 모색 토론회]김종엽 “민주적 법치와 복지국가 선순환 안돼 MB정부 등장” 폴리뉴스 사회 2010.04.14
- [제2의 민주화 모색 토론회]김정훈, “진보와 보수의 갈등은 합리와 비합리의 갈등” 폴리뉴스 사회 2010.04.14
- [제2의 민주화 모색 토론회]최갑수, “노무현 정권도 ‘기업 프렌들리’였다” 폴리뉴스 사회 2010.04.14
- "참여정부, 재벌과 관료들에게 포획돼 있었다" 노컷뉴스 정치 2010.04.15

II. 내부화된 외부 주체와 잃어버린 주체


최장집은 기조연설을 통해 한국사회 민주화의 장애로 국가의 부활과 시민의 정치 참여 위기, 허약한 정당체제를 지적하고 있다. 이는 한국사회가 겪은 압축적 근대화의 결과이다.

이러한 압축근대화 속에서 한국사회는 "민주화 세력이 한 번도 헤게모니를 잡은 적이 없다. 비록 정권을 잡은 적은 있지만 진보이념이 사회자체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헤게모니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험을 해왔다"(박태균). 그러나 정일준은 이 과정에서 "미국은 '내부화된 외부 또는 구성된 외부'로 단순히 외부로 볼 수 없는 한계가 있으며, 한국사회는 '압축적 미국화'를 경험했다"고 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압축근대화 속에서 한국과 미국은 동일한 주체로 결합되는 '구조적 접합의 장' 속에 놓여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정일준은 주체보다 주체의 접합이 이루어지는 장에 대한 분석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미국이라는 '내부하된 외부주체'에 반해, 역으로 잃어버린 주체가 있다. 일종의 '사장된 내부주체'라고 할까?  고정갑희는 이러한 문제를 여성을 비롯한 대안적 주체들의 틀 속에서 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잃어버린 주체, 또는 주체의 누락이 어떻게 생산되는가도 고민해봐야할 지점이다. 고정갑희는 '가부장적 폭력'과 '국가폭력' 그리고 '자본의 폭력'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가부장은 문화나 이데올로기로 보지만, 사실은 문화가 아니고 자본과 국가가 어우러진 결과로 엄연한 하나의 체제로 봐야함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 세 폭력들의 어우러짐 속에서 이 사회는 다양한 주체를 누락시키고 제외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례가 낙태문제, 매춘노동의 문제, 기륭전자 여성노동자 문제, 이주노동자 문제, 용산참사 문제 등일 것이다.

하지만 잃어버린 주체나 누락된 주체를 말하고 재해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김원은 민주화 과정에서 이러한 주체가 왜 재해석되지 못했나를 봐야함을 주문한다. 그것은 기존 민주화 운동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그러한 비판 또는 반성없이 민주화 주체에 여성 주체와 같은 잃어버린 주체를 추가하는 사유는 단지 '온정주의'적 시각에 지나지 않는다.


III. '천민적으로 시장화된 시민주체'와 '한국적 시민종교의 탄생'

0. 천민적으로 시장화된 주체

랑시에르는 정치와 민주화, 그리고 주체 문제에 대해 '정치의 제도화'를 주장한다. 최장집도 이러한 선상에 있다. 이에 반해 조희연은 '정치의 사회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는 주체의 구성과 이의 실현이 제도를 통해 또는 사회를 통해 이루어져야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김진호는 한국사회의 압축적 근대화는 '정치의 사사화'로 수렴되고 있음 주장한다. 다시말해, 최장집이나 조희연의 생각은 일종의 바램일 수 있지만 현실은 그 반대라는 것이다.
김진호가 보기에  한국사회는 압축적 근대화 속에서 독재와 시장화의 경험을 겪고, 이 속에서 시민은 "천민적으로 시장화된 시민"이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대중의 무한 경쟁 상황이 통합 축"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일상생활 속의 정치와 권력은 개인의 영달과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며, 이를 위한 무한경쟁은 체제의 붕괴가 아니라 오히려 현 체제를 유지시키는 일종의 통합 기능을 한다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이러한 무한경쟁은 "타자의 몰락과 자신의 주체화란 모순적 딜레마"을 겪게 한다. 이러한 딜레마는 민주화 속에는 불안과 딜레마가 있음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민주화는 좋다라는 식으로 '감정적 공조'를 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 이것을 사회적으로 묶어주는 '의미의 틀'이 없는 것이다. 즉, '감정적 공조'는 가능하지만 현실로 돌아와서는 내가 살고봐야하는 것이다.

