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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스콧 니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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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조희연-강준만 교수의 진보논쟁이 올초 조희연-최장집의 논쟁에 이어 다시 재현되고 있다. 서울신문 10월 23일자에 나온 강준만 교수의 주요 논지는 다음과 같다.

지난 5월 발표한 글에서 강 교수는 조 교수의 전략을 ‘동원정치’라고 불렀다. 강 교수는 단적으로 물었다.“지금 분노·위협의 동원정치가 가능한가?” ‘민중의 분노’로 대별되는 대중의 급진화 전략이 현 시기에 타당하냐는 것이다.

강 교수는 “1987년 이후 해온 게 그거 아니었나? 아직도 모자라서 또다시 그걸 해야 하는가?”라며 동원정치가 시대착오적임을 역설했다.

강 교수는 다시 묻는다.“도박은 노무현만으로 족하지 않나?” 강 교수에게 동원정치는 노무현 정부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는 “사실 분노·위협의 동원정치는 노 정권 내부에서 과잉이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노무현 스스로 그 선두에 서서 ‘시민혁명’을 선동하기도 했다.”면서 “노 정권을 ‘자폐정권’으로 만든 것 이외에 무슨 성과가 있었냐.”고 지적한다.

강 교수는 조 교수의 또 다른 해법인 ‘헤게모니 전략’과 ‘동원정치 전략’의 방법론적 충돌도 날카롭게 꼬집는다. 전자가 대중의 분노에 기반한 급진적 전략이라면 후자는 구체적인 정책을 토대로 한 차분한 접근이란 것이다. 양립할 수 없다는 게 강 교수 판단이다. 그는 “나는 조희연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아비투스(습속)에 의해 자꾸 큰 그림(거대담론)만 그리려 드는 게 안타깝다.”면서 “구체적 실천을 하나 멋지게 성공해 놓고 그 성과의 토양에서 출발하는 거대담론을 생산하면 안 되는 걸까?”하고 물었다....

서울신문 / 기사일자 : 2007-10-23    24 면

이에 대해 조희연 교수가 [인물과 사상] 11월호에 반론의 글을 쓴 것이다. 그리고 언론은 이를 받아 다시 '진보논쟁(?)'에 불을 지피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사실 나는 이런 식의 논쟁에 아쉬움이 있다. 좀 따져보고 싶지만...일단 드는 생각만 정리를 해본다.

먼저 강준만 교수는 [인물과 사상]에 '강준만의 세상 이야기'란에 글을 썼다. 아쉬움이라면 강준만 교수가 그의 방식으로 가볍게 '세상 사는 이야기'에 쓴 글을 조희연이 장문의 반박글을 쓰고, 언론이 이를 받아 이슈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아예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것, 즉 이슈로 만들지 않는 것 자체도 문제지만, 좀 더 서로 지면을 할애해 내용이 깊어졌으면 하는 점과, 이런 식으로 언론을 통해 논쟁이 이슈적으로 처리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생각이다.

사실 강준만식의 글쓰기에는 매력이 있다. 글을 읽다보면 그의 글은 가볍게 읽히지만 한편으로는 다시 생각하게 하고 그의 논리에 수긍을 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그만큼 대중의 생각을 읽고 대중의 용어를 통해 그의 생각을 풀어내고 설득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대중의 생각과 용어를 이론적으로 또는 개념적으로 따져보고 분석해봐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나는 느낀 그대로, 있는 그대로 글을 쓰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학자라면 그 느낌과 생각을 분석해보고 성찰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느낌과 생각을 설명해줘야 한다. 한마디로 상식적인 생각과 용어 속에 은폐되어 측면들을 밝혀내고,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거나 모순적인 측면들을 밝혀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강준만의 글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공감을 하게 하고 생각을 해보게 하지만, 문제는 그 수준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때로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중의 상식적 수준의 생각을 반복하고, 그 수준에서 대중적 담론을 재생산하며, 대중을 빌어 대중의 생각을 그 수준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를 잘못된 상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지식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언론(미디어)의 지배권력적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역으로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고 유사한 논리를 펴고 있더라도, 강준만의 용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조희연의 용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또한 내가 강준만 보다 조희연의 언어에 익숙하고 그 개념 속에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가지는 생각일 수도 있다. 

