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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스콧 니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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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전 광화문 집회에서 조세희 작가를 본 일이 있다. 당시 그는 카메라를 들고 집회 차량 위에 올라가 시위대의 모습을 연신 사진에 담고 있었다. 노년의 허름한 차림, 하지만 젊은이들보다  더 치열해 보이던 모습...오늘은 광화문에서 민중 총궐기 대회가 있는 날이다. 오늘도 그를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내가 그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소설을 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87년 시국이 어수선할 무렵. 학교 옆 대학에서는 집회를 하고 거리에는 데모대열이 줄을 잇곤 했다. 최류탄 가스 때문에 선생들도 우리들도 교실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때 처음 최류탄 가스라는 걸 알았다. 선생들은 우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며 집회장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명령을 했다. 물론 갔다 걸리면 각오하라는 협박도 잊지 않았다.

나는 대학 앞 뒷골목 헌책방에 들러 이 책을 집어들었다. 면식있던 헌책방 주인은 내가 소설책을 사면 싸게 주곤 했다. 그냥 싼 값에 사들고 와서 읽었지만, 내게는 참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 삶의 모습들, 그리고 이게 우리네 삶의 현실이구나 하는 생각들.

지금 생각하면 산업화시기나 지금이나 그 삶의 모습들은 변한게 없는 것 같다. 최근들어 그 모습들은 오히려 또렷이 재생산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왜일까?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재생산되고 있는 것일까? 차이점이 있다면 70년대 도시빈민 삶의 시공간과 지금의 차이점은 무엇이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

어쩌면 이 곳의 글들은 또 다른 형식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소설쓰기가 될 수도 있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과 같이 허무주의를 빌어 상징적 의지로 끝을 내는 것이 아닌 또 다른 형식의 소설쓰기.

[관련논문]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연구 - 시간과 공간을 중심으로

프롤로그 III.

도시적 일상 속의 공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공간처럼 여겨지지만 실상 그렇게 자유스럽지만은 않은 공간이다. 아침에 집을 나와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출근길에 올라야 한다. 하지만 출퇴근 시간대, 저 아스팔트 길 위의 모습과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한적한 시간대(모두 일터에 들어가 있는...)의 길 위의 모습은 다르다. 비록 각자 개인들은 자유스럽게 이 공간을 점유하는 것 같지만 시간의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공간은 그렇게 시간에 의해 경계가 재구성되고, 시간의 변화에 따라 동일한 공간이 다른 모습 을 보이며 시간에 따른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시간과 공간의 재구성은 자본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이다. 출근시간대에 출근길에 올라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행을 떠나도 되는 사람이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존 홀러웨이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총체성과 공간적 경계, 그리고 자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의 총체성'은 지구적 (즉 세계적 범위의) 총체성이다. 자본은 본성상 어떠한 공간적 경계도 알지 못한다. 자본주의를 초기의 계급 착취 형태들로부터 구분하는 노동자의 '자유'는 동시에 (훨씬 더 실제적 의미에서) 착취자의 자유이다.(존 홀러웨이, 1999: 183)

착취관계는 공간 속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공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불확정적이며 항상 변화한다. 공간의 절대적 우연성은 화폐로서의 자본의 실존 속에 요약되어 있다. 화폐 자본이 이동할 때는 언제나 (즉, 항상적으로) 자본과 노동 사이의 관계의 공간적 양식이 변화한다.(존 홀러웨이, 1999: 184)
이러한 개별적인 시간의 일상을 모으고 그 속에 있는 공간 속의 자유를 재구성해보면 기든스가 지적하듯이 감옥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의 자유도로 파악될 수 있다. 이에 반해 홀러웨이의 지적은 노동시간이 화폐에 의해 매개되고 자유를 가장한 시장에 의해 착취관계의 공간이 생성된다는, 즉 마르크스의 자본론 분석에서 그 이상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 사회 속에서 작동하는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을 재확인하고 그 내용을 풍부히 하는 것 자체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이후의 문제를 상상하거나 또 다른 대안적 존재의 확인도 중요하다.  

그 이후가 어떤 형태일까? 화폐와 시장이 사라진다고 착취적 공간이 사라질까? 그러나 지금 상태에서 화폐와 시장의 폐지는 공간의 폐쇄를 가져올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공간의 불확정성과 변화를 없앨 수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착취적 관계 구조의 고착화와 사회적 관계의 폐쇄를 가져올 수 있다. 그나마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상의 자유도마저 폐지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기존 사회주의가 가지고 있던 한계들이기도 하다.

이는 화폐와 시장의 성격을 바꿔야 하는 문제, 또는 화폐와 시장 개념의 재구성 문제로 나갈 수 있다. 다른 의미로는 어떤 화폐와 시장인가 하는 대안화폐와 대안시장의 문제로 접근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도시 공간에서 존재하고 활성화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역으로 존해할 수 없는 조건은 무엇인가에 대한 접근과 조사도 필요하다.  