0.  '한국적 시민종교의 탄생' : 종교의례 같은 착각 속의 민주화?
김진호는 '감정적 공조'는 있으나 그것을 엮는 '의미틀'이 부재하는 현 상황은 마치 '종교의례'와 같다고 본다. 종교의례는 의례 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틀을 열어 놓고 이중적 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즉, 현재 나타나는 민주화는 이러한 종교의례와 같은 착각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촛불시위와 같이 사람들은 모이기도 하지만 그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절에 가서는 무소유를 생각하면서도 현실로 돌아와서는 하나라도 더  늘리는 부동산투기를 해야하는 것이다. 교회에 가서는 사랑과 믿음을 얘기하지만 현실에 그런 사람은 바보다. 항상 의심하고 확인해야 한다.

결국 한국사회 속의 주체들은 존재의 딜레마를 해소하기위해 마치 '종교의례' 같은 정치적 착각 속의 의례 속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김진호는 촛불시위를 오히려 불온하게 본다. 그리고 이를 '한국적 시민종교의 탄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진보적으로 생각한다는 사람들은 촛불시위를 불온하게 보지 않았다. 아니 오리혀 새로운 주체의 형성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김진호의 시각에서 보면 기존의 촛불시위에 대한 진보의 생각과 평가는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일종의 '한국적 시민종교의 탄생'을 찬양하며, 종교적 의례 속에서 안일함을 추구하는 이중적 생활을 하는 것일 수 있다.


IV. 제2의 민주화와 모순적 시민

하지만 김진호의 주장처럼 한국사회에서 주체를 '천민적'으로 시장화된 주체로 볼 수 있는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그렇게 되면 남는게 없다. 이성백은 오히려 근대화, 그리고 근대화된 시민이 의미하는 것은 '시장의 인간'으로 봐야 함을 지적한다. 이를 두고 '천민적으로 시장화된 시민'으로 평가하는 것은 오히려 시민을 고대의 철인으로 보려는 생각인 것이다. 즉, 김진호와 같은 비판은 '계몽적 민주화'의 사유 속에서 민주화를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가 가능하다.

이성백은 마키아벨리적 시민이 오히려 근대적 시민이고, 그 속에서 존재의 딜레마를 겪는 것을 받아들여야 함을 주장한다. 비록 권모술수적으로 움직이는 시민을 근대시민으로 받아들일 때 제2의 민주화가 오히려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전에는 이러한 시민을 믿지 못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보고 누군가 지도를 해야했던 민주화가 지난 민주화라고 하면, 이제는  그것을 벗어나야하고 이를 위해 있는 그대로의 주체를 인정해야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근대사회에서 주체는 항상 '천민적으로 시장화된 시민'으로의 압력에 있으며, 이에 대한 딜레마 속에서 항상 저항이 존재하고 재구성된다고 본다. 일종의 주체의 변증법적 재구성이라고 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현재 국면이 어떠한 국면에 있느냐 하는 점이라는 생각이다. 그에 대한 판단이 부재하는 것은 양비론적 시각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판단을 유보하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거다. 이와 관련해, 나는 '천민적으로 시장화된 시민'의 심화라는 김진호의 지적에 동의한다.  

도시의 삶과 비정규 노동, 그리고 그 저항의 징후들
- 복지시설행 증가하는 2030? 젊은 부랑자들? 아니, 아예 복지시설을 점거하자! -



1. 무기력한 젊은 부랑자들?

한국일보(2007. 1. 26)에 실업…신용불량… 무기력 2030 "젊은 부랑자 는다"라는 기사가 났다. 기사 내용은 대개 사실(fact) 그 자체와 그 사실에 대한 해석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기사는 읽다보면 사실 그 자체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고 싶은 생각을 들게 한다.

기사에는 부제를 통해 "복지시설行 증가…퇴소해도 'U턴' 일쑤… 재활 전문 프로그램 시급"이라고 썻지만 나는 차라리 "2030 복지시설行 증가 … 일자리를 찾아도 'U턴' … 재활 전문 프로그램 무용(無用)" 이라고 쓰고 싶다.