아무튼, 뭔가를 따져봐야겠는데 그것이 무엇일까?


'헤게모니'와 '동원정치'의 매트릭스
나는 먼저 강준만이 지적한 '헤게모니'개념과 '동원정치'라는 것을 따져 보고 싶다. 우선 '헤게모니' 개념은 일종의 '지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내용적으로 '강제와 동의'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행사 주체의 측면에서 보면 '지배계급의 헤게모니'가 있고  '피지배계급의 헤게모니'가 존재할 수 있다. 여기서 피지배계급의 헤게모니를 '대항 헤게모니'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헤게모니의 창출 방법으로는 '민주주의적 헤게모니'가 있고 '권위주의적 헤게모니'가 있다.  

'동원정치'라는 용어에서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동원정치'란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해 어떤 대상을 동원하는 것인데, 여기서 어떤 '목적'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이를 위한 그 어떤 동원 '대상'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 문제다.

목적에 있어, 이를 정치에 한정해서 보면, 기득권자들과 그로부터 배제된 또는 다른 정치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이때 기득권자들은 기존의 정치적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일 수 있지만 그로부터 배제된 또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들도 있다. 즉, 이들에게는 기존의 것을 깨고 또 다른 정치적 열망을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여기서 그 다른 정치적 열망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그 내용을 알 수 있는가 하는 측면이 있다. 조희연 교수가 말하는 민중의 '분노'라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기득권(지배층)이 아닌 '민중'의 '분노'를 통해 표출되어야 하고 이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대상의 측면을 보면, 그 대상을 유형-무형 또는 인적-물적 대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를 어떤 측면에서 보면 동원자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동원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서 지배자에 의한 동원, 즉 위로부터의 동원이 존재할 수 있다. 또한 피지배자에 의한 동원, 즉 아래로부터의 동원이 존재할 수 있다. 

다양한 개념의 매트릭스적 조합들
이러한 개념적인 메트릭스들을 조합해보면 다양한 유형이 도출될 수 있다. 여기서부터 세부적으로 다시 따져들어가야 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 드는 조희연 교수의 논지는 정치적 목적 또는 열망이 민중의 분노를 통해, 즉 아래로부터 나오고 동원되어야 하며, 이는 '민주주의적 헤게모니' 창출과정과 맞물려 실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닌가 싶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동원정치'와 '헤게모니 정치'는 충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강준만 교수는 이러한 측면들의 복합적 관계를 무시하고 한 측면만을 비판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참고자료]
1. 관련논문:
2. 신문자료
이번엔 ‘강남-강북 계급의식’ 놓고 격돌 - [한겨레] 2007-10-29
진보논쟁’ 2라운드 시작될까[서울신문] 2007/10/23 (화)

3. 용어 - 헤게모니
도시의 삶과 비정규 노동, 그리고 그 저항의 징후들
- 복지시설행 증가하는 2030? 젊은 부랑자들? 아니, 아예 복지시설을 점거하자! -



1. 무기력한 젊은 부랑자들?

한국일보(2007. 1. 26)에 실업…신용불량… 무기력 2030 "젊은 부랑자 는다"라는 기사가 났다. 기사 내용은 대개 사실(fact) 그 자체와 그 사실에 대한 해석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기사는 읽다보면 사실 그 자체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고 싶은 생각을 들게 한다.

기사에는 부제를 통해 "복지시설行 증가…퇴소해도 'U턴' 일쑤… 재활 전문 프로그램 시급"이라고 썻지만 나는 차라리 "2030 복지시설行 증가 … 일자리를 찾아도 'U턴' … 재활 전문 프로그램 무용(無用)" 이라고 쓰고 싶다.

처음 기사의 fact를 가지고 이 도시 속의 삶에 대한 자료를 남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기사는 언론이 이 사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 언론의 시각을 학자들이 어떻게 뒷받침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공모 속에서 fact가 우리들에게 어떻게 왜곡되어 전달되는지,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국가는 노동자들의 사회적 저항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등을 생각해보게 한다.

fact는 우리들이 이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 삶을 사회는 어떻게 파괴하고 고립시키며 무력화시키는지 확인해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그 무력함 속에서 나오는 노동에 대한 포기, 그것은 오히려 또 다른 형태의 사회적인 저항인 아닌가 싶다. 