<참고문헌>
존 홀러웨이, "지구적 자본과 민족국가", 워너 본펠드, 존 홀러웨이 편, 이원영 옮김, 1999, [신자유주의와 화폐의 정치], 갈무리.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막히는 버스 창밖 건물들을 보며 내가 왜 이 도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전부터 나는 언젠가 이 도시를 떠나리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항상 마음 속에 이 도시를 언젠가 떠나는 모습을 그리며 생활해야했던 그 이유가 무엇일까?

20대 초반, 이 도시를 피해 제주도 시골 농장에 내려가 귤을 따며 지냈던 선과장 생활부터 그 방황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낮에는 아주머니들과 땀 흘리며 귤박스를 나르고 수다 떨고 일하다 밤이 되면 동료들과 선과장 쪽방에 모여 술도 마시고 화투도 쳤다. 어쩌다 비가 와서 일이 없는 날이면 바닷가 선술집에 들어가 있는 횟감에 술을 마시다 나왔다. 그렇게 내 짧은 20대 초반은 지났다. 그리고 언젠가 그 곳으로 다시 가리라는 약속을 하며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왜 그랬을까...

20대 후반, 첫 직장 연수가 끝나갈 무렵 나는 온산으로 발령을 내겠다는 소식을 들었다. 구태여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나 온산에 갈 이유가 없었다. 연수 마지막 3일을 남겨 놓고 난 인사과에 퇴사하겠다는 메세지를 남겼다. 그리고 동기들과 악수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인사과에서는 출퇴근할 수 있는 용인으로 발령을 내겠으니 연수를 마치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겨울을 마치고 찾아 간 용인.

봄 무렵, 길가에 핀 벚꽃 길을 따라 산을 넘어 마을로 접어들면 나는 가슴이 뛰었다. 푸른 논과 그 논에서 저녁이면 들려오던 개구리 소리. 점심이면 멀리 언덕에서 피어오르던 아지랑이들... 그 자체가 좋아 나는 이장집에 방을 구해 눌러 앉아 시간을 보냈다. 겨울 무렵, 가끔 아침이면 산에 눈꽃이 피고 온 세상은 눈에 하얗게 덮여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 곳을 떠나 다시 도시로 돌아와야 했다.

이제는 그 곳으로 돌아가려해도 더 이상 그 공간은 남아있지 않다. 제주도에는 이제 귤밭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는 소식을 접한다. 용인에 있던 논밭은 이제는 사라졌다. 그리고 그 곳에는 아파트촌이 들어섰고 뉴스에 오르내리는 부동산 투기의 장소가 됐다. 더 이상 갈 수 없기에 나는 마음 속에서 또 다른 공간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어린 시절의 경험들이 환상 속에서 피안으로 자리 잡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갈 수 없음을 아예 합리화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건 몸으로 때우거나 돈을 내야 하는 이 도시의 삶, 한편으로는 그 압력을 견디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벗어나려고 마음먹고 있는 내 삶의 모습들. 모순적이지만 이게 현실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사무실이나 공장안에서 잘 수도 술을 먹을 수도 없다. 그 곳에는 가족들도 없다. 그래서 밖으로 나와 버스나 전철을 타고 번화가로 가서 술을 먹어야 한다. 그리고 또 차를 타고 집에 들어와 자고 다음날 다시 차를 타고 출근해야 한다. 주말이면 그렇게 또 차를 타고 어디론가 여행이랍시고 떠난다. 너무 지친다.

소외라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일터라는 생산의 공간, 술을 먹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풍경도 볼 수 있는 소비의 공간, 그리고 그 공간들을 연결시키는 유통 공간 사이의 소외가 결국은 삶 자체의 소외를 낳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도시를 떠난다고 해결이 될까? 어느 정도 해결이 되겠지만 나는 매번 다시 도시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설사 떠난다 해도 그 곳은 다시 도시로 변해갔다. 그 무서운 중력에 짓눌리고 마는 현실. 그 속에서 내가 나를 포기하고 있을 무렵, 나는 내 아버지 세대인 박씨 아저씨의 삶을 만났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나의 관심은 산업화 시기의 산업도시보다는 산업화 이후 현재적 시점의 도시적 삶과 노동에 관한 주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산업화 이후를 어떻게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대면하게 된다. 쉽게 생각하면 산업화 과정을 거쳐 탈산업도시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탈산업도시라는 것의 의미에는 기존의 산업도시에서 발전한 형태의 탈산업도시라는 의미와, 역으로 쇠퇴한 의미의 탈산업도시를 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산업공동화 도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용어가 갖는 의미 구분이 필요하다.

탈산업도시가 전자적 의미와 후자적 의미를 갖는다고 가정할 때 두 가지 문제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첫째, 도시의 탄생 초기부터 산업화 이후의 두 가지로 나눠지는 경로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지점이다. 둘째, 도시간에는 어떤 관계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지점이다. 예컨대 한 사회에 두 가지 의미로 분할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그 차이점은 무엇이고 두 도시간의 연계는 어떻게 되나? 그리고 세계체제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전자의 의미에 해당하는 탈산업사회와 관련해 읽을만한 자료를 올린다. 