처음 기사의 fact를 가지고 이 도시 속의 삶에 대한 자료를 남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기사는 언론이 이 사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 언론의 시각을 학자들이 어떻게 뒷받침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공모 속에서 fact가 우리들에게 어떻게 왜곡되어 전달되는지,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국가는 노동자들의 사회적 저항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등을 생각해보게 한다.

fact는 우리들이 이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 삶을 사회는 어떻게 파괴하고 고립시키며 무력화시키는지 확인해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그 무력함 속에서 나오는 노동에 대한 포기, 그것은 오히려 또 다른 형태의 사회적인 저항인 아닌가 싶다. 


2. 기사의 주요 내용
기사의 주요 내용은 아래 그림과 같이 한 부랑인(?) 시설에 2-30대 입소자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사진: 한국일보, 2007. 1. 26]

그리고 20대 수용자는 정신적, 신체적으로 건강하다는 점이다. 가정 불화나 경제적 문제로 갈 곳을 잃은 경우가 많지만 실업이나 사회 부적응 등으로 복지시설을 찾는 이들도 적지 않다. 취업을 해도 시설을 떠날 생각이 없거나 퇴소한 뒤 금세 되돌아 올 정도로 사회성이 떨어지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부랑인들이 늘고 있는 것은 사회 적응에 실패하고 이탈한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현상과 관련이 있다는 해석이다. 

3. 수용자들의 시각

1) 용어 사용-부랑인, 부적응자, 실패자, 이탈자
매스미디어는 이들을 어떻게 재단하고 있는지, 그 시각을 학자들과 전문가들이 어떻게 뒷받침하고 있는지는 기사에 사용된 용어 그 자체만 봐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기사에 사용된 용어들은 부랑인, 수용자, 부적응, 사회 적응, 실패, 이탈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수용자의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회 속에서 살아보려고 노력하다가 어쩔 수 없어 복지시설에 찾아갔더니 복지시설은 이들을 수용하며 부랑인, 부적응자, 실패자, 이탈자로 취급하고 있는거다.

2) 비정규노동에 대한 차별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싣고 있다.
# A씨는 한창 사회활동을 할 나이에 왜 이 곳에서 허송세월을 하는 걸까. 고졸 학력인 A씨는 스무 살 때 부모로부터 독립했지만 장기간 실업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음식점이나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 돈벌이에 나선 본 적이 없다. 점점 무기력증에 빠진 A씨는 지난해 7월 제 발로 이 곳을 찾게 됐다.

"음식점이나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 돈벌이에 나서 본 적이 없다"는 표현. 아르바이트라고 표현했지만 대부분 비정규 노동의 한 형태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형태는 이 사회 속에서 이렇다 할 돈 벌이가 아닌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을 은폐하면서 차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A의 조건에서 직업을 구하려고 구인란을 뒤져보면 A가 경험한 일 외에 단순 조립공, 술집 웨이터나 바텐더, 텔레마케팅(영업사원), 총무, 운전 등이 대부분이다.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이렇다할 돈벌이인지 모르겠다. 이 사회에서, 특히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A와 같은 조건의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일들의 대부분은 이런 일들인데, 그것이 현실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비정규직으로라도 어떻게던지 살아보려고 노력했는데 이렇다 할 돈벌이에 나서 본 적이 없다니... 그러다 결국 좌절하고 복지시설을 찾은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혼자만의 문제로 그치고 있지 않다. 이 사회는 가족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태로까지 몰고 가고 있다. 이제 가족은 서로 버팀목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은 그 한계점에 다다라 오히려 서로에게 짐이 되고 있는 것이다. 기사에 난 아래의 사례를 보자.

#30대 초반의 B씨도 2005년 부랑인 복지시설을 찾았다. 대학을 졸업한 B씨는 대형 쇼핑몰에서 안전 요원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알코올 중독자였던 동생이 몰래 B씨의 신용카드를 사용해 졸지에 수천 만원의 빚을 졌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B씨는 일자리도 잃고 차압 등으로 갈 곳이 없게 되자 복지시설로 들어왔다.

재기를 모색하며 사회로 돌아갔지만 번번히 적응에 실패하고 입ㆍ퇴소를 3번이나 반복했다. 일자리가 생겨도 월급이 채권자에게 그대로 흘러가는 바람에 빈털터리가 됐다. 점점 사회생활에 적응하기가 힘들어졌고 일할 의욕도 상실했다.