2. 기사의 주요 내용
기사의 주요 내용은 아래 그림과 같이 한 부랑인(?) 시설에 2-30대 입소자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사진: 한국일보, 2007. 1. 26]

그리고 20대 수용자는 정신적, 신체적으로 건강하다는 점이다. 가정 불화나 경제적 문제로 갈 곳을 잃은 경우가 많지만 실업이나 사회 부적응 등으로 복지시설을 찾는 이들도 적지 않다. 취업을 해도 시설을 떠날 생각이 없거나 퇴소한 뒤 금세 되돌아 올 정도로 사회성이 떨어지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부랑인들이 늘고 있는 것은 사회 적응에 실패하고 이탈한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현상과 관련이 있다는 해석이다. 

3. 수용자들의 시각

1) 용어 사용-부랑인, 부적응자, 실패자, 이탈자
매스미디어는 이들을 어떻게 재단하고 있는지, 그 시각을 학자들과 전문가들이 어떻게 뒷받침하고 있는지는 기사에 사용된 용어 그 자체만 봐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기사에 사용된 용어들은 부랑인, 수용자, 부적응, 사회 적응, 실패, 이탈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수용자의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회 속에서 살아보려고 노력하다가 어쩔 수 없어 복지시설에 찾아갔더니 복지시설은 이들을 수용하며 부랑인, 부적응자, 실패자, 이탈자로 취급하고 있는거다.

2) 비정규노동에 대한 차별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싣고 있다.
# A씨는 한창 사회활동을 할 나이에 왜 이 곳에서 허송세월을 하는 걸까. 고졸 학력인 A씨는 스무 살 때 부모로부터 독립했지만 장기간 실업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음식점이나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 돈벌이에 나선 본 적이 없다. 점점 무기력증에 빠진 A씨는 지난해 7월 제 발로 이 곳을 찾게 됐다.

"음식점이나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 돈벌이에 나서 본 적이 없다"는 표현. 아르바이트라고 표현했지만 대부분 비정규 노동의 한 형태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형태는 이 사회 속에서 이렇다 할 돈 벌이가 아닌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을 은폐하면서 차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A의 조건에서 직업을 구하려고 구인란을 뒤져보면 A가 경험한 일 외에 단순 조립공, 술집 웨이터나 바텐더, 텔레마케팅(영업사원), 총무, 운전 등이 대부분이다.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이렇다할 돈벌이인지 모르겠다. 이 사회에서, 특히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A와 같은 조건의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일들의 대부분은 이런 일들인데, 그것이 현실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비정규직으로라도 어떻게던지 살아보려고 노력했는데 이렇다 할 돈벌이에 나서 본 적이 없다니... 그러다 결국 좌절하고 복지시설을 찾은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혼자만의 문제로 그치고 있지 않다. 이 사회는 가족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태로까지 몰고 가고 있다. 이제 가족은 서로 버팀목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은 그 한계점에 다다라 오히려 서로에게 짐이 되고 있는 것이다. 기사에 난 아래의 사례를 보자.

#30대 초반의 B씨도 2005년 부랑인 복지시설을 찾았다. 대학을 졸업한 B씨는 대형 쇼핑몰에서 안전 요원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알코올 중독자였던 동생이 몰래 B씨의 신용카드를 사용해 졸지에 수천 만원의 빚을 졌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B씨는 일자리도 잃고 차압 등으로 갈 곳이 없게 되자 복지시설로 들어왔다.

재기를 모색하며 사회로 돌아갔지만 번번히 적응에 실패하고 입ㆍ퇴소를 3번이나 반복했다. 일자리가 생겨도 월급이 채권자에게 그대로 흘러가는 바람에 빈털터리가 됐다. 점점 사회생활에 적응하기가 힘들어졌고 일할 의욕도 상실했다.