출처: 펜실베니아대
( http://www.sas.upenn.edu/urban/syllabi/Spring%2005/429.05a.pdf )


David Harvey의 spatio-temporal fix라는 개념을 접하게 되었다. Harvey의 지리학적 용어이지만 사회학적 용어라고도 할 수 있다. 과잉생산과 축적의 모순을 타개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안정된 고정투자 속에서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고 한편으로는 공간적 확장을 모색하는 과정...공간과 시간, 그리고 사회적 관계성을 내포한 개념이다. Andrew Herod는 이러한 개념을 확장해 인문지리학에서  노동에 중점을 두고 노동지리학(Labor Geographie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나 또한 도시 속에서 노동의 관점에서 시간과 공간의 변화와 운동에 대한 고민을 풀어내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하지만 아직은 이러한 생각을 개념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용어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당분간 이러한 고민에 대한 생각을 노동지리학이라는 용어로 대체해 쓰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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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I

마르크스의 분석은 생산영역이 1차적 분석의 대상이었다. 생산영역에서 어떻게 노동자 계급이 형성되는지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생산영역과 소비영역과의 관계에 대한 분석은 미약하다.

그러나 당시의 분석 대상은 소비의 영역, 또는 사적 영역이라는 것이 생산의 영역과 통합된 삶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예컨대 공장 밖의 소비영역 중 하나인 주거 공간은 집단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집은 잠자는 시간 외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주로 공장에서 생활하고 공장 밖으로 나와서 공장 사람들과 생활을 하는 조건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즉 생산영역과 소비영역은 통합된 형태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도시에서의 삶의 모습은 어떤가? 교통통신의 발달은 생산영역과 소비영역의 분할을 가속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소비영역을 다시 세분화하고 있다. 즉 소비영역에서 계급 형성을 위한 동질적 조건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저녁에는 직장과 한 시간이 넘는 거리에 있는 집에 들어와 피곤에 지쳐 잠자기에 바쁘다. 옆집에는 누가 사는지도 알 수 없다. 주말에는 하루 종일 집에서 잠을 자거나 혼자 TV를 보는 게 고작이다.

이러한 현실은 어디서부터 기인하고 어떤 과정을 통해 일상 속에 자리를 잡는 것일까? 기존 연구는 주로 공장 안의 생활을 중심, 즉 생산영역에서 노동과정을 중심으로 분석을 해왔다. 하지만 공장이나 회사라는 생산영역에서 역학관계를 바뀐다고 소비영역이라는 일상생활 속의 삶의 양식들이 바뀔까? 결국 가정도 결론도 생산의 영역만 한정된 외눈박이 연구만 진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왜 소비영역이라는 일상 생활과 생산영역이라는 노동과정을 연결시키지 않고 있는 것일까? 사회적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분명 생산영역과 소비영역은 통합되어 있음에도 왜 이부분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적은 것일까?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의 일상생활은 어떻게 고착화되어 있는지 아직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생산영역에서 우리는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고 있는가? 생산영역에서의 투쟁은 승리보다 많은 패배의 경험 속에서 끝을 맺어오고 있다. 이것은 또 다른 투쟁을 막는 형태로 재생산된다. 그것을 매개하는 공간이 어쩌면 소비영역이라는 일상의 삶일 수 있다. 설사 투쟁이 승리로 끝난다 해도 또다시 일상생활은 생산영역을 이전의 과정으로 돌리는 관성적 작용을 하고 있기도 하다. 사회운동가들, 특히 노동운동가들은 노동자들이 공장(회사)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말은 하지만 분석도 실천도 항상 공장 안에 머물러 있는 현실이다. 공장 밖으로 나와서는 공장 안에서의 논의는 확산되지 않는다. 그리고 공장 밖에서는 말 그대로 열심히 놀고 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광고 카피. 아마도 현실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한 광고 카피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일종의 환각제와도 같은 효과들. 또 다른 형태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기묘한 도시에서의 삶에 대한 분석을 어디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아마도 기본은 도시라는 공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관계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물론 생산영역과 소비영역의 통합 속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떤 사람들이 섞여 살아가고 있으며 관계는 어떻게 형성하고 있으며 어떤 의사소통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심도 생각해보면 너무 방대한 범위 속에 묻혀 그냥 공상에 머물 수 있다. 구체적인 나의 생활, 현실과 대화하고 그 속에서 출발하는 것이 순서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주변 사람들과 이러한 삶의 모습을 바꾸려고 해도 어렵기만하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고 실천을 시도해보지만, 관계를 만드는 것 자체가 힘들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다 결국에는 벽에 부딪혀 좌절하고 마는 현실이다. 그나마 좌절하지 않는 경우는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단체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도시 속의 또 다른 게토로 머무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왜 말이 안 통하는 것일까? 이것은 이미 나와 다른 사고와 언어체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회에서 내가 비정상인거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회는 어떤 식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내가 사는 동네. 나와 동일한 공간에 살지만 그 의미는 다른 세계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떤 과정을 통해 그 세계가 형성되었으며 공고화되어 있을까? 그만큼 나는 소외의 공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런 식인지도 모른다. 이런 현실 속에서 풀뿌리 운동이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현실은 모르고 풀뿌리만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그 풀뿌리가 진보의 싹을 죽일 수도 있다. 이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