3) 재활과 교육의 대상 - 정신적 재활 능력 부족자?
수용자들의 시각 속에서 나온 대책들은 사회 적응을 위한 재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잇다. 뭐 요지는 정신적 재활 능력을 잃었으니 이를 찾아주고 이와 관련해 사회 적응 프로그램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 적응을 위한 재활 프로그램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20-30대는 교육 과정을 이제야 막 마치고 사회에 나오는 사람들이다. 더구나 이미 고등학교나 대학까지 나온 사람들에게 또 어떤 사회 적응 프로그램이 필요하단 말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배운 교육 프로그램들은 사회 적응에 부적합한 프로그램이었단 말인가? 그렇게까지 무용지물이 될 것을 정말 예측할 수 없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지금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프로그램들은 사회 적응에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응 프로그램이 따로 있는 것인가? 사회가 너무 빨리 변해서 배울 때 시점과 지금 적응 시점의 차이가 있어서 적응이 어렵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4. 기사의 재구성과 재해석
1) 소극적 사회 저항의 증가

나는 '몸과 마음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데도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부랑인 복지시설에서 생활하는 20,30대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는 기사를 나는 재해석하고 싶다. 기사는 젊은 나이에 사회 적응에 실패한 이들에 대한 재활 프로그램이 시급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젊은이들이 적응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적응할 수 없는 사회 구조 속에서 무기력을 통해 이 사회에 저항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저항은 적극적 저항과 소극적 저항을 생각해볼 수 있다. 적극적 저항은 어떤 대상의 불합리한 요구에 대해 받아들일 수 없음을 집단적 또는 개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소극적 저항은 불합리한 요구에 대한 거부를 드러내지 않는 경우, 때로는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실제 결과는 기대하지 않은 결과들을 가져오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만큼 교육열이 강한 나라는 드물다. 쉽게 말해 한국의 젊은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또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입시의 압박 속에서 하고 싶은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 졸업하면 정규직 일 자리가 없어 취업준비를 하며 아르바이트라도 한다. 그래도 정규직이 되기 어려우면 비정규직으로라도 들어가 정규직의 절반밖에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며 일을 한다. 그렇게 생활을 하다가 한계에 다다르고 포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능력 있는 자들은 그것을 실패와 포기로 보이겠지만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소극적 저항이다. 왜냐하면 모두 다 포기를 한다면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그 능력 하나로 포기한 사람들을 다 감당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더이상 그 능력을 자만하며 과시할 대상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극적 저항의 한 형태로 드러내지 않는 경우는 생계형 범죄를 들 수도 있다. 생계형 범죄는 지배자의 입장에서 보면 범죄일 수 있지만 그 당사자는 범죄이기에 앞서 생존의 문제인 것이다. 그 생존을 위해 법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들키지 않는다면 법이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지배자들이야 법이 있어도 법을 어기는 자유를 누리는 판에, 굶어죽지 않기 위해 빵을 훔치는 것이 무슨 죄란 말인가? )

2) 사회적 통제장치의 작동
하지만  복지시설을 찾아오는 젊은이들은 범죄와 같은 식으로 저항하지 않는다. 이러한 형태는 사회적 통제 장치의 틀 내에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푸코의 표현을 빌린다면 사회적 감시장치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결과는 기대하지 않은 결과들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의도하지 않은 수용 대상들이 들어와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복지시설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드러나지 않는 소극적 저항 형태들이 늘었을 것이다. 그리고 경찰 유치장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성인이 아니라면 아마 소년원 같은 곳이 더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학교, (정신)병원 등... 그런데 지금은 그나마 복지시설이 있어 그 곳으로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유럽의 복지제도가 발달한 과정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만일 이러한 시설이 더이상 이들을 수용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기사의 내용과 같이 '사회의 정신적 재활 능력이 부족'해서 복지시설의 예산을 늘리고 전문 상담사를 배치해서 정신적 재활 능력을 심어주고 이들을 사회로 내보낸다고 해결이 될까? 정신적 재활 능력을 가지고 나와도 받아주거 갈 곳이 없는 현실, 그 앞에서 확인하는 것은 소위 말하는 정신적 재활 프로그램들이 허구라는 것이다.