3) 재활과 교육의 대상 - 정신적 재활 능력 부족자?
수용자들의 시각 속에서 나온 대책들은 사회 적응을 위한 재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잇다. 뭐 요지는 정신적 재활 능력을 잃었으니 이를 찾아주고 이와 관련해 사회 적응 프로그램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 적응을 위한 재활 프로그램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20-30대는 교육 과정을 이제야 막 마치고 사회에 나오는 사람들이다. 더구나 이미 고등학교나 대학까지 나온 사람들에게 또 어떤 사회 적응 프로그램이 필요하단 말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배운 교육 프로그램들은 사회 적응에 부적합한 프로그램이었단 말인가? 그렇게까지 무용지물이 될 것을 정말 예측할 수 없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지금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프로그램들은 사회 적응에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응 프로그램이 따로 있는 것인가? 사회가 너무 빨리 변해서 배울 때 시점과 지금 적응 시점의 차이가 있어서 적응이 어렵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4. 기사의 재구성과 재해석
1) 소극적 사회 저항의 증가

나는 '몸과 마음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데도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부랑인 복지시설에서 생활하는 20,30대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는 기사를 나는 재해석하고 싶다. 기사는 젊은 나이에 사회 적응에 실패한 이들에 대한 재활 프로그램이 시급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젊은이들이 적응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적응할 수 없는 사회 구조 속에서 무기력을 통해 이 사회에 저항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저항은 적극적 저항과 소극적 저항을 생각해볼 수 있다. 적극적 저항은 어떤 대상의 불합리한 요구에 대해 받아들일 수 없음을 집단적 또는 개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소극적 저항은 불합리한 요구에 대한 거부를 드러내지 않는 경우, 때로는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실제 결과는 기대하지 않은 결과들을 가져오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만큼 교육열이 강한 나라는 드물다. 쉽게 말해 한국의 젊은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또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입시의 압박 속에서 하고 싶은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 졸업하면 정규직 일 자리가 없어 취업준비를 하며 아르바이트라도 한다. 그래도 정규직이 되기 어려우면 비정규직으로라도 들어가 정규직의 절반밖에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며 일을 한다. 그렇게 생활을 하다가 한계에 다다르고 포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능력 있는 자들은 그것을 실패와 포기로 보이겠지만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소극적 저항이다. 왜냐하면 모두 다 포기를 한다면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그 능력 하나로 포기한 사람들을 다 감당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더이상 그 능력을 자만하며 과시할 대상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극적 저항의 한 형태로 드러내지 않는 경우는 생계형 범죄를 들 수도 있다. 생계형 범죄는 지배자의 입장에서 보면 범죄일 수 있지만 그 당사자는 범죄이기에 앞서 생존의 문제인 것이다. 그 생존을 위해 법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들키지 않는다면 법이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지배자들이야 법이 있어도 법을 어기는 자유를 누리는 판에, 굶어죽지 않기 위해 빵을 훔치는 것이 무슨 죄란 말인가? )

2) 사회적 통제장치의 작동
하지만  복지시설을 찾아오는 젊은이들은 범죄와 같은 식으로 저항하지 않는다. 이러한 형태는 사회적 통제 장치의 틀 내에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푸코의 표현을 빌린다면 사회적 감시장치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결과는 기대하지 않은 결과들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의도하지 않은 수용 대상들이 들어와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복지시설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드러나지 않는 소극적 저항 형태들이 늘었을 것이다. 그리고 경찰 유치장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성인이 아니라면 아마 소년원 같은 곳이 더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학교, (정신)병원 등... 그런데 지금은 그나마 복지시설이 있어 그 곳으로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유럽의 복지제도가 발달한 과정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만일 이러한 시설이 더이상 이들을 수용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기사의 내용과 같이 '사회의 정신적 재활 능력이 부족'해서 복지시설의 예산을 늘리고 전문 상담사를 배치해서 정신적 재활 능력을 심어주고 이들을 사회로 내보낸다고 해결이 될까? 정신적 재활 능력을 가지고 나와도 받아주거 갈 곳이 없는 현실, 그 앞에서 확인하는 것은 소위 말하는 정신적 재활 프로그램들이 허구라는 것이다.