3) 사회적 수용의 한계
이 지점에서 젊은이들이 복지시설에 오게 된 과정들을 되돌아보면 지금의 문제는 사회의 정신적 재활 능력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기사에서도 '몸과 마음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이들이 찾아오고 있다'라고 쓰고 있다. 이는 결국 사회구조적 문제이고 젊은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 수용 능력'이 구조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자리 나눔의 문제와 사회적 분배 구조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다. 이는 노동시장의 문제이고, 현재와 같은 비정규 노동시장 구조로는 더이상 이 사회를 지탱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가 복지시설을 통해 소극적 저항 형태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5. 소극적 저항의 확산과 변화의 징후
하지만 이러한 형태의 저항은 확산하려고 한다고 확산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 내재적으로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징후를 나타내다가 어느 시점 급격히 확산될 수 있다. 물론 조건에 따라 다르겠지만 확산이론에서 S자 곡선은 이러한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수용자들의 시각 속에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소극적 사회 저항을 무능력자, 부랑자, 사회 적응 실패자라고 취급하고 있다.

확산을 막으려고 극단의 경우에는 유럽의 근대화 과정에서 구빈법이 부랑자법으로 바뀌었듯이 악으로 규정하고 범죄자로 몰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그 법들은 대부분 폐지됐다. 일시적으로는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계가 있는 것이다.

결국 나는 '무기력한 젊은 부랑자 증가'를 소극적 사회 저항의 증가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사회에서 수용할 수 없는 상태에 다다르면서 사회구조 자체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6. 사회적 재활프로그램의 대상들
그리고 나는 기사 내용과 같이 세상을 보는 시각들에 대해 화가 치민다. 젊은이들을 점점 무기력증에 빠지게 한 장본인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IMF이후 지금과 같은 정치-경제-법 제도적 변화의 필요성을 부추키고 선전해댄 언론들, 이에 맞장구를 치며 사회를 재단하고 설계한 사람들이 만나는 과정들...  

일반 대중들은 그래도 이들을 믿고 열심히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 삶은 더이상 견딜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 사회를 재단하고 설계해 온 장본인들은 슬쩍 빠져나가며 그 책임을 다시 일반 대중에게 돌리고 있다. 특히 이들은 젊은이들을 무기력증에 빠진 사람들로 평가를 하고 재활 프로그램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재활 프로그램의 대상은 젊은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시각을 가진 자들이 아닌가 싶다.

                  자본의 위기와 그 변화의 징후 - 도시 노숙인
                                         - 왜 도시에는 노숙인이 존재하나?  -


                                                                                                                 
I. 들어가며

신문에 서울시에서 9일 노숙인들의 동사와 안전사고를 막기 위해 오는 15일부터 이듬해 3월15일까지 노숙인 보호대책을 시행한다고 밝혔다. 신문에 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습추위가 시작된 가운데 서울시가 노숙인을 위한 동절기 보호대책을 마련했다.
서울시는 9일 노숙인들의 동사와 안전사고를 막기 위해 오는 15일부터 이듬해 3월15일까지 노숙인 보호대책을 시행한다고 밝혔다.
시는 철도공사, 시민·종교단체, 자원봉사자 등의 협조를 받아 1대1 밀착상담 시스템을 가동키로 했다. 이를 위해 노숙인 상담반을 11개조 62명으로 대폭 늘렸다. 상담반원들은 서울역, 영등포역, 용산역, 청량리역 등 노숙자 밀집지역을 24시간 누비며 보호시설 입소를 적극 유도할 계획이다. 또 손전등과 담요, 보온통 등도 준비해 필요할 때 제공한다.
노숙인을 위한 무료진료소도 서울역 앞에 설치된다.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30분까지 공중보건의, 간호사, 사회복지사가 무료 진료를 펼칠 예정이다. 이뿐만 아니라 거리의료상담반도 운영, 노숙 밀집지역을 돌며 의료상담 서비스도 지원한다. 시는 특히 일자리 제공 등 자활프로그램을 확대하기로 했다.
올해부터 시작한 일자리 제공 사업과 특별자활사업을 늘려 모두 2840명에게 근로기회를 제공한다. [서울신문 2006-11-10 09:03]
서울시가 가만히 손놓고 있는 것보다야 잘한 일이지만 사실 씁쓸한 기사다. 이 기사는 우리가 우리 사회 자체를 보는 시각과 그 속에서 나오는 현재의 복지정책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사다. 나라마다 처지가 다르고 그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있는거라고 말하면 더 할말은 없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스스로의 무능함과 한계에 대한 합리화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것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 무능함과 한계에 대한 합리화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사실 여기에는 첨예한 시각대립이 존재하고 있다. 그 하나는 대중들에게 그 책임을 돌리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책입안자들과 같은 지배자들과 그 지배연합에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사회운동이 존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논의는 이 글의 범위를 넘는다.

간단히 말하면, 예컨대 집을 몇 채씩 소유한 사람들의 집을 제한하고, 도시에 빈 집들에 노숙인들이 들어가서 살 수 있게 하고, 사회적으로 노동시간을 대폭 줄여 일자리를 나누자는 운동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려운 것은 국가가 이를 시행하려고 해도 개인(사유재산)의 자유를 국가가 제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국민들이 이를 원하지도 않는다는 견해다. 그리고 대중들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져 있기에 경쟁을 통해 또 다른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지배자들이 한편으로는 대중의 눈을 멀게하고, 이를 이용하면서 지배를 지속시키는 술수에 불과하다는 견해가 있다.

나는 운동의 입장에서 지배자들과 지배연합의 논리가 허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프랑스나 북유럽 사민주의 국가를 설명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 같은 영미식 국가가 왜 양극화가 심화되는지 설명할 수도 없다. 여기서는 다만 도시 노숙인에 대해 생각해 볼 문제점들에 대해 정리를 해보고 싶다.

II. 도시 변화의 징후-노숙인 문제
1. 현재
어느 도시에나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노숙인들이 존재하고 있다. 왜 도시에 노숙인들이 존재할까? 그것이 가능한 조건은 무엇인가? 단순히 주거공간이 없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주거 공간이 생긴다면 노숙인이 없어질까? 오히려 먹고사는 문제를 도시의 거리에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거리에서의 구걸행위, 소매치기, 시민에 대한 위협, 그리고 구호센터의 지원...하지만 일자리 제공과 자활프로그램? 근본적인 해결책일 수 있다. 하지만 현재 노숙인의 문제는 그 일자리로부터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과정에서 나온 문제이다. 그런데 어떻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자활프로그램을 실시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사회 구조적인 변화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그런데 도시마다 노숙인들의 존재 양태가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시마다 사회적 부의 분배 정도가 다르기 때문일까? 즉 거리로 나앉지 않을 정도로 도시민들 모두 먹고 살 정도가 되기 때문일까? 아니면 푸코의 말처럼 시민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시설(보호시설, 자활시설, 감옥, 병원 등)에 감금을 당한 것일까? 그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존재양태가 자본의 확대재생산 과정에서 야기되는 위기국면과 이것에 대한 징후, 그리고 그 조절양식의 상이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사회적 관계의 해체를 통한 자본주의적 생산구조에 대한 결과가 오히려 사회적 책임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닌가?

2. 과거
역사 속에서 노숙인은 사회적으로 어떤 식으로 존재해왔으며 어떻게 다루어졌을까? 노숙인은 자본주의 시대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자본주의 이전에 노숙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마찬가지로 그 조건은 무엇인가? 존재했다면 노예제, 봉건제 사회에서 노숙인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3. 미래
자본의 시대가 끝나고 나면 노숙인은 없어지는 것일까? 자발적 노숙인조차도 없는 사회가 가능할까? 자발적 노숙인이 존재한다면 그 조건과 의미는 무엇일까? 역으로 불가능 하다면 그 조건과 의미는 무엇일까? 또 다른 형태의 사회적 감금을 의미하는 것일까?


4. 노숙인의 문제는 역사 속에 존재하는 지배적 생산양식과 그에 따른 사회적 지배, 그리고 그 변화의 징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다시말해 노숙인 문제는 지금 이 시대, 자본의 위기를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것은 사회적 연대(운동)와 지배의 문제로 다시 연결되는 것은 아닌가?

III. 최근 선행연구 결과

노숙인 인권침해 실태는 각 영역에서 다차원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동시에 각각의 요소가 상호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거리 생활에서 불규칙한 식사와 영양 및 수면부족이 건강권을 위협하고 또한 이러한 문제들은 적절한 주거생활이 보장되지 못함과 연결되어 있었다. 주거 생활은 취업 및 노동권과 연결되어 있고, 안정적 노동을 통한 소득의 획득이 이루어지지 아니함으로써 주거 불안정과 연관되어 있었다(정원오 외, 2005:13).