3) 사회적 수용의 한계
이 지점에서 젊은이들이 복지시설에 오게 된 과정들을 되돌아보면 지금의 문제는 사회의 정신적 재활 능력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기사에서도 '몸과 마음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이들이 찾아오고 있다'라고 쓰고 있다. 이는 결국 사회구조적 문제이고 젊은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 수용 능력'이 구조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자리 나눔의 문제와 사회적 분배 구조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다. 이는 노동시장의 문제이고, 현재와 같은 비정규 노동시장 구조로는 더이상 이 사회를 지탱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가 복지시설을 통해 소극적 저항 형태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5. 소극적 저항의 확산과 변화의 징후
하지만 이러한 형태의 저항은 확산하려고 한다고 확산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 내재적으로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징후를 나타내다가 어느 시점 급격히 확산될 수 있다. 물론 조건에 따라 다르겠지만 확산이론에서 S자 곡선은 이러한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수용자들의 시각 속에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소극적 사회 저항을 무능력자, 부랑자, 사회 적응 실패자라고 취급하고 있다.

확산을 막으려고 극단의 경우에는 유럽의 근대화 과정에서 구빈법이 부랑자법으로 바뀌었듯이 악으로 규정하고 범죄자로 몰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그 법들은 대부분 폐지됐다. 일시적으로는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계가 있는 것이다.

결국 나는 '무기력한 젊은 부랑자 증가'를 소극적 사회 저항의 증가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사회에서 수용할 수 없는 상태에 다다르면서 사회구조 자체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6. 사회적 재활프로그램의 대상들
그리고 나는 기사 내용과 같이 세상을 보는 시각들에 대해 화가 치민다. 젊은이들을 점점 무기력증에 빠지게 한 장본인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IMF이후 지금과 같은 정치-경제-법 제도적 변화의 필요성을 부추키고 선전해댄 언론들, 이에 맞장구를 치며 사회를 재단하고 설계한 사람들이 만나는 과정들...  

일반 대중들은 그래도 이들을 믿고 열심히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 삶은 더이상 견딜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 사회를 재단하고 설계해 온 장본인들은 슬쩍 빠져나가며 그 책임을 다시 일반 대중에게 돌리고 있다. 특히 이들은 젊은이들을 무기력증에 빠진 사람들로 평가를 하고 재활 프로그램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재활 프로그램의 대상은 젊은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시각을 가진 자들이 아닌가 싶다.

프롤로그 III.

도시적 일상 속의 공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공간처럼 여겨지지만 실상 그렇게 자유스럽지만은 않은 공간이다. 아침에 집을 나와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출근길에 올라야 한다. 하지만 출퇴근 시간대, 저 아스팔트 길 위의 모습과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한적한 시간대(모두 일터에 들어가 있는...)의 길 위의 모습은 다르다. 비록 각자 개인들은 자유스럽게 이 공간을 점유하는 것 같지만 시간의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공간은 그렇게 시간에 의해 경계가 재구성되고, 시간의 변화에 따라 동일한 공간이 다른 모습 을 보이며 시간에 따른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시간과 공간의 재구성은 자본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이다. 출근시간대에 출근길에 올라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행을 떠나도 되는 사람이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존 홀러웨이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총체성과 공간적 경계, 그리고 자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의 총체성'은 지구적 (즉 세계적 범위의) 총체성이다. 자본은 본성상 어떠한 공간적 경계도 알지 못한다. 자본주의를 초기의 계급 착취 형태들로부터 구분하는 노동자의 '자유'는 동시에 (훨씬 더 실제적 의미에서) 착취자의 자유이다.(존 홀러웨이, 1999: 183)

착취관계는 공간 속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공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불확정적이며 항상 변화한다. 공간의 절대적 우연성은 화폐로서의 자본의 실존 속에 요약되어 있다. 화폐 자본이 이동할 때는 언제나 (즉, 항상적으로) 자본과 노동 사이의 관계의 공간적 양식이 변화한다.(존 홀러웨이, 1999: 184)
이러한 개별적인 시간의 일상을 모으고 그 속에 있는 공간 속의 자유를 재구성해보면 기든스가 지적하듯이 감옥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의 자유도로 파악될 수 있다. 이에 반해 홀러웨이의 지적은 노동시간이 화폐에 의해 매개되고 자유를 가장한 시장에 의해 착취관계의 공간이 생성된다는, 즉 마르크스의 자본론 분석에서 그 이상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 사회 속에서 작동하는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을 재확인하고 그 내용을 풍부히 하는 것 자체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이후의 문제를 상상하거나 또 다른 대안적 존재의 확인도 중요하다.  