노숙인의 주거권 문제는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노숙인은 곧 주거권이 보장되지 못한 집단이며, 그 원인이 경제적 문제이든, 실업의 문제이든, 혹은 정신질환의 문제이든, 노숙상태로 떨어지는 근본적인 원인은 다양하지만, 노숙생활의 직접적인 이유는 주거 곤간이 없다는 점이다(정원오 외, 2005: 15).
정원오 외, '2005년 인권상황실태조사 연구용역보고서 - 노숙인 인권상황 실태조사', 국가인권위원회, 2005.

                   자유의 재구성과 도시의 탈정치적 지배
                                      - 자유의 확장과 도시 소비를 중심으로 -

   
                                                                                                                   송용한


I. 들어가며 - 도시 성격의 변화에 대해
산업화시기 산업도시는 이성적 자유에 기반한 계획도시라 할 수 있다. 그 도시에는 특정의 주류 산업(제조업)이 지배하고 이에 걸맞는 지역적 공간배치가 이루어진다. 그 속에서 일상생활, 즉 사람들간의 관계가 재구성된다. 그러나 지금의 도시, 특히 대도시는 대부분 서비스 산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 속에 다양한 직종과 직업은 도시를 산업도시에서와 같은 일정한 질서가 아닌 무질서해보이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부는 이성이 지배하지 않는, 자유와 방종이 난무하는 모습으로 그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혼란스럽고 제멋대로인 것 처럼 보이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말 이성이 지배하지 않고 자유와 방종만이 난무하는 공간일까? 오히려 이성적 지배의 한계를 넘어서는 과정이고 또 다른 형태의 이성적 지배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미 누군가 이런 생각을 개념과 함께 정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내가 그런 생각의 글들을 만나 함께 고민하고 정리하지 못했다. 다만, 그 전에 지금의 생각들을 정리해보고 향후 이와 관련된 생각들이 어떻게 만날지 상상해 본다.    

II. 자유의 확장과 도시 소비 - 탈정치적 지배
1. 자유의 재구성 - 사회적 자유, 내면적 자유, 자연적 자유
스피노자, 칸트, 헤겔에게 있어 '자연적 자유'는 부정된다. 이 과정에서 '자의(自意)'를 규제하고 '이성적 자유'로서 '사회적 자유'를 체계화한다. 그것의 결정판이 '국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과정은 근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성립과 결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시장이건 계획경제건 이성에 의해 생산과 소비의 통제가 이루어지고 그 속에서 확대재생산과 자본주의적 축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맑스는 국가를 자본주의적 지배 도구로 해석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맑스도 '사회적 자유'를 지향한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한 지류에 놓여 있는 것이다. 레닌도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사회적 자유에 기반한 합리적 소비가 한계에 이르렀을 때 자본주의적 축적은 위기에 이른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이 '자연적 자유'를 다시 복원시키는 과정이고, 이것이 포스트모던과 자본주의가 다시 만나는 지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자유의 중심 축이 '이성'이라는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적 자유'에서 '행위적 자유'와 '내면적 자유'를 중시하는  '자연적 자유'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역에서 생산과 소비의 양식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곧바로 생산과 소비 양식이 재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는 자본주의적 해체과정과 이를 다시 자본주의적으로 재수용하는 과정이 놓여 있는 것이다. 먼저 자본주의적 해체의 사유 과정에 사르트르, 레비나스, 푸코가 있고 좀 더 최근의 선상에 데리다, 들뢰즈 등이 놓여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구체적인 내용은 세부 검토가 필요하다). 문제는 이러한 해체의 과정이 억압에서 자유를 확장하는 형태의 운동으로 나타나지만, 이 과정이 오히려 자본주의적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자유의 주체와 대상의 문제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적으로 보면 즉자존재와 대자존재의 구별과 자유를 '존재하는 무'의 세계로 보는 의 한계일 수 있다. 존재하는 무를 찾아 나서는 끊임없는 관계의 복원과정이 합리적 이성을 뛰어넘는 것처럼 보이지만, 존재하는 무라는 것이 오히려 이성을 호출하고 이성을 강화하고 기존의 이성적 지배를 변형적 지배로 만드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내가 있지만 나도 나를 알 수 없기에 부단히 나를 찾아 나서야 하는 과정이 오히려 이성에 의해 포획되는 기회와 그 틀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2. 도시의 소비와 자유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현대 도시는 자유스럽고 비이성적인 곳으로 보이지만 그렇게 자유스럽거나 비이성적인 곳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기존 이성의 지배가 공고화되고 이를 넘어서는 범위로 자유의 범위를 확장하는 과정에 놓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사회적 자유'에서 '내면적 자유'를 통해 '자연적 자유'까지 범위를 재구성과정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의 소비는 확장되고 재구성된 자유에 따라 다시 분화될 수 있다. 사회적 자유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의 소비, 자연적 자유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의 소비가 존재하는 것이다. 사회적 자유가 허용하는 범위는 산업자본주의적 소비양식, 즉 버는 한도 내에서 소비의 자유가 허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생산으로 선순환되는 합리적 소비가 전제되고 그 소비의 대상과 한계가 정해져 있다. 사치품이 아닌 기본적인 의식주 과정에 대한 소비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레져나 향락성 소비는 또 다른 성격의 자유와 만나는 소비형태가 아닌가 싶다. 그것은 자연적 소비와 그 한계, 즉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지만 나를 찾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 기존의 일상과 만나는 것이다. 구속을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내면적 자유일 뿐이다.