그 이후가 어떤 형태일까? 화폐와 시장이 사라진다고 착취적 공간이 사라질까? 그러나 지금 상태에서 화폐와 시장의 폐지는 공간의 폐쇄를 가져올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공간의 불확정성과 변화를 없앨 수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착취적 관계 구조의 고착화와 사회적 관계의 폐쇄를 가져올 수 있다. 그나마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상의 자유도마저 폐지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기존 사회주의가 가지고 있던 한계들이기도 하다.

이는 화폐와 시장의 성격을 바꿔야 하는 문제, 또는 화폐와 시장 개념의 재구성 문제로 나갈 수 있다. 다른 의미로는 어떤 화폐와 시장인가 하는 대안화폐와 대안시장의 문제로 접근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도시 공간에서 존재하고 활성화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역으로 존해할 수 없는 조건은 무엇인가에 대한 접근과 조사도 필요하다.  

<참고문헌>
존 홀러웨이, "지구적 자본과 민족국가", 워너 본펠드, 존 홀러웨이 편, 이원영 옮김, 1999, [신자유주의와 화폐의 정치], 갈무리.
                  자본의 위기와 그 변화의 징후 - 도시 노숙인
                                         - 왜 도시에는 노숙인이 존재하나?  -


                                                                                                                 
I. 들어가며

신문에 서울시에서 9일 노숙인들의 동사와 안전사고를 막기 위해 오는 15일부터 이듬해 3월15일까지 노숙인 보호대책을 시행한다고 밝혔다. 신문에 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습추위가 시작된 가운데 서울시가 노숙인을 위한 동절기 보호대책을 마련했다.
서울시는 9일 노숙인들의 동사와 안전사고를 막기 위해 오는 15일부터 이듬해 3월15일까지 노숙인 보호대책을 시행한다고 밝혔다.
시는 철도공사, 시민·종교단체, 자원봉사자 등의 협조를 받아 1대1 밀착상담 시스템을 가동키로 했다. 이를 위해 노숙인 상담반을 11개조 62명으로 대폭 늘렸다. 상담반원들은 서울역, 영등포역, 용산역, 청량리역 등 노숙자 밀집지역을 24시간 누비며 보호시설 입소를 적극 유도할 계획이다. 또 손전등과 담요, 보온통 등도 준비해 필요할 때 제공한다.
노숙인을 위한 무료진료소도 서울역 앞에 설치된다.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30분까지 공중보건의, 간호사, 사회복지사가 무료 진료를 펼칠 예정이다. 이뿐만 아니라 거리의료상담반도 운영, 노숙 밀집지역을 돌며 의료상담 서비스도 지원한다. 시는 특히 일자리 제공 등 자활프로그램을 확대하기로 했다.
올해부터 시작한 일자리 제공 사업과 특별자활사업을 늘려 모두 2840명에게 근로기회를 제공한다. [서울신문 2006-11-10 09:03]
서울시가 가만히 손놓고 있는 것보다야 잘한 일이지만 사실 씁쓸한 기사다. 이 기사는 우리가 우리 사회 자체를 보는 시각과 그 속에서 나오는 현재의 복지정책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사다. 나라마다 처지가 다르고 그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있는거라고 말하면 더 할말은 없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스스로의 무능함과 한계에 대한 합리화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것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 무능함과 한계에 대한 합리화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사실 여기에는 첨예한 시각대립이 존재하고 있다. 그 하나는 대중들에게 그 책임을 돌리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책입안자들과 같은 지배자들과 그 지배연합에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사회운동이 존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논의는 이 글의 범위를 넘는다.

간단히 말하면, 예컨대 집을 몇 채씩 소유한 사람들의 집을 제한하고, 도시에 빈 집들에 노숙인들이 들어가서 살 수 있게 하고, 사회적으로 노동시간을 대폭 줄여 일자리를 나누자는 운동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려운 것은 국가가 이를 시행하려고 해도 개인(사유재산)의 자유를 국가가 제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국민들이 이를 원하지도 않는다는 견해다. 그리고 대중들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져 있기에 경쟁을 통해 또 다른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지배자들이 한편으로는 대중의 눈을 멀게하고, 이를 이용하면서 지배를 지속시키는 술수에 불과하다는 견해가 있다.

나는 운동의 입장에서 지배자들과 지배연합의 논리가 허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프랑스나 북유럽 사민주의 국가를 설명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 같은 영미식 국가가 왜 양극화가 심화되는지 설명할 수도 없다. 여기서는 다만 도시 노숙인에 대해 생각해 볼 문제점들에 대해 정리를 해보고 싶다.

II. 도시 변화의 징후-노숙인 문제
1. 현재
어느 도시에나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노숙인들이 존재하고 있다. 왜 도시에 노숙인들이 존재할까? 그것이 가능한 조건은 무엇인가? 단순히 주거공간이 없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주거 공간이 생긴다면 노숙인이 없어질까? 오히려 먹고사는 문제를 도시의 거리에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거리에서의 구걸행위, 소매치기, 시민에 대한 위협, 그리고 구호센터의 지원...하지만 일자리 제공과 자활프로그램? 근본적인 해결책일 수 있다. 하지만 현재 노숙인의 문제는 그 일자리로부터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과정에서 나온 문제이다. 그런데 어떻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자활프로그램을 실시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사회 구조적인 변화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그런데 도시마다 노숙인들의 존재 양태가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시마다 사회적 부의 분배 정도가 다르기 때문일까? 즉 거리로 나앉지 않을 정도로 도시민들 모두 먹고 살 정도가 되기 때문일까? 아니면 푸코의 말처럼 시민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시설(보호시설, 자활시설, 감옥, 병원 등)에 감금을 당한 것일까? 그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존재양태가 자본의 확대재생산 과정에서 야기되는 위기국면과 이것에 대한 징후, 그리고 그 조절양식의 상이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사회적 관계의 해체를 통한 자본주의적 생산구조에 대한 결과가 오히려 사회적 책임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닌가?

2. 과거
역사 속에서 노숙인은 사회적으로 어떤 식으로 존재해왔으며 어떻게 다루어졌을까? 노숙인은 자본주의 시대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자본주의 이전에 노숙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마찬가지로 그 조건은 무엇인가? 존재했다면 노예제, 봉건제 사회에서 노숙인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3. 미래
자본의 시대가 끝나고 나면 노숙인은 없어지는 것일까? 자발적 노숙인조차도 없는 사회가 가능할까? 자발적 노숙인이 존재한다면 그 조건과 의미는 무엇일까? 역으로 불가능 하다면 그 조건과 의미는 무엇일까? 또 다른 형태의 사회적 감금을 의미하는 것일까?


4. 노숙인의 문제는 역사 속에 존재하는 지배적 생산양식과 그에 따른 사회적 지배, 그리고 그 변화의 징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다시말해 노숙인 문제는 지금 이 시대, 자본의 위기를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것은 사회적 연대(운동)와 지배의 문제로 다시 연결되는 것은 아닌가?

III. 최근 선행연구 결과

노숙인 인권침해 실태는 각 영역에서 다차원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동시에 각각의 요소가 상호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거리 생활에서 불규칙한 식사와 영양 및 수면부족이 건강권을 위협하고 또한 이러한 문제들은 적절한 주거생활이 보장되지 못함과 연결되어 있었다. 주거 생활은 취업 및 노동권과 연결되어 있고, 안정적 노동을 통한 소득의 획득이 이루어지지 아니함으로써 주거 불안정과 연관되어 있었다(정원오 외, 2005:13).

노숙인의 주거권 문제는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노숙인은 곧 주거권이 보장되지 못한 집단이며, 그 원인이 경제적 문제이든, 실업의 문제이든, 혹은 정신질환의 문제이든, 노숙상태로 떨어지는 근본적인 원인은 다양하지만, 노숙생활의 직접적인 이유는 주거 곤간이 없다는 점이다(정원오 외, 2005: 15).
정원오 외, '2005년 인권상황실태조사 연구용역보고서 - 노숙인 인권상황 실태조사', 국가인권위원회,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