3. 주체의 분할과 탈정치적 지배
이러한 도시적 자유와 소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첫 번째로는 자유가 확장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성적 자유에 의한 억압에서 벗어나 행위적 자유와 내면적 자유라는 자연적 자유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자연, 즉 자연적 자유가 아닌 자연 그 자체로 돌아갈 수 없는 자유 속의 자유, 결국 이성적 자유의 틀 속에서 외연을 확장시키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돈과 시간만 있으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두 번째, 주체의 분할을 의미한다. 특히 내면적 자유가 이성적 자유의 범위 내에서 해소되는 (소비)과정에서 이 분할의 선은 구체화된다. 이종영은 내면성과 내면적 자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내면에 있어 '구속'이 부과되기 전에 존해하는 것은 모든 인간마다 상이한, 개인의 고유한 내면성일 뿐이다. 이 내면성은 온갖 형태의 규정성들이 개입하는 고유한 개인적 체험들의 축적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고유한 내면이 '자유'의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은 1) 그 내면과 대립되는 '외부적 구속'이 부과될 때, 2) 그리고 그 개인이 외부의 구속에 종속됨에 따라 그의 외적 행위가 내면과 분리될 때이다.
사르트르적으로 말하면 대자적 자유 속에서 자기를 대면하고 자기를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내면이 부재하는 '나'라는 즉자적 한계, 결국 '나'를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기를 벗어나는 과정은 개별적으로 분할을 확장시킨다. 그리고 외부의 구속에 종속되는, 즉 소비양식에 지배를 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도시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주체에 의한 다양한 하위문화의 한 측면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체의 분할은 세 번째, 기존 정치의 해체적 분할 지배를 의미한다. 정치체제는 집단적으로 특정한 형태의 '사회적 자유'들만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도시에서 보여지는 자유의 확장과 주체의 분할은 이러한 기존의 집단적 정치를 해체한다. 그럼에도 '이성적 자유', 즉 '사회적 자유'에 포획됨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집단적 정치가 존재하고 정치형식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네트워크 사회 또는 리좀 문화가 의미하는 것이 이러한 측면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III. 결론
포스트모던적 삶이라 할 수 있는 도시적 삶을 자유의 재구성적 측면에서 보면 도시적 삶은 자유의 확장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 그 자체의 한계, 그리고 자유에 대한 추구가 어떤 형태의 자유에 대한 추구인가에 따라 다시 한계지워지고 모던(근대성)에 지배되는 현실로 되돌아 온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포스트모던은 단지 근대를 재구성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탈근대 과정에서 기존의 근대성이 가지고 있던 이성은 한 단계 높은 추상적 이성으로 다시 자리 잡고, 모던 시대의 이성은 다시 중세의 신의로 또는 즉자적인 '나'라는 개인으로 또는 자연으로 대체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도시적 삶은 종잡을 수 없는 다양한 잡종적 삶의 모습으로 보여지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는 근대의 이성을 벗어나는 대체물을 찾지 못했다. 현실 속에서 그 대체물을 찾는 과정은 국가를 부정하고 기존의 정치를 부정하는 자율주의 운동 또는 아나키즘적 운동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대체물에 대한 탐구 과정이 탈정치적 분할 지배의 틀과 만날 수 있는 이론적 틀을 제공하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